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27)
아카데미가 망했다 27화
출세라는 이름의 파랑새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슬로스와 혼인한다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어때!’
원래 정략결혼 자체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물론 자신 같은 시골 귀족의 자제는, 더더욱 차남쯤 되는 놈은 정략결혼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정략결혼은 각 가문이 화합을 이뤄 상승효과를 노리는 행위!
‘없는 것들끼리 무슨 살림살이를 합쳐서 불려 먹고 그러겠어.’
즉 정략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뜻이다.
‘정략결혼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멀어져서 가슴이 아프다고? 그딴 건 전부 배부른 놈들의 헛소리지!’
비극적인 로맨스들을 배부른 헛소리로 치부하는 아몬!
아무튼 현재.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창밖을 보며 우수에 젖어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비로소 내게도 새로운 해가 뜨는군.”
비루먹은 과거의 자신과 작별할 시간이었다.
‘……좋아. 그럼 슬슬 준비해 볼까?’
어제 슬로스에게 말한 대로, 날도 밝았으니 혼인을 승낙받기 위해 피드 후작가에 찾아갈 작정이었다.
곧이어 밤늦게 번화가에서 급히 공수해 온 정장을 꼼꼼히 갖춰 입었다.
그리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본 아몬이 흡족하게 웃었다.
‘난 아무거나 걸쳐도 잘 어울리지만, 이 정장은 특히 잘 어울리는군.’
옷을 골라 주던 슬로스는 몇 번이고 옷을 바꿔 입히며 ‘흐음, 허어, 쓰읍…….’이라는 기묘한 추임새를 넣곤 했었다.
‘왜 그랬을까? 가게 주인은 입는 것마다 잘 어울린다고 극찬을 했었는데. 다음에 옷 살 일이 있으면 또 거기서 사야겠군. 가게 주인이 수줍음이 좀 많은지 자꾸 눈을 피하는 게 흠이지만 말이지.’
아무튼 슬로스의 추천을 마다하고 자신의 안목으로 고른 정장을 입은 아몬이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마침 옆방을 쓰는 마리온과 마주쳤다.
“어으, 숙취야……. 응? 아몬, 자네 웬 정장을 차려입고 있나?”
“오늘 피드 후작가로 간다고 했잖아요?”
“피드 후작가……? 아, 아아!”
마리온이 숙취로 지끈대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어우, 그랬지. 슬슬 술을 좀 줄여야 하나…….”
“예, 어제 일도 기억 못하시는 걸 보니 줄이긴 줄여야겠네요.”
“……응? 어제 일?”
마리온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숙취 탓에 약간 흐려진 기억이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둘이 정말 혼인을 해? 으히히! 너무 안 어울려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낄낄낄! 그럼 안 웃기겠나? 슬로스가 아까워도 너무 아까운데!’
‘제가 더 아깝…….’
‘껙껙껙! 여태 자네가 한 농담 중 가장 웃기구만!’
비로소 회상에서 빠져나온 마리온이 슬그머니 아몬을 바라봤다.
“……자네도 알지? 기분 좋게 술에 취하면 낙엽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거.”
“…….”
“게다가 내가 참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들이 혼인한다니, 어찌나 즐거운지 도통 웃음을 멈출 수가 없더군. 그래서 장난이 평소보다 좀 심했나 보이.”
“…….”
싸늘한 침묵이 돌아오자 마리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잘 생각해 보니 자네가 아깝군.”
아몬이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렇죠?”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몬은 아카데미를 나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헤어살롱이라.’
간만에 가문으로 돌아가는데다 혼약을 알리기 위한 귀가이니, 슬로스도 나름대로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준비를 하는 걸까?’
이윽고 도착한 건물은 귀족 아가씨들이 애용할 것처럼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여기에 슬로스가?’
그럴 리가 없다.
‘골방 창고 같은 곳에서 침낭 뒤집어쓰고 잘 것 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
장소를 착각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봐도, 간판을 보니 어제 슬로스가 말한 곳이 분명했다.
‘음……. 근데 입구에 클로즈가 걸려 있는데?’
그렇게 아몬이 문 앞을 기웃거리는 와중.
슬로스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여인이 창밖을 슬쩍 보더니 속삭였다.
“누가 밖에 있는데요?”
“응? 클로즈도 걸어 놨는데 누가 온 거지?”
피드 후작 가문이라는 대귀족의 영애를 치장해 주는 중이었기에 문도 잠그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웬 방문객이란 말인가.
“글쎄요, 남잔데요?”
“남자?”
보통 이곳은 귀족 영애, 귀족가의 부인들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웬 남자?
그때 눈을 감은 채 머리칼을 손질받고 있던 슬로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장례식장 갈 것 같은 새카만 정장을 입고 있나요?”
“아, 네. 맞아요.”
“그럼 제 일행인가 보군요.”
“아하, 그래요? 집사…….”
아몬의 행색을 살펴본 여인이 말을 정정했다.
“아니, 수행원…….”
그리 말하려다 또 아닌 것 같아 다시 말을 고쳤다.
“하인이군요!”
졸지에 아몬이 하인이 되어 버렸지만, 제아무리 신경 굵은 슬로스라 할지언정 이 타이밍에 ‘남편 될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몬을 변호할 의리조차 없었다!
“아무튼 안으로 들일까요?”
“네, 밖에 세워 둘 순 없으니까요.”
덕분에 안으로 들어온 아몬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아직 안 왔나?”
“네?”
“음,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
귀족 여성의 전유물인 헤어살롱!
밭에서 감자나 캐던 아몬에겐 영 불편한 장소였다.
때문에 쭈뼛거리고 있느니 밖에서 기다리려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 아몬이 눈을 부릅떴다.
“슬로스 선배님……?”
“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몬이 입을 뻐끔거리자 슬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못 알아본 거야?”
“…….”
“흥, 나 참.”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치는 슬로스였지만,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하긴, 내가 평소에 안 꾸며서 그렇지 꾸미면 못 알아볼 정도긴 하지.’
평소엔 침낭 속에서 뒹구느라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로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상대하는 헤어살롱!
그곳의 숙련된 직원이 그녀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켰으니, 아몬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호호호, 하인 분께서 아가씨를 못 알아봤나 봐요!”
깔깔대며 웃는 직원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피식피식 웃는 슬로스!
그런 그들을 본 아몬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일부러 못 알아본 척한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한배를 타게 될 운명. 지금부터 잘 보여 둬야지.’
그래야 훗날 슬로스가 감자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 실권을 얻었을 때, 아몬에게 씌워 줄 감투가 두툼해지지 않겠는가!
출세를 향한 첫걸음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슬로스의 광대뼈가 춤을 추는군. 저렇게 좋을까?’
아몬은 아예 슬로스의 옆에 서서 온갖 아부를 떨었다.
“근데 가만 보니 머리만 조금 정리하고 눈 화장만 조금 한 거네요? 하긴, 본판이 워낙 좋으니 뭐…….”
은근슬쩍 ‘본판이 좋아 조금만 꾸며도 확 달라 보인다.’는 칭찬까지!
슬로스의 입꼬리가 한층 더 상향곡선을 그렸다.
“흐흥, 이제 좀 알겠어? 누가 아까워?”
“그야 물론 선배님이죠!”
“그치? 그치?”
그때 혀를 내두르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 아몬에게 다가온 직원이 말했다.
“그럼 하인 분, 잠시만 나와 주실래요? 머리 손질 마저 할게요.”
“……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도 하인 어쩌고 하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자 슬로스가 직원을 향해 말했다.
“하인이 아니라 남편 될 사람이에요.”
“네!? 아,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직원의 사죄를 대충 받아 준 아몬이 힐끔 슬로스를 바라봤다.
가만 보니 앞에서 어슬렁거릴 때 자신을 하인이라 소개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화장했다고 인성이 어디 가겠어?’
아몬은 안 그래도 낮은 슬로스를 향한 내적 친밀감이 하락하는 것을 느끼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 * *
도시 한편에 위치한 마법사 길드의 지부.
피드 후작가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의 준비를 기다리던 슬로스가 말했다.
“아몬.”
“네, 선배님.”
“아버지……. 가주님 앞에선 되도록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야.”
“네? 어째서요?”
간밤에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를 짜 뒀었는데?
‘온갖 질문에 대한 대응책을 완벽히 세워 뒀다고. 슬로스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 아껴 줄 수 있느냐 등등.’
그런데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다니.
슬로스가 대답했다.
“그냥……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시는 분이거든. 내 말조차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네 말을 들으시겠어?”
“음.”
“혹시 뭘 물어보실 수 있긴 한데,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 같고.”
“…….”
“적당히 대답 잘해 줘.”
가주,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전혀 묻어나오지 않는 자조적인 말투에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겠습니다.”
“……그래.”
슬로스의 말을 감안하면 오늘 일정은 아주 빨리 끝날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워프 게이트를 통해 이동한 아몬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도시 링슬레이.”
피드 가문의 현 가주인 피드 후작.
즉 ‘바티스타 링슬레이 피드’가 다스리는 도시인 ‘링슬레이’였다.
아몬이 두리번거리던 와중, 슬로스도 이곳이 생소하다는 듯한 눈치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슬로스도 거의 곧바로 아모니스 아카데미로 왔으니까 도시를 깊숙이 둘러볼 기회가 별로 없었겠지.’
그렇게 슬로스와 아몬은 알음알음 후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슬슬 낯익은 길이 나오는지, 길을 걷는 슬로스의 발걸음은 점차 거침이 없어졌지만 그에 비해 걷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말에 슬로스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됐어. 얼른 끝내자.”
“……그러죠.”
이윽고 도착한 저택.
정문을 향해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창을 내밀어 길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피드 후작 각하의 저택이오. 용무가 있다면…….”
금세 말문을 멈춘 경비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 슬로스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올슨.”
“어, 어찌 기별도 없이……. 당장 안에 전하겠습니다!”
부리나케 저택 안으로 달려가는 경비병.
곧이어 슬로스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전해도 귀찮아하실 텐데.”
저택 안은 익숙한지, 서슴없이 응접실로 향한 슬로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앉아서 기다리자. 가주께서 곧 부르실 테니까.”
“아, 예.”
“맞아, 그리고 놀랄 수도 있으니까 미리 알아 둬.”
“예?”
슬로스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리 가문은 이래저래 처리할 일이 많나 봐. 그래서 회의를 꽤 자주 열어.”
“회의요?”
“응. 그리고 그 자리엔 우리 가문의 십삼 검이 모두 모여.”
“십삼 검이요?”
“응. 우리 가문의 최고수들 열세 명. 그중 최고는 당연히 가주시고, 나머지 열두 명은 내 오빠들이야.”
아몬이 눈을 깜빡거렸다.
‘오빠가 열 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잠시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아몬이 등을 긁적거렸다.
갑자기 영문 모를 오싹함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 * *
대회의장.
상석에 앉은 채 근엄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피드 후작.
마찬가지로 꼿꼿한 자세로 앉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십이 검.
장내를 둘러본 집사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 안건은 앞선 내용대로 처리하겠습니다.”
“…….”
“그리고 이 안건은, 내일 중으로 조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피드 후작가의 회의는 항상 이런 분위기였다.
이 침묵이 동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집사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슬슬 아가씨를 회의장으로 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일행인 남성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도 안으로 들일…….”
집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피드 후작을 포함한 회의장의 십삼 검 전원이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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