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05)
아카데미가 망했다 105화
아나르엘은 희망으로 꽃밭만 보고 있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아카데미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아무리 퍼뜨린다 하더라도, 아몬이 여태 겪어 온 사태와 상식을 감안하면 이번에도 절망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했듯,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잘 풀리면, 아미의 앞날 보장과 카셀라그 어르신께 체면을 살릴 수 있겠지.’
더 이상 남아 있을지도 모를 한 가닥 희망에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잠깐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입을 열었다.
“학교장님.”
“네?”
“생각해 봤는데, 전단지를 뿌릴 사람이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눈치채셨군요.”
“……휴우.”
주정뱅이 마리온이 이 작업에 착수했다가는 사람들은 술에 젖어서 술 냄새가 풀풀 나는 전단지를 손에 넣을 게 분명했다.
슬로스는? 전단지를 베개 삼아 한적한 곳에서 낮잠이나 잘 것이다.
‘그럼 피오라? 아냐, 그 망나니가 무슨 아카데미 홍보야. 구경 온 사람들 멱살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 결국 남는 게 카이밖에 없는데…….’
황후의 말에 의하면 ‘벌레 먹는 카이’는 농담이었다지만, 때마침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격언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물론 여태 보아 온 카이는 고지식하기는 해도 ‘벌레 먹는 카이’라는 칭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지만, 여태 아카데미에서 호되게 뒤통수를 맞아온 아몬의 피해의식은 혹시 모를 위험은 배제하라 말하고 있었다.
‘전단지를 뿌리다 저놈 저거 맛있어 보인다며 벌레를 날름 주워 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걸 보면 사람들이 우리 아카데미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한숨을 푹 내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은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대로 노력해 보죠.”
“아아! 역시 아몬 선생님은 늘 저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군요.”
기쁨과 감격으로 하이엘프 특유의 현란한 귀 컨트롤을 선보이던 아나르엘이 당찬 얼굴로 말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당분간 수업은 카이 선생님이 대신 들어가 주실 테니까 다른 업무는 손도 대지 않으셔도 돼요! 아시겠죠?”
오직 아카데미 부흥을 위한 홍보 작업에만 집중하라는 아나르엘의 배려!
그러나 아몬에게 있어서는 재앙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유일한 안식처이자 오아시스인 학생들과의 시간을 뺏겠다는 말인가!’
학생들 역시 카이가 수업에 대신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사태에 절망하며 오열할 게 분명했다.
악독하기 그지없는 아나르엘의 처사에 아몬 역시 분개했지만, 실제로 홍보와 아카데미의 업무를 병행하는 것은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었다.
상업 도시인 아무르의 특성상 홍보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에 한정된다.
아몬의 수업 역시 오후 시간대였고.
‘게다가 아무르 말고 다른 도시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
쯧 혀를 찬 아몬이 말했다.
“다른 도시로 갈 때 드는 비용은 경비로 처리해 주시겠죠?”
“물론이죠. 특별 수당도 있을 거예요.”
“호오. 특별 수당.”
“아카데미 공식 업무이니만큼, 출장 형태로 처리되니까요. 특별 수당이 있는 건 당연하죠.”
그렇다면 아몬도 눈물을 삼키며 학생들과의 해후를 미룰 수 있었다.
학생들은 카이와의 수업에 눈물만 흘리겠지만 말이다.
“그럼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홍보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몬 선생님만 믿고 있을게요!”
문득 아몬은 활짝 웃는 아나르엘의 뒤편으로 산처럼 쌓인 홍보 전단을 바라봤다.
저 무더기로 쌓인 전단지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막막할 법했지만, 아몬의 눈동자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 *
골드로드 상회, 아무르 지부의 최종 책임자.
지부장, 델몬스는 아몬의 등장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몬의 방문은 그렇다쳐도, 그가 웬 종이 무더기를 수레에 가득 실은 채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 아몬 선생님, 갑자기 제지업에 뛰어들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뇨. 아모니스 아카데미 홍보를 위한 전단지입니다.”
“전단지요?”
산처럼 쌓여 있는 종이 중 하나를 들고 살펴본 델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갑자기 웬 종이를 잔뜩 가지고 오셔서 교사는 관두고 제지업에 종사하기로 하신 줄 알았지 뭡니까.”
“무리도 아니죠.”
아카데미에서 이곳까지 수레에 종이를 싣고 오면서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이 ‘저 잡상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눈빛으로 보곤 했었다.
개중에는 ‘티슈가 왜 저리 뻣뻣하냐.’며 수군대기도 했었다.
잠시 후, 델몬스가 차를 내주며 말했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저희 상회에 홍보 전단을 가득 싣고 오시고.”
이래서 상인들이란, 하고 생각한 아몬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다 아시면서.”
“흠.”
하긴, 홍보 전단을 가지고 상회에 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대륙 각지로 향하는 상단을 통해 홍보 전단을 배포하실 생각이군요.”
“그렇습니다.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홍보 대행은 상회가 이따금 처리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물론 거대 상회인 ‘골드로드 상회’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인물들의 의뢰만을 받는다.
고위 귀족의 구인 공고라던가, 의뢰라던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의뢰를 받아 준 만큼 골드로드 상회에겐 이득이 돌아온다.
반면, 이번에는 골드로드 상회가 이 부탁을 받아 줄 이유가 없다.
교사 다섯, 학생 다섯의 망해 가는 아카데미가 아니던가.
‘물론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을 1할 양도해 준 은혜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델몬스는 뼛속까지 상인이다.
원수도, 은혜도 돈 앞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족속!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 1할을 이미 골드로드 상회가 완벽하게 접수한 상황이라 아몬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하하, 아몬 선생님.”
머리를 긁적거린 델몬스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골드로드 상회의 일정은 일분일초가 빈틈없이 정해져 있습니다. 때문에 따로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거절을 들은 아몬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 1할을 양도해 드렸던 걸 감안해도요?”
“그건 정당한 거래일뿐이었지요.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부채를 완전히 없애드렸으니까요.”
“흠. 그렇습니까.”
아몬은 이 상황을 익히 예상했다.
‘상인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들인데.’
어릴 때 혹독한 드레이크 영지에서 자란 아몬은, 이따금 거래를 위해 인근의 도시인 에덴에 갈 때마다 상인들의 피도 눈물도 없음에 종종 감탄했었다.
‘어른이 되면, 나도 꼭 저렇게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었지.’
하지만 보라.
지금의 아몬은 마음이 너무나도 여리고 약한, 인자하고 정 많은 일개 교사일 뿐이었다.
스스로의 유약함에 안타까움 섞인 한숨을 내뱉은 아몬이 입을 열었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상회의 일정이 그러한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
“하지만 아쉽군요.”
“예?”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 1할을 추가로 양도할지를 아카데미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마당이었는데,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시니 아카데미 입장에선 입맛이 영 씁쓸합니다.”
그 말에 델몬스의 몸뚱이가 퍼뜩 굳었다.
“키,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 지분 1할 추가 양도요?”
그러고 보니 아모니스 아카데미는 아직 1할의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골드로드 상회는 새로이 얻은 1할의 지분을 통해 상당한 이윤을 거두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는 델몬스를 바라본 아몬이 빙그레 웃었다.
어느새 아몬은 거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상회인 이상, 이득이 따르지 않는 행위를 피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육자니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정’을 우선시하지요. 때문에 오랫동안 교감해 온 가장 먼저 골드로드 상회를 찾아온 건데…… 어쩔 수 없겠군요.”
이른바 ‘은혜도 모르고 정 없게 우리를 내치느냐.’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 말뜻을 이해한 델몬스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아, 아몬 선생님! 잠시만요!”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백금상단에 가 봐야 해서 오래는 못 들어 드릴 것 같군요!”
백금상단!
골드로드 상회와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안 그래도 그들이 킹오브망고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혈안이 된 상태라는 소식을 접한 델몬스는 이대로 아몬을 놓칠 수는 없었다.
“아몬 선생님! 저희가 그간 알고 지낸 정이 있지 않습니까?”
상인이 ‘정’을 찾는 기가 막힌 광경!
“저도 지부장이라는 입장이 있기에, 당장은 한발 물러섰던 것뿐입니다! 우리 사이에 그깟 홍보 전단 배포를 못해 드리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앞서 1할의 지분을 얻은 것으로 상회 내에서 입지가 부쩍 상승한 델몬스였기에 그의 외침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아몬의 표정은 냉랭했고, 델몬스는 아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갈 준비를 마친 채 말했다.
“아몬 선생님, 들어 보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저희 골드로드 상회가 대륙 전역으로 보내는 행상의 수는 백금상단의 무려 두 배에 달합니다.”
아몬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큼 규모는 작죠. 백금상단은 행상 하나하나를 화려하게 하니까요.”
“그, 그건 그렇지만! 홍보 전단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도시, 마을, 산골짜기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알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런 면에서 저희 골드로드 상회는 백금상단보다 훨씬 더 많은 홍보 효과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델몬스는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 홍보 전단을 펄럭펄럭 흔들고 있었다.
“대륙 전역에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부활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몬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군요.”
“그, 그렇죠? 그럼…….”
“하지만 뭔가 아쉽군요.”
“예?”
“이미 킹오브망고의 지분 1할을 드린 것으로 상회가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단 소문이 자자한데, 거기에 또 이렇게 1할을 드리면 골드로드 상회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겠군요.”
“……!”
“백금상단이 이 사실을 알면, 저희 아카데미에 그야말로 엄청난 지원을 약속할 텐데…….”
델몬스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홍보만 해 주는 걸론 수지가 안 맞다 이 말 아니야!’
숨을 크게 몰아쉰 델몬스가 말했다.
“좋습니다.”
“뭐가요.”
“향후 10년 동안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 1할로 인해 골드로드 상회가 창출한 순수익의 2할을 분배해 드리죠.”
그 말에 아몬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 자식이 미쳤구나!’
좋은 의미로 미쳤다는 뜻이다.
‘우리가 농장의 지분 1할을 가지고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농장에서 나온 수익일 뿐이다. 가끔 감사의 표시로 킹오브망고를 보내 주긴 하지만, 그건 딱히 수익이라 할 순 없지. 우리가 다 먹으니까.’
하지만 골드로드 상회가 지분 1할을 가져가고, 그 지분을 통해 얻은 순수익의 2할을 양도한다?
그 액수는 기존에 농장이 직접 분배해 주던 수익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상인이 어떤 놈들인가! 애먼 과일에 금칠을 해 가며 소비자의 돈을 쪽쪽 빨아먹는 괴물들! 그런 놈들이 만들어 낸 순수익은 순박한 농장주가 과일을 팔아 만든 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
골드로드 상회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사실 지분 양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는데.’
일부러 델몬스를 도발하기 위해 던진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이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어차피 지속적인 수입이 목적이었으니 학교장도 적극적으로 동의할 테지.’
한편, 델몬스가 이렇게 초강수를 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앞선 킹오브망고 지분으로 짜릿한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델몬스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농장의 지분 총 2할을 가지고 있다면, 대륙 전체의 킹오브망고 시장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할 지분의 순수익 2할을 양도하더라도 무조건 남는 장사다. 이로써 상회 내부에서 나의 입지도 올라가겠군.’
잘하면 상단의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
그리고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 이것 참. 아유,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머리를 긁적거리던 아몬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거기에 추가로…….”
그때 델몬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실 테지만, 저희 상회가 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백금상단이 아무리 킹오브망고에 목마르다지만, 이 정도의 조건은 제시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제시하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아뇨, 아뇨. 사소한 겁니다.”
“……사소한 거요?”
고개를 끄덕인 아몬이 말했다.
“홍보 전단을 배포해 주시는 동안 여기 상회에 머물 수 없을까요?”
“예? 어, 어째서요?”
아몬이 빙그레 웃었다.
“출장비를 받기로 했거든요!”
델몬스는 단숨에 납득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방을 내어드리죠. 최고의 대접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든든하군요! 초콜릿도 넉넉하게 주십쇼!”
“최고급으로 대령합지요!”
헛기침을 한 델몬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킹오브망고 농장의 지분 양도는 언제부터 진행하실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몬의 썩은 미소가 짙어졌다.
“홍보 전단의 배포만 끝나면 정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오오! 그렇군요!”
“다만, 단 하나. 사소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 무엇 말입니까?”
아몬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카데미의 간부 중 하나가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겁니다. 그러니 상회 차원에서 그분을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델몬스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득이야 우리 전문 아니겠습니까! 마음 푹 놓으십시오. 그런데 간부라면, 누구십니까?”
순간 아몬이 심각한 얼굴로 정색하며 말했다.
“부학교장 브레슬입니다.”
브레슬, 그녀는 킹오브망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홀로 세상과 맞서 싸운다고 해도 망설이지 않으리라.
* * *
아모니스 아카데미.
최초의 통일 황제, 아모니스 대제가 설립한 유서 깊은 교육 기관이다.
지금은 다소 의미가 퇴색됐다지만, 한때는 제국을 비추는 등불이며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자는 없으리라.
그리고 멀쩍이 보이는 아모니스 아카데미를 노려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으니.
“연합에 영광 있으리.”
아모니스 아카데미를 향해 어둠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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