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86)
아카데미가 망했다 186화
황제는 초췌한 몰골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본래라면 황제가 와병 중이라는 것은 국가의 위기로 치부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으나, 최근에 황제가 앓아눕는 일이 워낙 허다했기에 주변인들은 다소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그런 황제의 머리맡에 누워 있던 황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드리오, 또 누워 있군요.”
“끄으윽…… 부, 부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이번에도 드레이크 가문의 청년과 무슨 일이 있었겠죠.”
“…….”
이제 척하면 척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아몬도 아몬이었지만,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들이닥쳤기에 앓아누운 것이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황후, 빅토리아가 황제의 머리맡에 앉은 채 사과를 깎았다.
황제의 스승이자 대륙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그녀는 과도조차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사과를 서걱서걱 깎고 있었다.
“음, 올해 사과가 맛이 좋네요. 북쪽 지방의 서리 맞은 사과라던데, 맛이 달고 진하네요. 산드리오도 어서 먹어 봐요.”
“부인, 지금 내가 사과 따위를 먹고 있을 처지가…….”
“어서 먹기나 해요.”
입이 열린 것을 틈타 사과를 몇 조각이나 입에 쑤셔 넣는 황후의 행동에 황제는 야속함을 느꼈다.
‘분명 지난번에 내가 앓아누웠을 때는 직접 출병해서 군터 군도 연합을 박살 냈던 부인이 이번에는 이토록 냉정하다니…… 이는 필시 사랑이 식었기 때문인 게야…….’
사랑이 식었구나 싶은 마음에 황제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황제의 구슬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올해는 사과가 맛있다면서 몇 개고 깎아 먹던 황후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이혼은 절대 안 돼!”
“뭐라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아닌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 황후가 웬 봉투를 하나 꺼냈다.
“카이야스가 당신에게 보낸 서신이에요.”
“억! 카, 카이야스 그놈이 드디어 날 죽이려고…….”
“그러니까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실 황제는 아직 그녀에게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그가 드레이크 가문의 비화를 멋대로 다뤘다가 처벌받을 뻔했다는 소식을 전혀 전하지 않았다.
자식을 역모죄로 처벌하겠다는 말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일단 카이야스를 처벌한 이후, 황후가 뒤늦게 그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꺼내면 ‘나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었던 처사’라며 눈물 젖은 감성을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5황녀를 아몬과 혼인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일치단결한 지금 시점에서는 황태자를 처벌하겠다는 마음도 접은 상태였으나, 그래도 자신을 병상에 눕게 만든 두 번째 요소인 황태자가 보낸 서신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으, 으음…… 아무것도 아니오. 그나저나 황태자가 보낸 서신?”
애써 헛기침으로 침착을 가장한 황제가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열어 봤다.
[마왕 조나난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의 보고]마왕 조나난!
그 이름이 나오자 황제의 입에서 다시 부글부글 거품이 끓기 시작했다.
“거르르륵…….”
자신을 병상에 눕게 만든 가장 큰 결정타!
아몬이 잔 펀치를 날리고, 황태자가 혼사 건으로 자신의 정신을 흩뜨리고, 마왕 조나난의 침략이 고작 1년 남았다는 소식으로 결국 자신을 침몰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병상에 누운 지 이제 두어 시간쯤 됐는데 ‘마왕 조나난’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접하자 황제의 상세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세상에, 산드리오 당신 아까부터 대체 왜 그래요?”
“마왕, 조난, 존나, 조나난이…….”
“조나난? 지난번에 말했던 마왕 말인가요?”
편지를 힐끔 훔쳐본 황후가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휴, 하여간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유약하네요. 젊을 때도 조금만 힘들면 금세 죽는소리, 우는소리를 하더니.”
황제의 검술 스승이었던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깎은 사과를 날름날름 주워 먹던 그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어서 읽어 봐요. 마왕 조나난에 대비하기 위한 이야기니까요. 당신이 읽지 않으면 누가 읽겠어요.”
“그, 그래. 알겠소.”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황제가 서둘러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마왕 조나난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의 보고] [현재 다크엘프 종족 최대 규모의 부족, 블랙탄 부족의 동맹이 체결됐습니다. 또한 보그 산맥의 오거 부족 역시 피드 후작 가문의 주도하에 성공적으로 제국과의 연합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소자가 지니고 있는 외교 권한으로서는 ‘왕권’을 지닌 정규 국가와의 동맹 협상이 불가능한 시점입니다.]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셔서 결단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드리옵니다.] [황태자 카이야스 아모니스 올림]결과와 용건만 간략하게 적혀 있는 황태자의 서신에 황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잠깐 누워 있는 사이에 일이 이만큼 진행됐다고……?’
물론 오거 부족과의 연합은 이미 성공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다크엘프 종족과는 협상 테이블까지 앉히는 것조차 힘들 것이라 예상했건만…… 다크엘프 종족과도 이미 동맹이 체결된 상황이라고?’
사실 이 같은 성과는 황제도, 정작 아몬에게 일을 맡긴 황태자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브레슬이 실질적인 다크엘프 종족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세상천지 누가 알았겠는가!
때문에 막상 연락을 받은 황태자도 크게 당황했으나, 굳이 그 사실을 황제와의 서신에 적을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카이야스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군. 고작 몇 시간, 내가 끙끙 앓는 동안에 이렇게 일을 해결해 버리다니…….’
만약 황제였다면 다크엘프 종족에게 보내는 사절단을 꾸리는데 며칠을 소모하고, 협상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연회에 하루, 협상이 체결된 이후 축하연에 이틀은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라면 허례허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가.’
황제가 황후를 힐끔 바라봤다.
‘역시 카이야스 그 녀석이 빅토리아를 많이 닮긴 했지.’
군터 군도 연합과 전쟁이 터지자마자 시녀단을 이끌고 출병해 어머니 크라켄을 썰어 버렸던 빅토리아의 행동력!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나직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기에 카이야스 그 녀석이 드레이크 가문과의 화해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과거,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망령에 사로잡혀 아직까지 드레이크 가문에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부인.”
“네?”
“우리가 자식 하나는 잘 키운 것 같소.”
황제의 말에 빅토리아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누구와 누구의 자식인데요.”
“허허허…… 그렇지.”
푸근하게 웃은 황제가 말했다.
“시종장, 밖에 있는가?”
“예, 폐하. 하명하시지요.”
“질 좋은 양피지와 깃펜을 가져다주게.”
잠시 후, 황제는 작성을 마친 서신 위에 품속에서 꺼낸 국새를 찍었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신.
그것을 시종장에게 넘겨준 황제가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이것을 황태자에게 전해 주게나.”
* * *
“폐하께서 서신을?”
“예, 황태자 전하.”
서신을 받은 황태자, 카이는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직접 내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서신을 보내셨다라…….’
설마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으신 걸까?
자신은 그를 염려해 굳이 다크엘프, 오거와의 동맹 체결을 서신으로 보고하긴 했다만……
‘……나와 대면으로 말씀하시는 것조차 불쾌할 정도신가 보군.’
고작 두 개 종족과의 연합으로는 분이 풀리시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크엘프 종족과의 연합은 상당한 쾌거라고 생각했건만, 그걸론 모자라다고 생각하시는 걸지도. 하기야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거린 카이가 편지를 열었다.
그리고 떡하니 찍혀 있는 황제의 날인을 목격한 카이가 흠칫했다.
‘……이, 이게 뭐야?’
평소에 흔히 사용할 수 있는 간소화된 날인이 아니라 ‘국새’로 찍은 날인이었다.
황실의 일원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황제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국의 군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상징.
굳은 얼굴로 서신을 읽어 본 카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일시적으로 폐하께서 내게 모든 외교적, 인사의 권한을 일임하신다고……?’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 조치의 의미는 컸다.
‘아니, 보통 큰 게 아니야. 이 조치는…… 너무나도 크다.’
황태자인 자신을 향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는 의미였다.
한번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던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동시에 ‘다음 대 황제‘로서의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로써 내가 이번에 보이는 행보 하나하나가 내 차기 황제로서의 평가로 이어질 것이다.’
즉 이것이 ‘실질적인 다음 대 황제의 첫 번째 임무’가 될 것이다.
꾸욱-!
주먹을 불끈 움켜쥔 카이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천천히 서신을 가슴에 품은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니, 아버지.’
활짝 미소 지은 카이야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첫 번째로 엘프 왕국과의 동맹을 체결한다.’
이미 아나르엘 본인이 마왕 조나난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고, 현 엘프 왕국의 국왕인 아르에논 역시 그럴 의향이 다분하니 그들과의 동맹은 이미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외교적인 권한이 없었기에 정규 국가인 엘프 왕국과의 동맹을 마무리 할 수 없었으나, 권한을 모두 위임받은 지금이라면 후다닥 달려가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상황이다.
‘그다음으로는, 대륙의 수많은 국가들을 마왕 조나난의 타도라는 목적 아래 결집시키는 것.’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드래곤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도와줄 테지만 막상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비책이 필요하다.’
스르르 고개를 돌린 카이가 어딘가를 바라봤다.
아모니스 아카데미가 있는 방향이었다.
* * *
“끼에에엑! 그만! 그만!”
“움마! 움움마! 우우우우움!”
브레슬의 징벌 겸 감사의 의미로 연신 발등에 입을 맞춰 주고 있던 아몬이 돌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지? 갑자기 웬 오한이?’
그가 고개를 돌렸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