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65)
아카데미가 망했다 165화
이른 아침, 눈을 뜬 아몬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라인벨트에게 속에 쌓인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늘어놓고 나니 조금은 울적하던 기분이 조금은 희석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나이를 먹도록 독수공방하고 있는데, 감히 본좌의 앞에서 배부른 소리를 지껄여?’
‘아니, 그래도 어르신은 장가 한번 가 보셨…….’
‘갈! 가아알!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아니, 대체 왜!?’
별안간 라인벨트가 격노했기에 아닌 밤중에 주먹으로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말았다.
게다가 아르마 산맥의 흉험함으로 몸을 제대로 풀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모니스 아카데미에서 마당이나 쓸던 때와는 달리 주먹이 싱싱하게 살아 있었기에 아몬은 흠씬 두들겨 맞고 말았다.
“아야야…… 갑자기 왜 난리인지 원.”
주먹에 맞아 터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아몬이 옆을 힐끔 바라봤다.
거기에는 라인벨트가 얼굴이 세 배는 족히 부풀어 오른 채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잘 주무시고 계시는군. 그리고 마리온 선배도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마리온은 술병을 끌어안은 채 라인벨트의 옆에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축하연에서 아버지를 열심히 서포트했던 마리온은 어제 하루만 술병을 서른여섯 병을 비웠다고 했다.
공짜 술이니 위장에 구멍이 날 때까지 퍼마신 것이다.
‘이걸로 두고두고 우려먹어야지. 그때 축하연에서 마신 술이 얼만데 고작 이거 하나 못 사 주냐면서.’
잠에서 깨기 위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아몬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은 저택을 완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카데미의 남정네들은 2층의 손님용 방 하나에 구겨 넣듯이 머물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딱 한 명이 비지 않는가.
‘카이, 이 녀석은 어디로 갔어? 어제 보리스한테 귀족의 예의를 가르쳐 두라고 말하긴 했는데…….’
하지만 자러 가기 직전 카이가 보리스를 굴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적당히 하고 들어오라고 일러두지 않았던가.
설마 하는 마음에 카이와 보리스가 있을 방으로 허겁지겁 들어간 아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지금 뭐 하고 있냐?”
“아, 선배님.”
아몬이 나타나자 반갑다는 듯 돌아본 카이는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육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그래?”
“예. 마지막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신적 수양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죠.”
보리스는 자리에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신적 수양법……?”
“제국이 권장하는 귀족의 수양록 7권의 211페이지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게 적혀 있다고?
아몬도 귀족의 수양록이라는 게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시골 깡촌 귀족인 아몬은 그런 걸 읽어 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몸에 밴 귀족의 소양이라 봐야 부모님에게 알음알음 익힌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여태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지. 그나저나 그딴 수양록이 7권이나 존재한다고……?’
혹시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7권이 전부일 거야.
“허어, 카이야. 그런데 그거 몇 권까지 나왔더라?”
“최신 권이 19권인가 그럴 겁니다.”
“…….”
“제 숙소에 있는데, 돌아가면 빌려 드릴까요?”
“아니, 마음만 받겠다.”
“하지만 읽어 보시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허겁지겁 화제를 돌린 아몬이 보리스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애초에 소심했던 보리스는 아주 산만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걸맞게 놀기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도 닦는 수양자인가?’
눈을 반개한 채 내리깔고, 호흡도 일정한 것이 어제까지 보던 보리스가 아닌 것 같았다.
묘한 위화감과 불안감에 슬그머니 손을 뻗은 아몬이 보리스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 보리스? 괜찮니?”
“…….”
“보리스? 선생님이 왔단다?”
“…….”
몇 번이고 불러봐도 보리스는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고른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런 보리스를 두렵다는 듯 바라보던 아몬이 카이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숨 쉬는 걸 보니 죽은 것 같진 않은데…… 너, 너 보리스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예? 별것 안 했습니다. 제국이 권장하는 귀족의 수양록 17권을 외울 때까지 귀에 대고 읊어 준 것뿐입니다.”
“뭐…….”
아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세뇌시켰다는 거잖아.’
이럴 줄 알았다면 카이에게 맡기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조금 훤칠하고 헌앙한 귀족적인 사나이로 만들어달라는 마음에서 했던 부탁인데, 사람을 무슨 도 닦는 도인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아몬이 허겁지겁 보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보리스! 보리스야, 정신 좀 차려 보렴.”
“…….”
“얘, 정신이 드니? 왜 눈을 바로 뜨지 못하고 허공만 보느냐.”
그 순간이었다.
스르르-
정중하게 아몬의 손을 밀어낸 보리스가 너무나도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급문생이 아몬 선생님께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급문, 뭐……?”
“옛 선인께서 말씀하시길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하셨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지저귐은 군자와 어울리지 않지요. 또한 시방은 뭇 세상이 고요히 잠든 새벽녘이 아닌지요.”
“…….”
“하여, 정숙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선생님의 위명에 큰 누가 될까 심히 우려되옵니다.”
무릎 꿇은 채로 마치 절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보리스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아몬이 뻑뻑한 경추를 억지로 돌려 카이를 바라봤다.
카이는 너무나도 흡족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하아아…… 참으로 타의 모범이 되는 귀족적인 모습이구나.”
“…….”
“암, 저것이 올바른 귀족의 귀감이지요. 암, 그렇고말고요.”
우뚝 굳은 채 카이를 빤히 바라보던 아몬이 입을 열었다.
“카이야.”
“예?”
“근데 넌 왜 저렇게 안 하냐.”
카이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했다.
“저렇게까지 일일이 하는 건 귀찮잖아요?”
“…….”
“적당히 실례에 맞게 추려서 쓰는 거죠, 뭐.”
“…….”
“일단은 몽땅 주입시켜 놨으니, 나중에 차차 본인이 상황에 맞게 쓰겠죠. 그것 또한 귀족의 예법입니다.”
당연한 말이긴 한데, 진짜로 저게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빡치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조금 과하긴 하지만, 상대가 드래곤이니 저 정도로 고풍스러운 모습도 나쁠 건 없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뭘. 아무튼 보리스의 정신 무장도 마쳤으니…….”
창문 밖, 산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허리춤의 아다만티움 검을 쓰다듬은 아몬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드래곤을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전 무성, 현 딸인 라스티아넬을 홀린 보리스와 드래곤이 마주할 시간이었다.
* * *
“오오, 라스티아넬. 이게 얼마 만이냐.”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그래, 그래. 응? 근데 못 본 사이에 여성형이 되었구나?”
라스티아넬은 아버지, 저스티시엘의 지적에 얼굴을 붉힌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네, 사실 저기 있는 보리스라는 아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거든요.”
“호오, 그래?”
저스티시엘은 라스티아넬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보리스를 바라봤다.
그는 도를 닦는 도인처럼 바른 자세로 선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아이들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그 좋아하는 초콜릿 좀 먹어 보라며 연신 호들갑을 떨어 댔지만 지금의 보리스는 도인 그 자체였다.
“허허, 그 음식은 몸에 탁기를 쌓고 수양에 방해가 됩니다.”
“보리스! 대체 무슨…….”
“여러분께서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시어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얘 왜 이래? 무서워!”
그런 보리스의 모습에 라스티아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쟤 갑자기 왜 저러지? 어제 뭘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갑자기 왜 사람이 바뀌어서…….’
불안감에 라스티아넬이 발만 동동 구르는 와중, 저스티시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인간 아이였구나?”
“……네, 아버지.”
“흐음. 네 성별이 인간에 의해 결정되다니…….”
다소 탐탁지 않다는 듯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버지를 본 라스티아넬이 마치 변명하는 것처럼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아버지, 보리스는 굉장해요. 인간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대단한 마법적 발견을 했고, 질서의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라고요.”
“……흐음, 그래?”
“네. 그러니까 너무 탓하지 말아 주세요.”
걱정이 듬뿍 묻어 있는 라스티아넬의 목소리에 저스티시엘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말했다.
“응? 탓하다니?”
“……네? 어, 탓하시지 않을 건가요?”
“탓하다니? 왜 탓해. 지금이 무슨 신성 시대도 아니고, 드래곤이 인간에게 반해서 성별이 결정되는 것도 심심치 않으니 탓할 생각은 없어.”
“에……?”
눈을 깜빡거린 라스티아넬이 당황한 듯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계세요?”
“저 아이가 용사라며? 질서의 여신, 바누민트한테 선택받은 용사.”
“네. 맞아요.”
“그러니 심각할 수밖에.”
알쏭달쏭한 저스티시엘의 말에 라스티아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심각한 건가요?”
“아, 그게 말이지…….”
저스티시엘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저스티시엘, 그쯤 해 두지.”
“아, 카셀라그 어르신.”
저스티시엘과 함께 드레이크 영지로 찾아온 카셀라그가 라스티아넬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라스티아넬.”
“아, 네. 파천광룡 어르신.”
파천광룡, 그 단어에 카셀라그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허험! 그 이름은 잊으려무나.”
“네……?”
“에잉, 그게 몇천 년도 전의 별명인데 아직도 그 이름을 가지고…….”
투덜거리던 카셀라그가 아무튼, 하고 운을 떼며 말했다.
“그보다 용사 운운한 이야기는 지금은 잊으려무나. 조만간 때가 오면 말해 줄 터이니.”
“아……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인 카셀라그가 저스티시엘을 끌고 가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며 타박하는 건 덤이었다.
그 광경에 라스티아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하지만 천하의 ‘파천광룡’ 어르신께서 지금은 잊으라 하셨으니 라스티아넬은 일단은 그 의문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라스티아넬이 고개를 돌렸다.
보리스는 다른 아이들이 필사적으로 입으로 밀어 넣어 주려는 초콜릿을 역정을 내며 뿌리치고 있었다.
“에잇! 참으로 끈질기시군요, 여러분! 이런 사치품은 귀족의 모범이 돼야 할 제게는 맞지 않는단 말입니다!”
“뭐래! 너 평민이잖아!”
“……커헉!”
들이밀어진 현실에 보리스가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거렸다.
그 주접을 본 라스티아넬이 재차 의문을 품었다.
‘쟤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스티아넬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도 자신이 보리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마음이 놓인 것이다.
덤으로 보리스가 간밤에 무슨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됐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덤이었다.
* * *
카셀라그, 저스티시엘.
두 드래곤의 앞에 앉아 있는 아몬 일행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마왕이 부활한다고요?”
저스티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쪽에서 기운이 느껴지더군.”
“저쪽이라면…… 침묵의 정원 말입니까?”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이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봤다.
곧이어 그들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모였다.
거기에는 민트를 듬뿍 넣어 만든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퍼먹고 있는 조아민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린 조아민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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