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76)
아카데미가 망했다 76화
그 날카로운 시선에 파이스는 찬물을, 아니, 불벼락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호, 홍염의 마귀가 대체 왜 교사로 일하고 있는 거지?’
홍염의 마귀, 마리온 럼덤은 1급 경계대상.
그가 대전쟁 시절 적국의 기사단 하나를 홀로 궤멸시킨 일화는 유명했다.
그런 전쟁영웅이 첩자인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 마른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위험…… 아니, 잠깐. 설마!?’
아몬 역시 자신을 ‘첩자’로 의심하고 있기에 ‘홍염의 마귀’와 대면시킨 것인가?
그 추측에 파이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젠장, 술에 만취한 척하면서 이런 수를 쓰다니! 가증스러운 놈!’
여전히 ‘카이가 첩자 놈이다, 놈을 단매에 쳐 죽이자!’며 테이블을 팡팡 두드리고 있는 아몬을 원망스레 노려보던 파이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렇게 된 마당이니 어쩔 수 없군.’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
황급히 자신의 양손을 포갠 파이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비비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삭-!
그와 동시에 파이스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캬! 대 아모니스 제국의 전쟁영웅인 마리온 럼덤 님을 못 알아볼 리 있겠습니까! 못 알아보면 눈알을 쏙 빼서 내다 버려야죠! 대전쟁 시절 마리온 럼덤 님께서 이룩하신 수많은 공훈이 있는데요! 촌구석 오스란 왕국 출신인 저 역시 수없이 접했을 정도의 위업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요! 캬아아!”
뇌를 살살 녹이는 것 같은 아부!
더구나 이미 술기운에 뇌가 반쯤 녹아 있던 마리온은 필사의 아부에 금세 인중을 축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러췌?”
“암, 그러믄요!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다니, 삼대에 걸칠 영광입니다요!”
“껄꺼르륵! 이거야 원! 이대의 영광으로만 해 두게!”
금세라도 마리온의 구두를 핥을 것처럼 저자세를 취하는 파이스를 본 아몬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부럽다!’
선대부터 황제 혈통에게 밉보여 출세라곤 할 수 없는 아몬의 질투!
부러움 섞인 눈빛을 하고 있는 아몬의 시선을 느낀 파이스가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어떠냐? 이렇게 넘어갈 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공훈을 세우면 저렇게 아부해 주는 사람 생기겠지?’
‘첩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파이스가 야비하게 웃는 와중,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마리온이 어깨동무를 걸어오며 술잔을 들이밀었다.
“껄껄껄! 자네 참 마음에 드는군! 자, 시원하게 들이켜게! 내가 사는 걸세!”
“……!”
술을 마시라고? 순간 파이스는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술값에 한번 술이 깼었고, 홍염의 마귀와의 대면에 술기운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분일 뿐이다.
이미 몸속에 들어온 알코올의 총량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그런데 또 마시라고? 한 모금만 더 마셔도 토할 것 같은데……?’
그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온은 싱글벙글 웃으며 직접 먹여 주겠다는 듯 술잔을 손수 입가로 들이밀어 줬다.
“겔겔겔겔! 자! 마시게! 어서!”
마리온 나름의 친근감의 표시였지만, 파이스는 내심 생각했다.
‘이 새끼들, 설마 내가 첩자인 걸 의심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아니다! 말했듯 친근감의 표시다!
그리고 두 중년인의 우호 표시에 까마득한 동생인 아몬이 분위기를 한껏 띄우기 위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아-! 원 샷을 못하면 혼인을 못해요~!”
‘이미 갔어, 이 새끼야! 고국에 아들딸도 둘씩 있다고!’
“뭐꼬! 술 마시는 사람 어↘데→갔↗노!”
구수하게 제국 지방 사투리까지 섞어 가며 술을 먹이려는 아몬의 행동에 파이스의 눈에서 불똥이 확 튀어 올랐다.
‘복귀할 때 내가 저 새끼는 반드시 죽이고 만다.’
파이스는 내심 아몬을 향해 칼을 갈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래도 체면을 봐서 한 모금 정도는 마실 수 있겠…….’
꿀꺽 한 모금 마신 순간.
독한 술, 독주(毒酒) 특유의 알콜향이 콧속 비강을 때리자 파이스의 몸은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일으켰다.
“푸그웨에에엣!”
“으아아악!”
아몬과 마리온은 혼비백산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 * *
쫓겨나듯 술집에서 나온 아몬과 마리온은 파이스를 부축하고 있었다.
“이, 이 사람아. 말을 하지 그랬나.”
아몬도 슬며시 거들었다.
“죄송합니다. 술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래. 정말 미안하네.”
아몬과 마리온의 연이은 사과에 울렁거리는 배 속을 다스리던 파이스가 중얼거렸다.
“괘, 괜찮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 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도리어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괜찮지 않다.
그들의 체면을 생각해 내뱉은 말이었다.
‘여기서 괜히 관계를 망칠 순 없다. 이럴 땐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여야지.’
속마음은 그들을 냅다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오랜 첩자 생활로 인해 여러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몬과 마리온은 그 겸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그래. 다음부터는 확실히 말하게나.”
“갑자기 토해서 깜짝 놀랐다고요.”
“휴우, 토한 거 치우느라 비싼 돈 주고 먹은 술이 다 깨 버렸구먼.”
“누가 아니래요? 그 술집, 장사 안 되는 곳이라 사장이 눈치를 엄청 줘서 우리가 다 치워야 했잖아요?”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구시렁거리자 파이스가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흐흐흐, 증믈 즈승흡느드.”
“괜찮네, 괜찮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으면 되지 뭐.”
“꼭 명심흐긌습느드.”
이윽고 아카데미 건물이 가까워지자 파이스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젠장,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군. 서둘러 쉬어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아카데미의 정문을 지나친 순간이었다.
“선배님!”
후다닥 달려오는 투실투실한 청년을 본 파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은……?’
분명 아까 아몬이라는 놈과 함께 있던 청년이었다.
‘그렇지, 나보다 조금 일찍 들어온 신입 교사가 있다고 했었지? 분명히 이름이 카이라고 했던가?’
그래, 카이.
조금 전 술집에서 아몬이 ‘첩자’라 목 놓아 부르짖던 녀석이 분명했다.
‘흐음, 첩자라…… 아무리 봐도 첩자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특유의 안목과 감이라는 게 생긴다.
파이스의 눈에 보이는 카이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상해 보이고 품격 있는, 소위 말하는 ‘고위층 자제’로 보였다.
‘후작가? 아니, 못 해도 공작가 자제쯤 되는 젊은이인가 본데…….’
그리 짐작한 파이스가 코웃음 쳤다.
‘뭐, 아까 술집에서 첩자니 뭐니 했던 건 농담이었겠지. 혹시 내분이 일어나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가능성은 접어 두는 게 좋겠…….’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응?’
돌연 양쪽에서 느껴지는 떨림!
그 사실에 흠칫하며 좌우를 바라본 파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인간들 갑자기 왜 이러는……?’
양쪽에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아몬과 마리온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미 들어간 알코올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파이스의 구토로 인해 깜짝 놀랐기에 술이 깬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 아몬과 마리온은 이미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마리온과 아몬의 떨림이 정점에 달했을 때.
마리온이 내동댕이치듯 파이스와 어깨동무를 풀며 카이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노오옴!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느닷없는 마리온의 일갈에 달려오던 카이가 흠칫하며 걸음을 늦췄다.
“어, 예?”
“이놈! 우리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영락없는 술주정이었지만, 황태자로서 황궁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란 카이로선 마리온의 날것 그대로의 술주정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파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 봐라……?’
정말 내분이 일어난다고?
그가 흥미진진함을 감추지 못하는 와중, 부들부들 떨던 아몬도 카이를 향해 술주정을 부리기 위해 파이스를 부축하고 있던 팔을 뿌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파이스가 슬그머니 아몬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
부우우우웅-!
돌연 지면이 빨려 들어오듯 눈앞으로 가까워지자 파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그것이 파이스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쩌어어억! 철푸덕-!
아몬이 뿌리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면에 곤두박질친 파이스가 사후경직을 일으키는 시체처럼 오그라들고.
술기운에 무심코 파이스를 땅에 박아 버린 아몬이 카이에게 손가락을 겨누는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몬도, 카이도, 마리온도, 경련을 일으키던 파이스도 굳어가는 와중.
한참 이어진 정적 끝에 아몬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X됐다…….”
* * *
정신을 차린 파이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흐어억! 비밀 기지는 동쪽……!”
흠칫하며 입을 다문 파이스가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여, 여긴 어디지?’
이윽고 머리맡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몬을 발견한 파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 갑자기 날 기습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몬이 자신을 전력으로 땅에 메다꽂은 것만은 기억한다.
물론 단순히 부축하던 팔을 풀다가 힘 조절을 잘못했을 뿐이지만, 파이스 입장에선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군. 내 신분을 눈치챈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으드득-!
손가락 관절을 푼 파이스가 아몬의 목을 향해 스르르 손을 뻗었다.
자신의 기술이라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몬의 경동맥을 손가락 두 개로 쥐어뜯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흐흐, 감시하는 주제에 졸기나 하다니. 나야 좋지. 그럼 잘 가라.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을 제거하고 서둘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군.’
음산하게 웃은 그가 아몬의 목덜미를 짚은 순간이었다.
오도독-!
돌연 자신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수수깡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에 파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어느새 아몬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닥쳐오는 무지막지한 격통.
“꺽……!?”
“응?”
“끄아아아아악!”
“으악!?”
파이스의 자지러지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깬 아몬이 부러진 손을 붙잡고 침대 위를 구르고 있는 파이스를 발견했다.
“아니, 이건 또 뭔!?”
“끄아악! 내 손! 내 소오오온!”
“자, 잠깐 기다리십쇼!”
아몬이 식은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아몬은 늘 그렇듯 숙련된 자세로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곤히 자다 불려 온 아나르엘은 피곤하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파이스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주고 있었다.
“아몬 선생님.”
“느에엣.”
“파이스 선생님이 아몬 선생님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니으엿…….”
“그럼 제가 뭘 잘못했나 봐요? 밤에 자는데 깨워서 치유 마법을 걸어 달라 하시더니 아침에도 이러시는 걸 보면요.”
“즈승흠느드!”
“에휴우…….”
한숨을 쉰 아나르엘이 손을 떼어 냈다.
워프 마법을 케이크 먹듯 손쉽게 쓰는 아나르엘이었기에 파이스의 박살 났던 손은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저, 파이스 선생님? 아몬 선생님이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릏습느드.”
“조용히 하세욧!”
아몬을 매섭게 꾸짖은 아나르엘이 파이스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아무튼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파이스 선생님.”
“…….”
“그러니 노여움은 푸시고요.”
파이스는 멍한 얼굴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신분이 들키진 않았나 보군.’
즉 이곳에 남아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는 뜻.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파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떨어트렸다.
“휴우우, 학교장님.”
“네, 네! 파이스 선생님! 아몬 선생님은 제가 단단히 혼내 둘…….”
“퇴사하겠습니다.”
파닥거리던 아나르엘의 귀가 축 늘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