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03)
아카데미가 망했다 103화
늦은 오후, 아몬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아나르엘의 말에 의하면, 빅토리아 황후는 지난번의 대참사를 겪었음에도 아몬의 동행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 청년이 잘못한 건 아니니까요. 마침 한번 만나 보고 싶기는 했는데 잘됐군요. 산드리오에겐 따로 알리지 않을 테니까, 후원으로 오면 될 거예요. 그 청년을 수행원으로 데려오면 되겠네요.’
아나르엘이 전달해 준 황후의 말에 아몬은 잠시 얼떨떨했다.
‘나를 한번 만나 보고 싶긴 했다고? 어째서?’
뭐, 그 이유는 조금 있다 황후를 만나면 밝혀질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오늘 목적은 황태자와 안면을 터두는 것. 아나르엘…… 아니, 학교장님께서 은근슬쩍 자리를 만들어 준다고 하셨으니, 일이 잘 풀리기만을 바라야지.’
다행인 점은 황후도 황제와 맞닥뜨리면 일을 그르칠까 걱정인지 아나르엘을 후원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걸친 정장의 정리를 깔끔하게 마친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몬의 얼굴은 희망과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잘만 풀리면,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준비는 끝났나요?”
아나르엘의 부름에 아몬은 거울에서 멀어졌다.
“예, 학교장님. 어서 출발하시죠.”
* * *
황궁의 후원.
아몬도 지난번에 한번 와 봤던 곳이다.
제국 4대 기사들의 회합이 있었던 곳으로, 아몬을 제자로 삼기 위한 경쟁이 한바탕 일어났었던 장소.
그곳에 위치한 십수 채의 별채 중에서, 아몬과 아나르엘은 가장 화려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몬, 오늘은 부디 행동거지를 조심하세요.”
당부하는 아나르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아몬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대체 저를 뭘로 보시고, 저는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죠.”
여태 그녀가 봐 왔던 아몬은, 깝칠 땐 깝치더라도 상황과 장소를 가려 가며 깝친다.
나름 장점이라면 장점인 부분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봤었던 산드리오의 반응이 너무 유별나긴 했어.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시간이 나면,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아나르엘은 별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듯 거침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꽤 자주 와 봤던 모양이다.
“빅토리아! 저 왔어요!”
마치 제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아나르엘의 행동에 아몬의 썩은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학교장님이나 행동거지를 좀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행히도, 꽤 자주 와 봤으리라는 추측이 사실이었는지 금세 반가움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르엘, 이게 얼마만인가요?”
별채의 한편, 다과가 잔뜩 놓여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황후가 몸을 일으켜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고생은요. 제 워프 마법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요.”
“후후, 아나르엘의 워프 마법. 아아, 그때가 그립네요.”
“그러게요. 그립네요…….”
아나르엘과 빅토리아의 눈이 아련함으로 물들었다.
한때 아나르엘은 빅토리아, 산드리오와 함께 대륙을 종횡했다.
모험, 탐험, 그리고 개척.
그 여정은 추억으로 남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전혀 잊히지 않았다.
‘아나르엘! 워프 마법을 부탁해요!’
‘네!’
‘아나르엘 공주! 워프를 부탁하겠소!’
‘네!’
‘아나르엘! 워프!’
‘네!’
‘워프으으으으!’
‘네에에엑!’
생각해 보니, 따로 하는 일 없이 줄곧 워프 마법만 썼던 것 같기도 하고?
약간 흐려진 기억에 귀를 갸웃거린 아나르엘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요즘 좀 어때요? 이래저래 일이 많았으니 걱정되네요.”
빅토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요. 산드리오는 아직도 벨스라임 황무지의 ‘벨’자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고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산드리오 때문에 걱정이 큰데, 이번에 군터 군도의 잡…… 음! 군터 군도 연합이 이를 드러내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
“아하하. 그래서 빅토리아가 직접 나선 거군요.”
“그렇죠. 맞아, 그나저나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빅토리아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렇게 모처럼 만난 두 명의 여인이 담소를 나눈 지 10분이 흐르고.
30분, 1시간, 그리고 2시간쯤 지났을까.
아몬의 얼굴에 걸려 있는 썩은 미소는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난 누구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아나르엘의 뒤에 몇 시간을 우두커니 서 있다 보니 자신이 아몬인지, 인간 모습을 하고 있는 한 그루 나무인지 모를 지경!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빅토리아는 아나르엘과 즐거이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서늘하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 배 경진대회에서 황제를 단숨에 제압하고, 운영중단 권고 철회를 위해 방문한 황궁에서는 몸소 ‘반성의 시간’을 열어 황제를 단죄하는 광경을 직접 보았던 아몬은 구렁이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못 입을 열었다간 나도 맞는다. 말 그대로 개처럼 얻어맞는다.’
그렇기에 아몬은 아나르엘의 당부대로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었다.
어쨌건 아몬이 이곳에 따라온 것은 표면상 아나르엘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야기가 길어지자 목이 탔는지, 차로 목을 축인 빅토리아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그나저나 실례했군요. 미안해요.”
“네?”
느닷없는 사과에 아나르엘이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렸다.
빅토리아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넌지시 아나르엘의 뒤편을 바라본 빅토리아가 말했다.
“저 청년을 너무 오래 세워 뒀군요. 긴 시간이 될 텐데 자리라도 권해야 했거늘.”
“……아!”
비로소 아몬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틀어막은 아나르엘이 여태 자신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몬을 돌아봤다.
“그, 그러고 보니…… 미안해요, 아몬 선생님. 오랜만에 빅토리아를 만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아몬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썩은 미소는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운 웃음으로 보였다.
“아.닙.니.다, 학교장님. 모처럼 오랜 지기를 뵌 자리니 그럴 수밖에요.”
“아아! 역시 아몬 선생님!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하.하.하. 별말씀을요.”
주거니 받거니, 아나르엘과 아몬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빅토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일단은 합격.’
보아하니 무슨 목적이 있어 아나르엘과 함께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명목상 아나르엘의 수행원으로 온 입장인데, 대뜸 입을 열어 용건을 꺼냈다면…… 음, 피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로군.’
즉 몇 시간 내내 아몬을 세워 둔 것은 그의 인간성, 됨됨이를 살펴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녀가 생전 몇 번 만나 봤던 아몬의 할아버지, 벨리알 드레이크의 바닥을 찍은 인간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벨리알이었다면, 진작 다과상을 뒤집어엎고 한바탕 흔들어 제꼈겠지. 아몬 드레이크라고 했던가? 벨리알에게서 이런 손자가 나오다니.’
이런저런 면을 보니, 아몬에게 합격점은 줄 수 있었다.
명목상 수행원이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텐데 몇 시간 내내 뒤에서 말없이 서 있으면서도 싫은 내색 하나 안 내비치던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피식 웃은 빅토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보다 어서 앉으세요. 그리고 거듭 미안하군요. 모처럼 아나르엘을 만나서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쪽을 잊고 말았어요.”
거짓말이다.
계속 몇 번 이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을 아는 아몬은 칼처럼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황후마마. 수행원으로서 온 것이니 괘념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후후, 아니에요. 아, 이러다 끝도 없겠군요. 앉으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몬이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몇 시간 내내 서 있었는데 앉으라니 괜히 반가웠다.
그리고 빅토리아가 아몬에게 다과를 권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아나르엘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빅토리아.”
“응? 뭐죠?”
헤실 웃은 아나르엘이 말을 이었다.
“빅토리아와 산드리오의 맏아들을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여태 아몬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나름 신경 써서 목적을 이루게 해 주려는 의도!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몬은 쿠키를 입에 넣으려다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은근슬쩍 주선해 본다더니 이렇게 대놓고……?’
이건 티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지 않는가!
빅토리아도 부자연스러운 아나르엘의 말에 뭔가 눈치를 챘는지, 은근히 이쪽을 보며 웃었다.
“맏아들이라면, 황태자 말인가요?”
“네. 네. 전부터 말로만 들었지, 막상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예전부터 몇 번 불렀는데, 아나르엘이 오지 않았잖아요?”
“조만간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잊게 되더라고요.”
“하여간 엘프의 시간관념이란.”
피식 웃은 빅토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한 번도 못 봤다…… 그렇군요.”
묘한 어투로 ‘한 번도’라 중얼거린 빅토리아가 픽 웃었다.
‘산드리오가 신분을 숨기라고 했다더니, 아직 들통 나진 않은 모양이로군.’
가문 간의 오랜 악연을 끊기 위해 아카데미로 향했다더니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드레이크 가문의 아이가 먼저 우리 황태자를 만나려는 걸 보면, 아주 안 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인데…… 뭐,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튼 그 아이를 보지 못한 지도 시일이 꽤 흘렀으니 한번 불러 볼까?’
빅토리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한번 불러 보죠.”
* * *
점심 식사 후, 양치질을 하던 카이가 고개를 돌렸다.
연락용 수정구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응? 이 색은 어머니?’
느닷없이 어머니께서 웬 연락이실까?
퉤, 하고 양칫물을 뱉은 그가 얼른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예, 어머니.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카이야스, 제3 별궁으로 잠시 와 보거라.
“예? 그게 무슨…….”
하지만 이유는 고사하고 대답조차 없이 연락이 끊겨 버렸다.
“……하여간 어머니도 참.”
또 이런 식이시군.
아버지의 스승에 걸맞게, 어머니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터프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황후의 신분으로 군터 군도 연합을 향해 돌격했겠지.
“뭐, 그럼 잠깐 시간을 내서 다녀올까.”
거울을 힐끔 바라본 카이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 걸어 뒀던 용모 변화 마법이 거둬지고, 다소 평범한 인상이었던 ‘카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이지적인 미남자 ‘카이야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분명 ‘카이야스’를 부르셨으니, 황태자의 입장으로 부르신 것이리라.
‘이 얼굴도 간만에 보는 것 같단 말이지.’
피식 웃은 그가 옷장에 숨겨 뒀던 황실의 문장이 찍힌 예복을 꺼내 걸쳤다.
그리고 황궁으로 향하는 워프 마법을 캐스팅했다.
슈우욱-!
이윽고 마법진에 도착한 ‘카이야스’가 별궁이 있는 후원으로 향했다.
‘간만에 오는 것 같군. 분명 얼마 전에 왔는데 말이지.’
하긴, 그땐 아버지가 벨스라임 황무지의 사업 실패로 앓아누운 바람에 황태자로서 대신 국정을 보느라 후원의 풍경을 눈에 담을 일도 없었다.
‘뭐, 이렇게 온 김에 레일라나 보고 갈까?’
당시 국정을 보느라 폭식을 거듭했기에 찐 살 때문에 약혼녀인 레일라가 비꼬곤 했으니, 도로 원래대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 줘도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후원으로 향하던 카이가 흠칫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별궁 밖의 담장 아래, 아몬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고 있었다.
몇 시간 내내 서 있느라 몸이 찌뿌둥했기에,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몸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서, 선배님이 어째서 이곳에……?’
설마 황태자를 찾느니 뭐니 하더니, 자신을 만날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이 기척은 학교장님? 설마 학교장님을 통해서 알현을 청한 건가?’
당황에 젖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카이야스가 한숨을 쉬었다.
‘휴, 도대체 선배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원.’
그래도 아몬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내 정체를 밝힐 순 없다. 좀 더 관계가 무르익고, 서로를 완전하게 믿을 수 있을 때 정체를 밝히는 게 좋겠지.’
그렇기에 카이야스는 그대로 아몬을 지나쳐 별궁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항상 자신의 얼굴에 용모 변화 마법을 걸어 뒀으니 아몬도 자신을 알아보진 못하리라.
‘응? 근데 뭐지?’
아몬을 지나쳐 별궁으로 들어가려는 와중, 아몬이 자신을 빤히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의심 어린 시선에 카이야스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 무릎 꿇고 예를 표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황태자에게 최소한의 예는 표하셔야 남들 보기에…….’
“뭐야? 카이 네가 여긴 웬 일이야?”
“엥?”
아몬의 아는 척에 카이야스가 황급히 얼굴을 더듬었다.
용모 변환으로 인한 뭉툭한 코가 아닌, 오뚝하고 높은 코였다.
턱선도, 입술도, 본래 자신의 것이 맞았다.
그런데 아몬은 어찌 자신을……?
‘서, 설마 처음부터 용모 변환 마법이 통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카이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