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14)
아카데미가 망했다 114화
누군가는 말했다.
청춘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또한 아픔을 겪고 있는 젊음에게 다가온 따스함은 얼어붙은 마음을 쉬이 녹이기 마련이었다.
옛말에 ‘노예끼리 정 생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늘 밉살맞게 굴던 청년이 보여 준 따스함, 어른스러움, 또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열정!
그것은 아몬을 향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 그렇다고 연심이 꽃피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호감’이었다.
‘그래.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아서 놀랐지만, 절대 연심은 아니야.’
피오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학교장실로 향했다.
“네? 견학을 일주일 연장하고 싶다고요?”
느닷없는 찾아온 피오라의 부탁에 아나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입 교사의 견학 관련 문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견학 기간을 줄여 달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도리어 견학 기간의 연장을 부탁하다니.
“네. 아직 저 혼자 수업에 들어가기엔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좀 더 다른 선배님들을 보고 배우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학교장님.”
그리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피오라를 본 아나르엘의 얼굴에 진한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스스로의 모자람을 통감하며 배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269년을 살아온 하이엘프이며 교육자에게는 언제나 기꺼운 일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학교장님.”
“후후, 피오라 선생님이 의욕적으로 나오니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혹시 무슨 계기라도 있으신 건가요?”
처음 보여 준 망나니짓만큼은 아니더라도 교사 생활에 의욕이라곤 없이 임하던 피오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다니!
아나르엘의 물음에 피오라가 대답했다.
“이대로는 선배님께 후배로서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럽니다.”
“아아! 피오라 선생님께 교사로서의 마음가짐을 깨워 준 분이 계시나 보군요!”
눈을 반짝인 아나르엘이 말했다.
“혹시 그분이 아몬 선생님은 아닌가요?”
“…….”
대답 없이 조용히 웃는 피오라를 본 아나르엘이 귀를 퍼덕이며 기뻐했다.
“맞군요! 역시! 저는 그분을 언제나 믿고 있었다고요!”
“…….”
“후후후, 아몬 선생님을 교사로 채용한 게 제 학교장 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이 틀림없…… 근데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세요?”
심상치 않은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는 피오라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아나르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오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피오라는 미심쩍은 눈빛을 한 채 학교장실을 나섰다.
* * *
점심시간, 식탁에 앉아서 수저를 드는 아몬의 얼굴은 무척이나 후련해 보였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군.’
명문가의 흔한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던 피오라가 사실 정상인이었다니!
게다가 어제 그녀는 후배로서 자신을 받쳐 주겠다 공언했다.
‘든든해. 아주 든든해. 이로써 우리 아카데미의 정상인이 둘으로 늘어났구나. 이 지옥 마굴 같은 곳에서 귀한 동료를 얻으니 그만큼 위안이 되는군.’
흡족한 마음으로 편히 식사를 즐기던 아몬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피오라도 식사를 하려는지 음식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오! 후배야! 여기야, 여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여기 앉을래?”
고개를 끄덕인 피오라가 자리에 앉자 아몬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첫 수업인데, 기분이 어때?”
“그…….”
“아냐, 아냐. 밥 먹는데 체하겠다. 부담스러웠지?”
처음으로 얻은 후배(늘 말했듯 카이는 왠지 그냥 마음에 안 든다)를 위한 배려심을 듬뿍 발휘한 아몬이 얼른 밥이나 먹자는 듯 수저를 들었다.
“일단 밥부터…….”
“저 견학 연장했습니다.”
“먹고 이야기 그게 무슨 소리니?”
잘 나가다가 또 웬 논두렁이란 말인가.
“겨, 견학 연장? 갑자기 왜…….”
“학교장님의 허락은 받았습니다. 지금껏 교사 생활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안일한 마음으로 견학에 들어갔었는데, 아몬 선배님을 돕기 위해서라면 견학부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
맞는 말이다.
‘근데 너무 진지한 거 아닌가?’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을 진중한 피오라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지만, 금세 당황을 감춘 아몬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피오라야.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실전에 임해서 깨닫는 것도 있어. 오히려 미숙하기에 절실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거지.”
아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견학 연장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상대를 긍정해 주면서도 자기 의견을 밀어붙이는 더러운 화법이 또 나왔다!
하지만 아몬은 이번엔 피오라의 의견을 바꿀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야. 견학을 하면서 뭐 배운 게 있어야 써먹지, 여태 배운 것도 없을 텐데 무슨 혼자서 수업이야?’
그렇기에 아몬은 피오라가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다면 짐짓 져 주는 척하며 물러나기로 했다.
그로써 선배의 넓은 마음씨를 보여 줄 수 있을 터!
“네, 선배님.”
“어?”
“그럼 당장 학교장님께 견학 연장을 거둬 달라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혼선이 없으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할 테니까요.”
피오라가 벌떡 일어나자 아몬도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잠깐!”
“네?”
“이, 일단 앉아서 밥부터 먹자. 어차피 네 수업 시간까진 시간 남았잖아.”
“알겠습니다, 선배님.”
피오라가 도로 앉자 그녀를 바라봤다.
“어, 얼른 밥 먹자.”
“네.”
식사로 나온 파이를 오물오물 먹는 피오라를 바라보는 아몬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얘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미쳤나?’
묘한 불안감에 아몬은 괜히 필라프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피오라야?”
“꿀꺽! 네, 선배님.”
얼른 내용물을 삼키고 말을 받아주는 피오라!
아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잠깐. 설마.’
아몬이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볼래?”
“네.”
“……한 바퀴 회전.”
“네, 선배님.”
“이럴 수가…….”
회전까지 한다고?
아몬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커허험! 피오라야, 이 선배님이 커틀릿이 먹고 싶구나.”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에헴! 올 때 물도 좀 떠다오!”
후다닥 멀어지는 피오라를 본 아몬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보나마나 피오라가 내 인품과 넓은 마음씨를 보고 깊은 감명을 얻은 거겠지! 저토록 선배를 공경하는 태도라니……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 필시 나를 보고 본받은 거겠지!’
맞은편 자리에서 반쯤 졸면서 식사를 하던 슬로스가 말했다.
“야, 아몬. 후배 괴롭히지 마.”
“어이구,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
난데없이 찾아온 이명에 귀를 탁탁 치던 아몬이 활짝 웃었다.
‘저토록 충직한 후배라니! 드디어 내 아카데미 생활에 광명이 찾아왔구나!’
* * *
그로부터 사흘이 흐른 후.
아몬은 식당으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뒤로 손을 뻗었다.
“크허험! 피오라야, 손수건 좀 다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피오라가 자연스레 손수건을 손에 올려 줬다.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고맙구나!”
“별 말씀을요.”
아몬은 아예 피오라를 비서처럼 부려 먹고 있었다.
문제는 피오라도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피오라 쪽에서 적극적으로 아몬의 수발을 들어 주고 있었다.
“선배님, 늘 드시던 캐모마일 차입니다.”
“어? 목 안 마른…….”
“캐모마일 차를 마시지 않은지 1시간 하고 16분이 지났습니다. 평소에 캐모마일 차를 드시던 패턴을 감안하면 무려 27분이 초과한 상태로. 심신 작용에 큰 도움을 주는 캐모마일 차를 마시지 않으면 초래할 결과로는…….”
“마실게! 마실게!”
허겁지겁 캐모마일 차를 넘겨받은 아몬이 그것을 꼴깍꼴깍 마시자 피오라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몇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저게 대체 뭔 미친 짓이야.”
충격을 금치 못하는 마리온의 말에 슬로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쟤가 미쳤구나.”
“쯧쯧쯧, 그러게 말이다. 피오라 저 딱한 것. 펜도리안 가문이 저 일을 알게 되면…….”
“아니, 아몬 말이야.”
“어? 그, 그렇지. 아몬도 적잖이 미쳤지.”
카이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떻습니까? 최근에 피오라의 견학 태도가 아주 좋아졌어요. 견학을 하면서 뭐 하나라도 배울 거 없냐는 듯이 열심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행동이 바뀌면 사람이 죽을 때가 온 거라던데.”
슬로스의 투덜거림에 카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아무튼 저는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당분간 잠자코 있어 보죠.”
“좋은 일이 맞긴 한가…….”
마리온은 끝까지 걱정스럽다는 듯 아몬과 피오라를 흘겨봤다.
한편 아몬은 황제와 같은 자태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피오라야, 턱받이는 좀…….”
“아뇨, 선배님. 스튜를 옷에 흘리실 경우 기름기 탓에 빨래에 긴 시간을 할애하셔야 하므로 선배님의 스케줄에 큰 지장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그럼 필라프만 먹을게…….”
“영양이 편중되면 선배님의 컨디션에 큰 지장을…….”
지나친 과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카이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역시 펜도리안 가문이로군.’
펜도리안 가문은 제국 7대 황제부터 황실을 섬겨 온 충신 가문이다.
현 황제가 18대 황제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려 11대를, 수백 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 동안 황실을 모셔 왔다는 말이다.
즉 좋게 말하면 충성이 가문 대대로 몸에 배어 있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대로 정신 나간 것 같은 노예근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대전쟁 시절에 적국의 장군이 펜도리안 가문더러 ‘아모니스 제국의 충성스러운 개새끼’라고 폄하했겠는가!
‘그 정도로 펜도리안 가문의 일원들은 충성하는 대상에게 맹목적인 신뢰감을 보이곤 하지. 피오라 저 아가씨의 경우엔 아몬 선배인 모양이군. 뭐, 펜도리안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황실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니니까.’
카이는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졌다.
‘아몬 선배님을 지지하는 펜도리안 가문의 일원이라……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놀라 까무러치시겠군. 하지만 그게 아몬 선배님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빙그레 웃던 카이가 피오라를 바라봤다.
‘……근데 펜도리안 가문 출신이라는 걸 감안해도 좀 심한 것 같은데?’
* * *
집무실에서 한창 서류를 확인하던 펜도리안 공작 가문의 가주, 로이스가 문득 창문 밖을 바라봤다.
태양 너머로 사랑하는 딸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괜찮겠지. 과몰입하는 그 아이의 나쁜 버릇만 나오지 않으면 말이야.”
이미 나왔다.
* * *
저녁 무렵.
내일 수업에 쓸 자료를 정리하던 아몬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몬 선배님, 학교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응? 학교장님이?”
투덜대며 정복으로 갈아입은 아몬이 밖으로 나가자 피오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험험, 수고가 많구나, 후배야.”
“별말씀을요.”
“전해 줘서 고맙다. 이만 쉬어.”
“아뇨, 제가 학교장실까지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아몬이 해치운 밥그릇 수가 피오라의 수십 배는 될 것이며, 학교장실의 문을 두드린 노크 횟수는 발길질을 포함해 수백 배는 될 텐데 무슨 놈의 안내란 말인가!
‘처음엔 좋았는데 슬슬 부담스럽다.’
이 짓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렇다고 이런 피오라의 호의를 강경하게 거절한다?
‘네…… 선배님, 죄송합니다.’
비에 쫄딱 젖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떨어트리곤 했으니 여린 마음씨를 가진 아몬으로선 무작정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래…… 앞장서거라.”
“네, 선배님.”
위풍당당하게 앞장서 걷는 피오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몬이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사흘째가 되니 슬슬 불안감이 치밀기 시작했다.
‘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몬은 불안감에 쓰려 오는 배를 문지르며 피오라를 따라 학교장실로 향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