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28)
아카데미가 망했다 28화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응접실로 찾아온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가씨. 그럼 대회의장으로 드시지요.”
“네, 알겠어요. 그런데 동행은…….”
동행, 그 단어에 집사가 이쪽을 슬쩍 바라봤다.
그러나 곧 애써 외면하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함께 가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 동행하셔야지요.”
일단 ‘혼인을 알리는 자리’였기에 아몬의 동행은 말하면 입 아플 일이다!
그렇기에 슬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앞장서며 말했다.
“가자, 아몬.”
그리고 슬로스를 뒤따르다 집사를 지나치는 순간에 볼 수 있었다.
측은함과 동정심이 가득 깃들어있는 집사의 눈빛을!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의문과 함께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아몬은 슬로스와 함께 대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마주한 풍경은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릴 정도였다.
“……콜록!”
험상궂고 거대한 체구의 사내들이 커다란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무려 열세 명이나!
때문에 널찍한 대회의장이 꽉 찬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 사람들이 피드 가문의 십삼 검인가?’
그렇다면 상석에 앉아 있는 중년인이 피드 후작가의 가주인 ‘바티스타 링슬레이 피드’일 것이다.
‘……즉 저분이 장인어른이라는 건가.’
재빠르게 견적을 뽑은 아몬이 앞으로 한걸음 나선 순간이었다.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을 제지한 슬로스가 눈을 마주치더니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나대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신호.’
그러고 보니 되도록 말을 아끼라 했었지.
순순히 물러나자 작게 심호흡을 한 슬로스가 피드 후작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후작가의 영애에 걸맞은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한 슬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
그러나 인사에 화답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음에도, 딸을 바라보는 피드 후작의 입은 꿈쩍도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슬로스를 바라볼 뿐.
하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재차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중히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
“아모니스 아카데미에서 교사로 일하며 최근에 좋은 만남이 생겨, 함께 미래를 보고 싶은 상대가 생겼기에 그 사실을 전해드리려 찾아뵙게 됐습니다.”
“…….”
“소개드리겠습니다, 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드레이크 남작가의 자제입니다.”
옆구리를 찔린 아몬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드레이크 남작가의 아몬 드레이크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슬로스가 말을 이었다.
“비록 아버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혼인이지만…….”
“…….”
“축하해 주실 수 있을지를 여쭤 봐도…….”
그녀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넓은 대회의장에는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작은 숨소리조차 크게 느껴질 정도로 묵직한 침묵이 감돈다.
그 어떤 대답도, 반응도 없다.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쪽을 응시하는 열세 쌍의 눈동자만이 있을 뿐.
“…….”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와중,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슬로스가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대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어?’
그 갑작스러운 광경에 아몬도 뒤따라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낮게 깔린 저음에 고개를 돌리니 이쪽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피드 후작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조용히 엽궐련을 입에 문 그가 연기를 훅 뿜으며 입을 열었다.
“드레이크 남작가의 아몬이라 했나?”
“……그렇습니다만.”
“그렇군. 드레이크 남작가.”
중얼거린 피드 후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가 하겠느냐?”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님.”
“좋다, 랜슬로. 가라.”
“예, 아버님.”
고개를 끄덕인 랜슬로스가 아몬을 홱 노려보며 말했다.
“간다.”
“예?”
가다니? 무슨 말이지?
그 의문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이었다.
“뒈져라.”
느닷없는 랜슬로의 주먹질에 아몬이 얼른 주먹을 피하며 외쳤다.
“가,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유언은 그게 끝이냐!”
“뭔 헛소리…….”
“유언은 드레이크 남작가에 잘 전해 주마!”
말을 제대로 이을 겨를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러 오는 랜슬로!
제아무리 출세에 눈이 먼 아몬이라지만, 이렇게 영문조차 모르고 덤벼오는데 무작정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달려드는 랜슬로의 주먹을 마주 후려쳤다.
뽀각-!
맨손으로 오크와 개싸움을 하던 드레이크 영지의 건아, 아몬의 주먹은 놀라울 정도로 튼튼하다!
랜슬로는 부러진 주먹을 붙잡고 쓰러진 채 울부짖었다.
“깨애애액!”
멧돼지처럼 저돌적이던 조금 전과는 달리 가녀린 강아지처럼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는 랜슬로!
그 광경에 나머지 십이검이 수군거렸다.
“호오, 랜슬로를 일격에 쓰러트리다니…….”
“흥, 어차피 그 녀석은 우리 십삼 검 중 최약체다.”
쑥덕대던 그들 중 누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음, 칸슬로라면 믿을 수 있지.”
가장 말석인 랜슬로의 바로 옆자리인 십이 검 칸슬로!
그가 주먹을 뚜둑 꺾으며 다가오자 아몬이 황급히 말했다.
“잠깐,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이유나 좀 듣고…….”
“시끄럽다!!”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달려든 칸슬로가 주먹을 휘둘러 왔다.
“죽어라!”
칸슬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턱이 부서진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칸슬로까지 일격에 쓰러트리다니.”
“흥, 녀석은 우리 십삼 검 중 두 번째로 약합니다. 이번에는 십일 검인 제가 나서겠습니다.”
십일 검 벤슬로는 다리가 부러진 채 처절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미 세 명을 쓰러트린 시점에서 아몬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이유야 뻔했다.
‘어디 천한 시골 귀족 나부랭이가 피드 후작가에 들이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와선 이야기가 다르다.
어느새 피드 후작도 굳은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입에 물고 있는 엽궐련의 재를 털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꽤 깊은 감명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피드 후작가는 오로지 힘만을 추구한다 했다.’
그런데 피드 후작가의 최정예 고수들인 십삼 검을 무려 셋이나 쓰러트렸다.
‘……즉 이건 출세의 기회.’
깨달음을 얻은 아몬이 웃옷 정장을 벗어 던지며 우렁찬 함성을 터뜨렸다.
“하하하! 피드 후작가의 십삼 검이 고작 이게 전부입니까!!”
“저, 저놈이……!”
“자! 어서 덤비십시오!”
테이블을 탕 후려친 중년인이 몸을 일으켰다.
“건방진 놈! 우리 십삼 검은 십 검부터가 진짜다! 가장 아래의 삼 검은 십 검에 들지 못한 떨거지일 뿐!”
그 일갈에 먼저 쓰러진 세 명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드 후작가의 십 검인 나, 크라슬로가 나서는 이상 네놈의 불손함도 이만 끝이니라!!”
“하하하! 좋습니다! 덤비십시오!”
“이놈!!”
크라슬로의 말이 정말이었는지, 십 검인 그는 아몬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피드 후작가의 장기는 검.
오거와 팔씨름을 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인 아몬의 완력 앞에선 결국 맨손으론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커헉!”
크라슬로가 얻어맞은 배를 붙잡고 쓰러지자 아몬이 함성을 질렀다.
“다음!!”
어느새 탁자에 앉은 나머지 구 검들의 웅성임은 커져 있었다.
“맨손으로 잡아 죽이긴 쉽지 않겠어.”
“그러나 우리가 맨손을 상대로 검을 드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때 웅성임을 잠자코 듣고 있던 피드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젊은 나이에 제법이로군.”
피드 후작이 아몬에게 다가가자 주변 팔 검들이 경악했다.
“아, 아버님!”
“설마…….”
눈앞에 우뚝 선 피드 후작이 아몬을 내려다봤다.
아몬도 키가 그다지 작은 편은 아니건만, 피드 후작은 그런 아몬을 내려다볼 정도의 거구였다.
“아,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아버님의 솜씨인가! 간만에 눈이 호강을 하겠구나!”
어느새 주변 팔 검들은 짹짹 지저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군거림에 아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저들이 뭘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눈앞의 피드 후작은 너무나도 평온한 기색이지 않은가!
“아몬 드레이크.”
그리고 피드 후작이 입을 연 순간, 아몬의 눈에 비춰진 그의 모습이 한층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치 태산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위압감.
제국의 4대 기사 중 하나, 그랜드소드 마스터 바티스타 링슬레이 피드.
그가 줄기줄기 뿜어내는 살기에 아몬의 얼굴이 굳었다.
‘……어라? 살기?’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팔 검들의 기대는 헛된 것이 아니었나 보다.
피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죽을 각오는 됐나?”
그 싸늘한 목소리에 아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을 각오?
‘됐을 리 있겠냐고!’
얼른 뒷걸음질 친 아몬이 얼른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언은 끝인가.”
“아니, 피드 후작 각하! 도대체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
“예! 느닷없이 잡아 죽이려는 이유 말입니다!”
피드 후작의 뺨이 씰룩거렸다.
동시에 팔 검들과 어디 한 곳씩 부러진 채 쓰러져 있는 사검들도 낑낑대며 외쳤다.
“흥! 어리석기 짝이 없군!”
“저런 놈이 끙, 감히 피드 후작가의 문턱을 윽, 밟다니……!”
그들의 아우성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아몬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무례를 범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이유.”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린 피드 후작이 말했다.
“정녕 네 죄를 모르겠더냐?”
“예! 피드 후작 각하! 부디 알려주십시오!”
억울함을 담은 아몬의 고함에 피드 후작이 마치 절규하듯 괴성을 질렀다.
“허, 흐, 하하하하! 좋다!! 내 친히 알려 주마!!”
* * *
대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슬로스는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너무 서럽고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풀린 것이다.
“흑, 흐흐흑…….”
몰려오는 서러움에 슬로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에 기댄 채 얼마나 울었을까.
“허, 흐, 하하하하! 좋다!! 내 친히 알려 주마!!”
돌연 대회의장 안에서 터져 나온 피드 후작의 벼락같은 고함에 슬로스가 귀를 기울였다.
* * *
쿵-!
아몬을 잡아먹을 듯 크게 한 걸음 내딛은 피드 후작이 괴성을 질렀다.
“감히! 네놈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딸을 더러운 수작질로 홀려 놓고 그 죄를 모르겠다 말하는 것이냐아아악!!”
“그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 예?”
피드 후작이 발로 땅을 쾅쾅 구르며 외쳤다.
“감히 네깟 놈이 내 딸을! 그 작고 여린 아이를 홀려어어억!!”
“……예?”
다른 십이 검, 슬로스의 오빠들도 탁자를 펑펑 두드리며 삿대질했다.
“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양아치 한량 같은 놈이 감히!!”
“슬로스와 혼인? 어림도 없다! 아암!!”
아몬이 발광하는 열세 명의 사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작고 여린, 뭐가 어쩌고 어째?’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자신을 향한 중상모략에 아몬이 파들파들 떠는 와중.
벌컥-!
슬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떼쓰는 것처럼 발광하던 열세 명의 사내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슬로스가 도로 문을 닫고 나가고.
잠시 후 그들이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허억, 헉! 노, 놀래라!”
“내, 내 딸이지만 어쩜 볼 때마다 저리 귀여운지…….”
“휴우, 아버님도 그렇습니까? 저 아이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굳어 버려서 원.”
뭣도 모르고 재잘대는 그들을 본 아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잠깐. 이 사람들, 아니지. 이 새끼들 설마…….’
아까 슬로스가 혼담을 전할 때 말없이 침묵하고 있었던 게 단순히 슬로스의 앞이라 얼어붙어 있었던 거였나?
‘그럼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슬로스와 혼인한다니 괘씸해서 그러는 거였어?’
아몬이 충격으로 멍해 져있는 와중.
그들은 갑자기 나타났던 슬로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로스 녀석, 내 딸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못 보다 봤더니 전보다 훨씬 예뻐졌구나!”
“껄껄껄! 돌아가신 어머님의 외모를 쏙 빼다 닮았군요!”
슬로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피드 후작가의 십삼 검!
아몬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던 그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슬로스에 대한 환담을 나누던 와중.
벌컥-!
슬로스가 또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들은 다시 얼어붙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슬로스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여태 밖에서 다 듣고 있었으니까!
“아버님.”
“…….”
“오라버니들.”
“…….”
가문 내에서 홀대받고 있었다는 건 단지 서툰 아버지와 오빠들로 인해 생긴 오해!
슬로스는 피드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혹여나 밀어낼까 두려운지 조심스레 피드 후작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밀어내기는커녕, 피드 후작은 잘못 만지면 부서질까 두려워하듯 손을 파르르 떨며 슬로스의 어깨를 조심조심 감싸 안았다.
“끕……!”
그간 딸에게 다가가지 못해 얼마나 슬펐던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피드 후작!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슬금슬금-
다른 십이 검, 슬로스의 오빠들도 그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가더니 마치 사탕에 개미 떼가 달려드는 것처럼 슬로스를 부둥켜안는 게 아닌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화목하고 감동적인 모습!
그리고 한편.
“……훌쩍!”
아몬은 어느새 무릎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녀와 남매의 묵은 감정 해소라는 감동적인 광경 때문은 아니었고, 또 이렇게 자신의 출세가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