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21)
아카데미가 망했다 21화
마을 사람들은 한바탕 망가진 감자밭을 수습하는 중이고, 아버지는 오랜 지인인 카셀라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또한 아몬도 아나르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오셔서 아버지와 마법에 대해 토론도 하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곤 하죠. 저도 어릴 때부터 자주 뵌 동네 할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아나르엘이 대답했다.
“그런데 드래곤이시죠.”
“그렇긴 하죠.”
아몬의 태연한 대답에 아나르엘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드래곤이란 무엇인가?
중간계의 지배자, 수호자, 그 이외로도 갖가지 거창한 수식어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 아니던가!
“게다가 그분은…… 블랙 드래곤 아니신가요?”
“제가 알기론 맞습니다.”
“세상에…….”
엘프에게 드래곤이라는 단어는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 숲을 사랑하는 그린 드래곤은 낫지만, 블랙 드래곤은 파괴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흉포한 존재!
그렇기에 카셀라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것이다.
“어, 어떻게 그런 분과 알고 지내게 된 거죠?”
“글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던 분이라…….”
그 말에 아나르엘은 혹시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아몬은 스스로를 상식인이라 포장하곤 하지만, 가끔씩 특정 부분에선 상식을 거스르곤 했었다.
“혹시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잘 모르시나요? 자칫 심기를 건드렸다간 엄청난 화를 입게 될 텐데요?”
그 물음에 아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굴 바보로 압니까? 드래곤이 위험한 존재라는 걸 누가 몰라요?”
“그,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모든 드래곤이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네?”
“그 뭐냐, 카셀라그 어르신 말로는 자기는 늙고 병든 드래곤이라 바깥 활동도 거의 안 하신대요. 아는 드래곤도 없고, 적적해서 가끔 우리 영지로 와서 어울리는 게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하셨어요. 외로운 어르신이시죠.”
늙고 병들고 외로워, 홀로 방바닥만 궁상스레 긁고 있는 카셀라그를 상상하는 모양인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쯧쯧 차는 아몬!
그 모습을 본 아나르엘은 생각했다.
‘늙고 병든 드래곤?’
드래곤은 워낙 초월적인 존재라 세월이 흐를수록 강해질 뿐이다. 차라리 늙는다는 말보단, 숙성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았다.
에인션트 드래곤, 고대룡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사람, 어릴 때 드래곤이 대충 둘러댄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거구나.’
드래곤을 무리에서 쫓겨난 늙은 들개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때문에 아나르엘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군요!”
“네, 그런 겁니다.”
다행히 카셀라그에 대한 해명도 끝났겠다, 아몬은 본론을 꺼냈다.
“그럼 학교장님, 지금 우리 영지 상황은 대충 아시겠죠?”
“……네, 물론이죠.”
카셀라그의 출현으로 도중에 물러가긴 했지만, 엘더 드레이크의 습격으로 영지의 감자밭이 절반은 날아간 상황!
“영지 상황도 어수선하고 해서 현장 학습은 더 이상 무리일 것 같습니다.”
원래 계획은 아르마 산맥을 둘러보며 몬스터에 대해 탐구하고 영지의 관리 등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카데미로 돌아가 달라는 말이군요.”
“예,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니 저라도 도와야죠. 제 개인적인 사정이니 휴가로 처리해 주세요.”
아나르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조용히 아나르엘을 바라보던 아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기다렸다는 것 같은 반응이군요.”
“……네? 그럴 리가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귀를 갸웃거린 아나르엘이 말했다.
“돌아가라면서요? 그래서 간다는데,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제가 학교장님을 한동안 보면서 느낀 건데, 학교장님 성격이면, 꾸역꾸역 찾아왔으니까 보나마나 안 간다! 남아서 돕겠다!라고 하실 텐데, 이렇게 칼 같이 돌아가시겠다니…….”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부쩍 의심이 늘어난 아몬!
“……드래곤이 무서우시군요.”
아몬의 날카로운 추리에 아나르엘의 귀가 흠칫 떨렸다.
“……아뇨? 친한 어르신이라면서요? 아몬과 친한 어르신이라면, 제게도 마찬가지.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학교장님은 남아 주시죠.”
“……제가 왜요?”
“엘프에게는 농작물의 풍작을 돕는 고유 마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나르엘의 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걸 어떻게…….”
아몬이 편지를 꺼냈다.
“킹오브망고 농장주가 편지에 적어 보냈더군요. 쉬는 날에 가셔서 마법을 걸어 주셨다면서요?”
“……비,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분개하며 이를 갈던 아나르엘이 귀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하, 하지만 그 마법의 효과는 미미해요! 말이 고유 마법이지, 사실 엘프 마을의 전통춤 같은 거라…….”
“감자밭 절반이 날아간 상황이라, 작은 도움이라도 절실합니다.”
“…….”
“부탁드립니다.”
진지한 아몬의 말에 아나르엘이 결국 귀를 축 떨어트렸다.
“고백하자면, 당신 말이 맞아요.”
“뭐가요?”
“드, 드래곤님이 무서워요. 듣기론 한번 오시면 며칠은 머무신다면서요?”
“그렇죠.”
“그 며칠 동안 여기에 머물게 되면, 저는 공포로 미치고 말거예요. 봐요. 지금도 손발이 떨린다고요.”
하긴, 카셀라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공포로 졸도해 버린 그녀였다.
“그러니까 돌아가게 해 주세요.”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
그 절실함을 곱씹던 아몬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칼 같은 대답에 아나르엘이 절규했다.
“왜! 어째서죠!”
“멋대로 아카데미 사람들 싹 다 끌고 올 땐 언제고, 형편 안 좋아지니 바로 도망치시려고요?”
“그, 그건……!”
“어림도 없습니다, 학교장님.”
맞는 말이지만, 아나르엘에게는 불합리한 처사로만 느껴졌다.
“흥! 가지 말라면 못 갈 줄 알아요!?”
그녀가 워프 마법을 준비하며 외쳤다.
“나를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라! 워……!”
아몬이 뒤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니, 카셀라그 어르신 오셨습니까!”
안 왔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 드래곤이 있다는 말에 극심한 공포를 느낀 아나르엘은 캐스팅하던 워프 마법을 실패하고 말았다.
“끼에아아악!”
마나가 흩어지는 충격에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벌렁 넘어가는 아나르엘!
쓰러져 기절하는 그녀를 본 아몬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X됐다.”
* * *
아몬의 방.
앓아누운 아나르엘이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기에, 아몬은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를 아나르엘에게 내줬다.
그리고 아몬은 침대에 누운 아나르엘 앞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즈승흡느드.”
“……흥!”
“증믈 즈승흡느드. 그렇게까지 놀라실 줄은…….”
“흥!”
아나르엘의 콧바람이 점점 강해지자 아몬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귀가 역대급으로 꼿꼿하게 솟은 걸 보니, 화가 나도 단단히 났군.’
아무튼 아나르엘은 워프 마법을 실패한 후유증으로 당분간은 마법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
결국 학생들을 제외한 아카데미의 쓰레기들 역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사람들이 감자밭 재건을 돕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오히려 남은 감자밭이 망가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브레슬 부학교장은 그나마 남은 감자마저 훔쳐 먹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고, 마리온 선배님이랑 슬로스 선배님은…….’
마리온은 자작, 슬로스는 후작가 출신이다.
둘 다 상당히 지체 높은 귀족이니만큼, 어제까지만 해도 감자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다고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일손을 돕는 건 꿈도 못 꾸겠지.’
그야말로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격이었다.
“에휴…….”
“흥! 그 한숨은 뭐죠!?”
“죄,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을 좀 했습니다.”
둘러 대며 슬금슬금 몸을 일으킨 아몬이 무릎 꿇은 채 말했다.
“그, 그럼 존경하는 학교장님.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긴요! 꼼짝없이 여기 머물러야죠!”
“……예, 머무시는 동안 최대한 불편한 점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카셀라그 어르신도 가능한 한 여기로 못 오게 하겠습니다.”
“흥! 그야 물론…….”
방문이 벌컥 열리며 카셀라그가 들어왔다.
“아몬, 있느냐?”
“끼아아악!”
냅다 이불을 뒤집어쓰며 와들와들 떠는 아나르엘의 모습에 방에 들어온 카셀라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짝짓기 도중이었느냐?”
카셀라그의 헛소리에 아몬이 기겁을 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끔찍한 말입니까!”
“아니냐? 아님 말고. 그나저나 네 상급자인 엘프가 마법 실패로 앓아 누었다기에 잠시 봐 주러 왔다만.”
“괜찮습니다.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하긴, 엘프라면 마법 실패 한두 번쯤은 알아서 수습하겠지.”
그리 말하며 턱을 쓰다듬는 카셀라그를 본 아몬이 말했다.
“휴, 하여간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아, 나중에 언제 또 영지에 돌아올 작정이냐?”
“예? 글쎄요…… 휴가가 쌓여야 할 테니, 몇 개월은 지나야 하겠죠?”
카셀라그가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가 좋구나. 마침 그때쯤이면 준비가 끝날 테니까.”
“예? 무슨 준비요?”
“선물 준비라고 해야 할까?”
아몬이 눈을 번뜩였다.
“황금입니까?”
“아니.”
아몬이 실망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자 카셀라그가 덧붙였다.
“그보다 귀한 거라 할 수 있지.”
늘어진 아몬의 어깨가 힘을 되찾았다.
“휴가가 생기는 대로 곧장 오겠습니다.”
“허허! 그래, 그래. 그리고 그때 긴히 할 말도 있으니 그리 알고 있거라.”
“긴히 할 말이요?”
“그건 그때 이야기해 주마.”
“음…….”
뭐, 선물을 주면서 할 이야기라면 꽤 중요한 부탁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금보다 더 귀한 걸 준다는데…….’
그깟 부탁, 얼마든지 들어 주지.
아몬이 흔쾌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카셀라그가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아나르엘이 얼굴이 슬금슬금 이불 밖으로 나왔다.
“가셨나요?”
“네.”
“……훌쩍!”
이 상황이 서러운지 코를 먹는 아나르엘을 본 아몬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좀 쉬고 계세요. 어르신도 더 이상 오시진 않을 겁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마리온이 다가왔다.
“학교장님은 좀 어떠신가?”
“멀쩡해요. 아무튼 여러분.”
아몬은 상황을 설명했다.
꼼짝없이 못 돌아가게 되었으니 여기서 일을 도와주십시오!
다행히 반발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학교장으로써 교사의 어려움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부학교장님, 그 주머니는 뭐죠?”
“……그냥 주머니입니다.”
“내놓으세요!”
“아악!”
대놓고 감자를 훔치려는 브레슬을 제압한 후, 불안한 눈빛으로 마리온과 슬로스를 바라봤다.
“두 분은…….”
“응?”
“감자가 뭔지는 아시죠?”
마리온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래 봬도 대전쟁 시절, 종군하며 둔전병을 관리 감독한 적도 있다네. 일손도 조금은 도왔었지.”
“오, 오오……!”
“그때 주로 수확하던 건 무나 콩이었지만 아주 많이 다르진 않겠지.”
“그럼요! 마리온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래. 맡겨 주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슬로스 선배님은……?”
슬로스가 퉁명스레 답했다.
“우리 집 마당에도 감자나무가 몇 그루는 있었거든?”
“슬로스 선배님은 그냥 쉬세요.”
“응? 알았어.”
슬로스 탈락!
“음, 그럼 클로에랑 보리스는…….”
클로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농사일을 해 본 적은 없어요. 그래도 열심히 해 볼게요.”
“클로에! 넌 언제나 내게 감동만을 안겨 주는구나!”
이 예쁜 것,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클로에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선생님.”
“응? 그래, 보리스!”
“아시겠지만, 저는 산골 마을 출신이에요.”
아몬이 눈을 부릅떴다.
“그, 그럼…….”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열심히 도왔어요.”
“……!”
“퇴비랑 비료 뿌리기, 밭 갈기, 이랑 파기, 해충 잡기! 뭐든 맡겨 주세요!”
아몬이 농사일의 에이스, 보리스를 얼싸안았다.
“잘 부탁한다, 보리스!”
“네! 선생님!”
보리스를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로에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보리스, 저 돼지 자식이…….”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누구도 듣지 못했다.
그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