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187)
아카데미가 망했다 187화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아몬은 올해는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태껏 자신이 재수가 있었던 적이 있기나 한 걸까?
‘이게 뭐야.’
아몬은 자신에게 도착한 한 통의 서신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서신에는 ‘제국의 국새로 찍은 날인’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냥 황실의 문양도 아니고, 간소화된 직인도 아니고, 국새로 찍은 날인?’
이런 날인은 보통 명령이나 권고를 내릴 때 흔히 사용한다.
그리고 국새로 찍은 날인이 있다는 것은 ‘칙명’이라는 의미였다.
거역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기둥은 주춧돌과 함께 내려앉을 칙명!
한 국가의 왕이 셉터(왕권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흔들며 눈앞에서 깝치는 것보다 훨씬 무섭다는 평가를 받는 국새로 날인을 찍은 서신!
‘아까 황실에서 보낸 전령이 왔을 땐 뭔가 싶었는데, 국새로 날인을 찍은 서신을 주고 가다니…….’
가장 먼저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다크엘프 종족과의 동맹이 엎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래, 브레슬 부학교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황궁에 찾아가서 식량을 몽땅 축냈다거나, 식당의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먹어 치웠다거나…….’
실제로도 브레슬은 블랙탄 부족의 족장으로서 제국과의 동맹을 위해 수도로 떠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자신에게 도착한 서신이었으니, 가장 먼저 브레슬의 만행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브레슬을 진작 죽이지 않은 게 후회되는군. 발등에 입을 맞출 때 기회를 봐서 목을 꺾어 죽였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후회로 치를 떨던 아몬이 결국 조심스럽게 서신을 펼쳐 봤다.
그런데 적혀 있는 내용이 뜻밖이었다.
‘……뭐야, 이거? 황제가 아니라 카이가 보낸 서신인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서신에 찍혀 있는 날인은 국새로 찍은 것이다.
용을 형상화환 인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황실의 문양.
그렇다고 사칭도 아닐 것이, 어금니 꽉 깨물고 반역과 역모를 꾸미지 않고서야 제국의 국새를 위조하는 간 큰 놈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국새를 위조한 사칭이라면 황제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냈겠지. 그 말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정말로 카이라는 건데…….’
그런데 어째서 황태자에 불과한 녀석이 황제의 권위 그 자체인 국새를 사용한 편지를 보낸 것일까?
“설마 이 자식이 황제가 시름시름 앓는 걸 틈타서 ‘황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를 저지른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몬은 금세 그 상상을 지웠다.
아무리 카이에 대한 신용이 바닥을 치더라도 그 정도로 막 나가는 녀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어떻게 국새를 사용한 건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고…… 지금은 먼저 편지를 읽어 보자.’
심호흡을 한 아몬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지를 읽는 아몬의 얼굴이 점점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첫 문단은 다크엘프 종족과의 성공적인 교섭을 칭찬하는 내용이었기에 아몬도 고래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기뻐했으나, 두 번째 문단부터가 문제였다.
‘내가 다른 국가들과의 동맹 협상에 동행하라고? 어째서?’
자신이 다크엘프 종족과의 동맹 교섭에 성공한 것은 브레슬이 블랙탄 부족의 종족이었고, 같은 아카데미의 동료라는 친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우정을 증명하는 대가로 발등에 애정이 넘치는 입맞춤을 해야 했지만, 그건 돈을 받았…… 사소한 문제니 넘어가도록 하고.’
아무튼 아몬이 다크엘프 종족을 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운빨’ 덕분이었다.
“근데 무슨 다른 국가들과의 동맹 협상에 동행하라는 거야? 내가 다른 국가에 무슨 인맥이라도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설마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던 서신에 이름을 잘못 적었나 싶어 유심히 편지를 살펴봤지만, 거기에 적혀 있는 ‘아몬 드레이크에게’라는 글자는 도무지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불에 쬐면 달라질까 싶어 촛불에도 들이밀어 봤지만, 국새로 찍은 서신을 태워 먹기만 할 뻔했다.
‘젠장, 이거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은데…… 하지만 칙명이라서 뭐라고 항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떡하지?’
연신 고민을 거듭하던 아몬이 돌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서신을 대충 툭 던져 버린 아몬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날 죽여라.’
* * *
이튿날, 자포자기한 아몬은 황궁으로 출두했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황궁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은 아몬을 별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아몬은 곧 카이를 만날 수 있었다.
“왔는가, 아몬 드레이크.”
이번에도 ‘황태자’의 신분으로 아몬을 대하려는 것인지, 카이는 근엄한 얼굴로 아몬을 맞이했다.
아몬은 그런 카이에게 몸을 낮추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몬 드레이크, 황태자 전하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습니다. 하명해 주십시오.”
아몬의 반응에 카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오랜 세월 황실을 모셔 온 가신 같은 반응이 아닌가.
‘이럴 수가…… 아몬 선배라면 분명히 나를 보자마자 눈을 뒤집고 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침착하시다니?’
카이는 예상치 못한 아몬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했다.
“흠! 흠흠, 그래.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신으로 전달했듯 타국과의 외교에 자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카이는 이쯤 하면 아몬이 ‘아니, 내가 무슨 외교를!’이라면서 삿대질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몬은 한층 더 몸을 낮추며 정중하게 말했다.
“예이, 황태자 전하. 막중한 임무이나 분골쇄신하여 주어진 사명에 모자람이 없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어라?’
카이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몬 선배님이 아닌가? 똑같이 생긴 대역인가?’
하지만 허리춤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회중시계를 보니 아몬 본인이 분명했다.
애써 당황을 감춘 카이가 한층 더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
“크흐흠! 그래, 주어진 임무에 혹여 궁금한 점은 없는가?”
“전하께서 내리신 임무에 소인이 어찌 감히 의문을 품겠습니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당장 목적지로 출발하겠나이다.”
“…….”
카이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공손하지만 너무나도 사무적인 아몬의 행동에 상당한 거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단둘이 독대하는 자리니 조금은 편하게 대해 주셔도 되는데.’
약간의 섭섭함을 느낀 카이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나저나 아몬 선배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몬이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납죽 엎드렸다.
“아이고! 전하, 부디 말씀 낮춰 주십시오! 어찌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미천한 쇤네를 선배님이라 칭하십니까!”
금세라도 정수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는 아몬을 본 카이는 아찔함을 느꼈다.
얼른 몸을 일으킨 카이가 아몬을 붙들었다.
“아니,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지금은 둘밖에 없는 자리니 편하게 대해 주셔도 돼요.”
“아닙니닥! 어찌 변경백의 차남에 불과한 비천한 쇤네가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깍! 부디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아예 굽실거리며 오들오들 떠는 아몬의 모습에 카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시위하시는 거구나.’
아예 확실하게 제국의 일개 가신으로 대하든, 아카데미의 선배로 대하든 태도를 확실히 밝히라는 의미이리라.
‘관계가 이렇게 정립되어 버리면, 드레이크 가문과의 악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악연을 내 대에서 끊기로 결심했다.’
카이가 심호흡을 했다.
차마 용안을 뵙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옹송그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아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가 말했다.
“아몬 선배님.”
“아이고오오! 황태자 전하! 황송하오나 쇤네는 황태자 전하께 선배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요! 부디 쇤네를 천한 개밥버러지라고 불러 주시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오들오들 떨던 아몬의 떨림이 뚝 멎었다.
그것을 본 카이가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오버를 좀 했습니다. 일전에 남들 앞이라고 황태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야겠다 싶어서 선배님에게 조금 딱딱하게 굴었습니다.”
“아이고오…….”
“오늘도 선배님께 국새를 쓴 서신을 보낸 참이었고, 워낙 중요한 일이었기에 다소 딱딱하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만큼 임무에 진지하게 임해 주십사하는 후배의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아이고……?”
“선배님, 우리들은 아모니스 아카데미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선후배 사이가 아닙니까. 그러니 부디 전처럼 저를 편히 대해 주십시오. 선배님께서 계속 그렇게 행동하시니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카이가 고개를 작게 숙였다.
“부탁입니다, 선배님. 그러니 부디 예전처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숙인 카이의 뒤통수에 아몬의 손바닥이 작렬했다.
“크아아악!”
고꾸라져 탁자에 얼굴을 처박은 카이가 코를 움켜쥐고 아몬을 올려다봤다.
“케흑! 스, 슨배임! 급즈기 왜 때리능…….”
아몬이 팔짱을 턱 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 중 하나만 해라 좀.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흐지만 저도 황태자로서의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너 황태자 아니래? 후배도 아니고, 황태자도 아니고 자꾸 헷갈리게 행동하면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겠냐?”
아몬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냥 적당히 불러서 말하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 왜 자꾸 황태자네 뭐네 하면서 권위를 휘둘러? 황태자라고 안 하면 내가 후배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면서 배 째라면서 드러누울까 봐?”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아몬은 침묵했다.
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열 번 중에 몇 번은 그럴 것 같았다.
“커허허험! 카이야, 이 선배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
“하여간 사람들 많은 곳에서야 나도 알아서 처신하겠는데, 둘만 있는 자리에서까지 네가 황태자를 들먹이면 나도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 자리에 따라서 적당히 구분을 짓자고.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한지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카이를 힐끔 바라본 아몬이 말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하필 나를 동맹 협상이라는 임무에 투입하는 거냐? 내가 다른 왕국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사절단에 끼더라도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아몬의 물음에 카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야 뭐, 선배님이 말솜씨가 좋지 않습니까? 가끔 보면 라인벨트 어르신도 구워삶으시던데요? 그러니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셔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거랑 외교랑 다르지 않냐?”
“글쎄요…… 저는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외교라는 것도 고급스러운 말장난에 불과하니까요.”
“흠…….”
아몬이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카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에 걸맞은 보수는 지불할 겁니다.”
“사실 나는 사절단 임무를 꼭 한번 수행해 보고 싶었어.”
비로소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몬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절단이라지만, 권한은 어디까지 줄 거야? 전권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권한을 줘야 외교를 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황제 폐하가 나한테 외교권을 주진 않을 것 같은데.”
그 의문에 카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마왕 조나난의 대응에 한해서는 제가 제국의 모든 외교권과 인사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뭐? 정말로?”
카이가 국새로 날인이 새겨진 황제의 서신을 팔락팔락 흔들었다.
“진짜네…….”
“하여간 사절에게는 제게 준하는 외교권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현장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래서 신뢰하는 아몬 선배님께 사절단의 책임자 역할을 맡기고 싶은 거고요.”
자신에게 신뢰감을 보여 주는 카이를 본 아몬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카이야! 나만 믿어다오!”
* * *
“컥!”
아몬이 사절단으로 간 아메라 왕국에서 전쟁을 선포했다는 급보를 본 카이가 피를 토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