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62)
아카데미가 망했다 162화
무어라 말하려던 라스티아넬이 망설이는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기색을 읽은 클로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혹시 말하기 힘든 내용인 거야?”
“그게,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무슨 일이냐면…….”
한숨을 푹 내뱉은 라스티아넬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내일 제 아버지가 여기로 오실 거예요. 내일은 친분이 있는 분만 오는 날이니까요.”
“아버지가?”
“네. 제가 여기로 왔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모처럼이니 저를 만나러 오실 게 분명해요.”
그런데 왜 저렇게 어두운 얼굴인 걸까?
클로에가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으음……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이 조금 문제라서요.”
“상황이 왜? 최근에 딱히 무슨 일도 없었잖아?”
클로에가 기억하기로는, 최근에 라스티아넬의 신변에 이렇다 할 일이 생겼던 적은 없었다.
‘그나마 큰일이라면 대제전인데, 대제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대제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라스티아넬이 마법 대회에서 보리스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혹시 라스티아넬의 집안이 굉장히 대단한 마법사 가문인 걸까? 그래서 보리스한테 졌으니 크게 혼난다거나 그런…….’
여전히 클로에를 비롯한 아이들은 라스티아넬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딱히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클로에의 추측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진실을 뒤로하고 보면, 대단한 마법사 가문이라는 생각을 드래곤으로 바꾸면 ‘드래곤이 인간에게 패배했으니 크게 혼날 거’라는 추측이 되니 말이다.
클로에가 애써 라스티아넬을 위로했다.
“그, 라스티아넬? 사람이라면 한 번쯤 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네?”
“보리스도 엄청 열심히 노력했잖아? 그러니 한 번쯤은 질 수도 있지. 물론 나는 안 졌겠지만.”
“네? 아, 음…… 네.”
왠지 뒤에 이상한 말이 붙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뒤로한 라스티아넬이 ‘보리스’하고 중얼거리더니 쓰게 웃으며 말했다.
“클로에 씨 말대로 질 수도 있죠. 근데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 아니야?”
“네. 뭐, 애초에 진심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 말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둘의 대화에 은근슬쩍 귀를 기울이고 있던 보리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하여간 다른 사람과는 관계없이 제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그래? 흐음.”
“……아니,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겠네요.”
라스티아넬이 의미심장한 어투로 중얼거리자 클로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그래서 딱히 말 못 할 이야기도 아니라면서 말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 불편한 기색을 읽은 모양인지 라스티아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말할게요. 그런데 답답하지 않아요?”
“응? 답답하지.”
“그럼 바람이나 쐴 겸 잠깐 나갈래요?”
“하지만 축하연 때문에 밖에 나가기 좀 그렇지 않아? 우리 숨어 있는 중이잖아.”
“마법으로 잠깐 나가면 되죠, 뭐.”
그렇지 않아도 계속 2층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기에 클로에는 라스티아넬의 제안이 상당히 반가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대화를 엿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 역시 반갑다는 듯 슬금슬금 다가왔다.
“휴, 우리도 같이 가자.”
“이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죽을 뻔했네.”
배고픈 아귀들처럼 다가오는 그들을 본 라스티아넬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둘은 빼고요.”
“……어?”
라스티아넬이 아미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보리스와 레이몬드에게 말했다.
“둘은 여기 남아 계세요.”
“뭐? 아니, 왜?”
“우리도 답답하단 말이야.”
레이몬드와 함께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보리스가 갑자기 은근하게 웃더니 라스티아넬에게 다가갔다.
“에이, 우리가 응? 남도 아니고 대제전에서 같이 뜨거운 승부를 겨룬 사이잖아? 응? 나도 데려가 주라. 이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하단 말이야.”
“…….”
“아, 좀 그러면 레이는 남겨 둬도 돼.”
“이 배신자가……!”
아직은 워프를 쓸 줄 모르는 보리스가 헤실헤실 웃으며 라스티아넬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괜찮지? 나도 데려…….”
그 순간 라스티아넬이 자신의 어깨로 향하는 보리스의 손을 탁 쳐 내더니 지독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
라스티아넬이 냉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몰차게 손을 쳐 내자 보리스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보리스를 흘겨본 라스티아넬이 클로에와 아미의 손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쑥 사라져 버렸다.
워프 마법을 사용해 밖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저택에 남은 보리스는 라스티아넬이 냅다 후려쳐 버린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어어어…….”
대제전에서 활활 불탈 정도로 뜨겁게 승부를 겨루며 라스티아넬과 제법, 아니, 굉장히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보리스였다.
그런데 마치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다니!
‘설마 나만 그렇게 착각했던 거야?’
무릎 꿇은 보리스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 * *
“우물우물.”
“…….”
“냠냠, 꿀꺽! 후루룩!”
“에휴.”
담벼락 아래에 앉은 채 음식을 집어삼키는 브레슬을 흘겨본 아몬이 툭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제 좀 만족했습니까? 나는 아직 배고프다면서 몇 번을 음식을 가지러 가게 하냐고요.”
사실 카이와 함께 처음 음식을 가져왔을 때 다른 일행들은 모두 배부르다며 더 이상 들어갈 공간도 없다고 헐떡였었다.
카이와 아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브레슬의 위장은 그야말로 마법 주머니였다.
덕분에 아몬과 카이는 그 이후로도 다섯 번이나 음식을 가지고 와야 했다.
마지막으로 가져올 땐 새로 고용한 듯한 주방장이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많던 음식이 어디로 간 거야!’라며 절규했지만, 배고플 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는 브레슬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가느다란 몸뚱이에 어떻게 저만큼이나 들어가는지 원…….’
배만 통통하게 튀어나온 브레슬이 아직도 무서운 기세로 음식을 주워 삼키는 걸 흘겨보고 있자니, 브레슬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연에 초대해 놓고 손님을 굶기더니, 이젠 밥 좀 많이 먹는다고 뭐라 하시는 겁니까?”
“……그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이건 너무 많이 먹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쩨쩨하게 먹는 거 가지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아요.”
아닌 게 아니라 접시와 그릇이 아몬의 무릎 높이로 세 개쯤 쌓인 시점이었다.
“그래도 슬슬 인간의 언어가 나오시는 걸 보니 드실 만큼 드신 모양이네요. 아까까지만 해도 눈을 벌겋게 해선 말도 없이 식사만 하시더니.”
“조금 모자라긴 해도, 그럭저럭 허기는 때웠네요.”
“……모자라다고요?”
주방장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선한데 아직도 배가 덜 찼다니.
아몬이 브레슬에 대한 공포로 파르르 떨던 와중이었다.
“……응?”
돌연 뒤편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아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2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영지 바깥으로 나가려는지 마을의 어귀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2층에서 내려오려면 축하연이 열리는 회장을 지나야 할 텐데 쟤들이 어떻게 나온 거지……?”
우물우물 식사를 하던 브레슬이 말했다.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던데, 마법이라도 쓴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멀찍이 보이는 라스티아넬을 발견한 아몬은 이내 납득했다.
라스티아넬이라면 워프 마법을 사용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보다 얼른 따라가 봐야겠네. 밤에 영지 밖을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드래곤인 라스티아넬이 있는 데다, 소드 마스터인 클로에와 아몬의 동생인 아미가 함께였으니 제아무리 험준한 아르마 산맥이더라도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될 리는 없었다.
하지만 교사로서 학생들이 굳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서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몬이 학생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라스티아넬과 클로에를 따라 나온 아미가 툴툴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그 말에 클로에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게다가 나랑 언니만 데리고 나온 이유는 뭔데? 보리스랑 레이몬드는 쏙 빼놓고.”
“음…… 그게 말이죠.”
그제야 라스티아넬은 본론을 꺼낼 준비가 된 모양인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클로에 씨와 아미 씨, 두 분이 보시기엔 제 성별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어?”
“뭐?”
돌연 던져진 라스티아넬의 물음에 클로에와 아미가 벙찐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심각한 고민이거나, 시시콜콜한 고민이 나올 거라 생각했건만, 예상을 아득하게 넘는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잠깐 뇌 정지가 온 것이다.
“성별? 그거야…….”
“음, 그야 라스티아넬은…….”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대답하려던 클로에와 아미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라스티아넬의 성별은 뭐였지?
‘……남자애 아니었나? 보리스랑 레이몬드랑 조금 더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았는…… 아니지, 그건 걔들이 일방적으로 친한 척하던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우리랑도 이야기를 자주 한단 말이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라스티아넬이랑 같이 씻으러 간 적은 한 번도 없네?’
‘아니, 그렇다고 남자애들이랑 같이 씻으러 간다는 걸 본 적도 없는…….’
‘애초에 씻는 걸 못 본 것 같은데?’
순간 ‘라스티아넬은 청결하지 못한 아이구나.’라거나 ‘라스티아넬은 부끄러움이 많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늦은 밤의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라스티아넬의 얼굴은 클로에와 아미조차 순간 당혹감을 느낄 정도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하여간 클로에와 아미는 퍽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모르겠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언니도요?”
“응…… 아니, 그냥 예쁘장하니까 나도 모르게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언니도 그런가 보네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주제에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서로를 바라보던 클로에와 아미가 라스티아넬을 바라봤다.
“근데 그래서, 너 여자애니 남자애니?”
그 물음에 라스티아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는 ‘무성’이었죠.”
“무성? 무성이 뭐지?”
“성별이 없다고요. 성체가 되지 못한 드래곤은 대부분 무성이에요.”
또 라스티아넬의 드래곤 타령이 시작되는구나, 싶은 마음에 클로에와 아미가 안타까움 섞인 시선으로 라스티아넬을 바라봤다.
“하. 하. 하. 그렇구나. 근데 얼마 전까지는 무성이었다니?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아미가 가뿐하게 화제를 넘겨 버리자 라스티아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무성이 아니라 ‘여성’이 됐죠.”
“……어, 음. 그, 그래. 그렇구나. 잘된 일이네.”
“그 이유가 뭐냐면 말이죠…….”
순간 발갛게 볼을 붉힌 라스티아넬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리스 때문이에요.”
“……어?”
갑자기 보리스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