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29)
아카데미가 망했다 29화
‘저기, 슬로스 선배님?’
‘왜?’
‘그냥 후작가에 짜져 있……. 아니, 계시는 게 어때요? 오해도 다 풀렸으니까 굳이 아카데미에 계실 이유가 없잖아요?’
슬로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은 내가 검의 길을 걷길 원치 않으셔.’
‘예? 그건 또 왜…….’
‘피 토할 정도로 힘들대. 내가 그런 힘든 길을 걷길 원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그래서 나 하나만은 자유롭게 살길 바라서 밖으로 내보냈던 거고.’
밖으로 나돌던 것에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켠 슬로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노력할 거지만.’
‘…….’
‘그러니 당분간 할 일도 없겠다 아카데미에 있어 보려고. 도로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하니 막내 오빠가 웬 쪽지를 주더라. 가끔은 집에 돌아오라고 적혀 있었어.’
‘…….’
‘후후, 직접 말할 것이지. 근데 너 왜 표정이 점점 썩고 있어? 싫어?’
아몬이 퉁명스레 말했다.
‘제 출세 길이 무너졌는데 기분이 마냥 좋을 리는 없잖아요.’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드래곤 보고 놀란 가슴 도마뱀 보고 놀란다고, 선배님 잘못은 아니더라도 선배님을 보기만 해도 출세가 날아갔구나 싶어서 기분이 좀 그러네요.’
그리 말하자 슬로스는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뭐, 아무튼 피드 후작가에 다녀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나.’
아카데미로 돌아와 혼담이 파기됐다는 소식을 전하니, 마리온은 그럴 줄 알았다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물론 아몬이 술병을 거꾸로 쥐자 금세 웃음을 멈추긴 했지만 말이다.
‘브레슬 부학교장은 뭐 어쩌라는 반응이었고, 라인벨트 그 영감님은 다시 제자가 생길 기회가 생겼다는 눈빛이었지.’
한데 마음에 약간 걸리는 것은, 아나르엘 학교장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안색이 영 좋지 않았었다.
‘무슨 일 있나? 뭐, 있다 한들 내가 뭘 어쩌겠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아무튼 최근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피드 후작가를 등에 없고 출세하는 일은 물 건너갔지만 말이지.’
피식 웃은 아몬이 수업을 위한 교재를 들어올렸다.
‘내 역사학 강의도 꽤 순조롭고 말이지.’
처음 커리큘럼을 짤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막상 수업에 들어가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보리스랑 클로에도 의욕적이라 가르치는 재미가 있고 말이야. 문제는 오늘부터 레이몬드가 수업에 참가한다는 건데…….’
아몬이 후작가로 갔을 때 라인벨트와 레이몬드는 여태 살던 곳으로 잠시 돌아갔었다고 했다.
가져올 물건이 있다나 뭐라나.
때문에 레이몬드는 오늘에서야 아몬의 첫 수업을 듣게 되었다.
‘뭐, 그래도 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수업 태도는 좋겠지.’
그리 생각하며 걱정을 접은 아몬이 강의실 문을 힘껏 열었다.
“자, 얘들아! 점심은 맛있게 먹었니?”
활기차게 외치며 강의실로 들어간 아몬은 우뚝 굳고 말았다.
보리스, 클로에, 레이몬드.
이렇게 세 명의 학생이 나란히 앉아있는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레이몬드의 옆에 또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다.
‘……학생이 왜 넷이지?’
신입생인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어, 음……?”
아몬이 눈을 비비며 다시 학생을 셌다.
보리스, 클로에, 레이몬드.
그리고 또 하나의…….
‘……뭐야, 저거.’
인형이었다.
그것도 레이몬드와 똑 닮은 인형.
“레, 레이몬드?”
“네?”
“그…… 네 옆에 인형은 뭐니?”
그 물음에 레이몬드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이건 인형이 아니에요.”
“……어?”
“이건 저라고요.”
“뭐…….”
목구멍까지 ‘그게 무슨 개소리냐, 미친놈아’라는 말이 올라왔지만, 아몬은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인형을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눈빛은 더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보는 듯한 달콤한 눈빛!
가만 보니, 보리스와 클로에 역시 레이몬드의 미친 기행에 공포를 느끼는 모양인지 흠칫거리며 연신 그쪽을 눈짓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수업 시작하자!”
아몬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로 했다.
* * *
“어르신, 당신 손자가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느닷없는 손자의 험담에 빗자루로 안뜰을 쓸던 라인벨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당신 손자가 웬 인형을 끌어안고선 인형 아니라고, 이건 저 자신이라고 하고 있다고요.”
“……아아.”
라인벨트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즉 레이몬드가 하루아침에 미쳐 버려서 저런 짓을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자네, 그걸 이제 본 건가?”
“예, 피드 후작가에 다녀온 이후론 수업 커리큘럼을 짜느라 방에서 거의 나오질 못했으니까요.”
“음…… 그렇군.”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거린 라인벨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기엔 나름 사연이 있네. 그러니 당분간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군.”
사연, 그 단어에 아몬이 입을 딱 다물었다.
‘설마…….’
대체로 인형에 집착한다는 건 애정이 결핍되었다는 신호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똑 닮은 인형에 집착한다면, 거기에 얼마나 커다란 사정이 있을지 가늠할 수 없으리라.
‘부모의 학대? 쌍둥이 형제의 사별?’
그 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으리라.
물론 그런 상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라인벨트가 입을 열었다.
“사연이 궁금한가 보군.”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
“말하기 힘든 내용이라면 말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라인벨트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자네는 그 아이의 선생이지. 선생이라면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 라인벨트가 말했다.
“레이, 그 녀석은 말일세…….”
라인벨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독한 왕자병일세.”
“아아, 왕자……. 예?”
“나르시시즘이라고도 하지.”
“자기애(自己愛)가 심하다고요?”
“그래. 자기 자신을 지독하리만큼 사랑하더군.”
문득 아까 인형을 바라보던 레이몬드의 촉촉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럼 그게 설마…….
“차라리 거울을 들고 다니지, 무슨 인형을…….”
아몬의 한탄에 라인벨트도 탄식했다.
“처음엔 거울이었네.”
“……예?”
“그런데 거울론 만족 못하는지 언제부턴가 자기와 똑 닮은 인형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더군.”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거 직접 만든 거였습니까?”
“그래. 손재주가 좋더군.”
“…….”
“게다가 제 키가 크면, 또 언제 귀신같이 새로 만들어 안고 다니더군.”
“…….”
“처음엔 좋게 타일러도 보고 빼앗기도 해 봤는데 난리가 나더라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나마 남들 다 보는 자리에선 안 그런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듣고 보니 경진대회 땐 인형을 안 가지고 왔더라고요.”
“아, 그래. 경진대회.”
라인벨트가 말을 이었다.
“레이 녀석에게 경진대회에서 실력을 감추고 우승하라고 했던 건, 그런 성향을 좀 죽여 보려던 것도 있었다네.”
“…….”
“그러지 않으면 너무 튈 게 분명하니.”
“…….”
아몬이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어떻게 된 게 아카데미에 정상인이 없지?’
유일한 희망, 빛과 소금이었던 학생진에 웬 미친놈 하나가 들어오다니!
그 어떤 결함도 없는 소중한 학생진이 이렇게 오염.
‘갑자기 왜 클로에가 떠올랐지?’
아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두고 보자. 적어도 자기 닮은 인형 안고 다니는 게 남들한테 이렇다 할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 애들 눈치를 보아하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치던데, 거기에 물들 것 같지도 않아.’
게다가 레이몬드는 꼴 보기 싫긴 해도 소드마스터의 실력자!
클로에와 보리스에게 적잖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꼴 보기 싫긴 해도.
‘게다가 클로에와 보리스한테 검술에 대한 조언을 해 줄지도 모르지. 꼴 보기 싫긴 해도.’
마음을 다잡은 아몬이 푸근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인드컨트롤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군요. 알아 두겠습니다.”
“그래. 자네 같은 훌륭한 선생이라면 레이를 바로잡아줄지도 모르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맙다는 듯 웃으며 빗자루로 도로 마당을 쓸던 라인벨트가 아차 싶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깜빡할 뻔했군.”
“또 뭐가 있습니까?”
“아까 전에 혹시 자네를 발견하면 학교장실로 불러 달라고, 아나르엘 학교장께서 말하시더군.”
“그래요? 무슨 일인지는 말 안하던가요?”
“따로 듣지는 못했네. 하지만 제법 큰 고민이 있으신 모양이야.”
큰 고민이라는 말에 아몬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후작가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했을 때 학교장 안색이 상당히 좋지 않았었는데…….’
그게 라인벨트가 말한 ‘큰 고민’ 때문인 걸까?
아몬은 서둘러 학교장실로 향했다.
* * *
“윽, 으으윽…….”
앉은 채 선잠을 자던 아나르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아아악! 헉, 꾸, 꿈이었구나…….”
중얼거리며 식은땀을 닦은 아나르엘이 문득 책상 위를 바라봤다.
동시에 그렇지 않아도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핏기라곤 전혀 없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꾸, 꿈이 아니었어……!”
아나르엘이 공포에 질려 귀를 와들와들 떨던 와중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
“학교장님, 아몬 드레이크입니다. 부르셨다고요?”
“아아아악!!”
“헉! 뭐, 뭡니까!?”
느닷없는 아나르엘의 비명에 아몬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침입자라도 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몬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푹 쉬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웬 비명을 질러요?”
“힉, 히이익…….”
“아니, 갑자기 대체 왜 그래요?”
그 물음에 대답도 않고 와들와들 떠는 아나르엘의 행동에 아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나르엘이 책상 위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편지인가?’
무심코 다가가 그것을 집어든 아몬이 그것을 읽어 봤다.
[킹오브망고 농장 파산 알림] [유례없는 역사적인 장마 및 홍수 재해로 인하여 귀하의 투자처인 킹오브망고 농장이 파산했음을 알리며, 너른 양해의 말씀을 구하는…….]아몬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한참 그렇게 서서 멍하니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아, 아몬 선생님……?”
“……….”
“아몬 선생님!?”
아나르엘이 애타게 불러도 아몬은 편지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굳어 있었을까.
흠칫하며 정신을 차린 아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웬 편지지?”
곧이어 아몬이 다시 편지를 읽더니 다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아몬 선생님!!”
“………어라? 이거 웬 편지죠?”
극도의 충격을 받은 아몬의 뇌가 연이어 기능을 정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단기 기억 상실을 겪는 와중에도 아몬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드디어, 마침내.
‘아카데미가 망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