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77)
아카데미가 망했다 77화
고문, 협박, 회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훈련받은 첩자라도 자신의 목숨은 아까운 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한 죽음이라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릴 수 있지만 어제 같은 ‘개죽음’은 첩자라도 사양이었다.
‘첩자도 사람이야, 사람!’
아몬과 함께 생활하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터!
그렇기에 파이스는 퇴직을 결심했고, 난데없는 퇴직 선언에 아나르엘은 얼굴이 새파래져선 파이스의 손을 붙잡았다.
“파, 파이스 선생님. 퇴사라뇨? 농담이시죠? 네? 네?”
아나르엘도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아몬! 슬로스! 마리온! 카이! 여러모로 쟁쟁하기 짝이 없는 교사진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오랫동안 교단에 섰다는 믿음직스러운 파이스를 쉬이 놓아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인 아나르엘의 목소리에 파이스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심입니다, 학교장님.”
“그, 그런…… 설마 아몬 선생님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려던 아몬은 다시금 지면에 자신의 머리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아나르엘의 물음에 파이스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퉁명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앗, 아아…….”
“저런 위험한 인간과 함께 있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네요.”
“위, 위험한 인간이라뇨! 어제는 아몬 선생님이 술에 좀 취해서 그렇지 평소에는 얼마나 점잖으신지이이…….”
아나르엘도 말하다 보니 양심이 찔리는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전적으로 아몬을 신뢰하긴 해도, 그가 점잖음과 거리가 멀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아나르엘의 필사적인 두둔에 파이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학교장님이라면 얌전한 호랑이가 있는 철창 안에 들어가라면, 들어가시겠습니까? 잠깐 한눈팔았다간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
아나르엘은 침묵했다.
하지만 여태 듣고만 있던 아몬이 벌떡 고개를 들더니 외쳤다.
“아니, 가만히 듣자 하니 너무하시네! 사람을 무슨 위험한 동물 취급…….”
“폭행으로 기사단에 신고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몬이 도로 머리에 땅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단숨에 아몬의 불만을 날려 버린 파이스가 말했다.
“그럼. 학교장님.”
“…….”
“퇴직 계약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싸늘하기 그지없는 파이스의 목소리에 아나르엘은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없이 자리를 떠난 그녀가 잠시 후 퇴직서를 가지고 왔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그럼…….”
거침없이 퇴직서를 작성해나가던 파이스가 움찔 깃펜을 멈췄다.
‘응?’
한참 퇴직서를 노려보던 파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학교장님.”
“뭐죠?”
이제 완전히 남이라는 생각에 아나르엘의 목소리는 다소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곧이어 파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계약 위반 위약금이 얼마입니까? 분명히 계약서를 쓸 때 그런 항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몬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맞아, 맞아. 지금은 위약금이 얼마예요?”
아몬도 발목을 단단히 붙잡혔던 바로 그 항목!
“음, 파이스 씨는 계약 직후에 퇴직 의사를 밝히셨으니…….”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르엘이 곧 액수를 말해 줬다.
그리고 액수를 들은 아몬이 질색을 했다.
“와, 엄청 올랐네요. 제가 계약서 쓸 땐 이거 절반도 안 됐던 것 같은데.”
“일단 아카데미가 공식적으로 부활하긴 했으니까요. 게다가 파이스 씨는 최소한의 근무 일수도 채우지 않았으니까요.”
“하긴…….”
아나르엘과 아몬이 쑥덕거리는 와중, 파이스의 얼굴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술값으로 얼마를 썼더라?’
가져온 공작금, 어제 술값으로 쓴 돈, 그리고 위약금.
그 세 가지를 빠르게 굴려 보던 파이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위, 위약금을 낼 공작금이 모자라잖아?’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퇴직할 수 없다고?’
첩자들의 오랜 친구인 야반도주가 있으니,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상대로 제시할 만한 위장 신분이 한정되어 있기에 무작정 남발할 수 없었다.
‘다행히 아주 많이 모자라지는 않다. 그렇다면…….’
위약금 건으로 소송을 걸어 볼까?
‘아냐, 아냐. 귀책사유는 누가 봐도 나한테 있다. 게다가 어떤 첩자가 미쳤다고 잠입한 상태에서 소송을 걸어? 신분이나 발각당하겠지.’
생각을 정리한 파이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학교장님?”
“뭔가요?”
“위약금을 조금 깎아주실 수 없는지…….”
아나르엘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여기가 무슨 시장 바닥인가요? 깎게?”
“…….”
“한 푼도! 절대! 못 깎아 줘요.”
귀를 꼿꼿하게 세우는 아나르엘!
이미 파이스를 향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그녀는 모처럼 철과 같은 굳건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 다 망해 가는 아카데미의 학교장 따위가 어디서…….’
내심 아나르엘도 단숨에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위약금을 확인한다는 빌미로 슬쩍 몸을 일으켰던 아몬이 무릎 꿇은 채 여길 빤히 보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니, 잠깐만.’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아몬과 눈이 마주친 파이스는 소름이 쭉 돋았다.
‘이, 이 자식 설마 일부러 내가 위약금을 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술을 그만큼이나 퍼마셨던 건가?’
술값 때문에 공작금이 아슬아슬하게 위약금을 못 낼 만큼만 남았다.
‘즉 내가 지닌 공작금의 액수마저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설마…….’
자신이 첩자라는 사실은 진작 파악했고, 그 속내를 알기 위해 이 아카데미에 계속 붙잡아 두려는 것이 아닐까?
‘이, 이 가증스러운 놈이……!’
한편 아몬은 파이스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쌍해라. 위약금을 못 내서 이 지옥 마경에서 도망칠 수 없다니.’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파이스를 향한 동질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드는 아몬을 본 파이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 무서운 놈.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간계를 지녔다니…….’
‘근데 너무 오래 꿇고 앉아 있었더니 슬슬 다리가 저리네.’
‘위험한 놈이다. 장차 우리 왕국에 위협이 되겠어!’
‘그래, 은근슬쩍 일 이야기로 넘어가자.’
파이스의 눈치를 살피던 아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퇴직하실 겁니까?”
“으, 응?”
“하실 거면 슬슬 일어나 보고, 안 하실 거면 일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요.”
“…….”
파이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못하지! 네놈이 내 공작금을 탕진했는데!’
분했지만,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한 파이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안타깝게도 위약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는군요.”
“그런가요!?”
활짝 웃은 아나르엘이 도로 퇴직서를 뺏어 갔다.
“그럼 이렇게 된 김에 당분간은 우리 아카데미에서 근무하시죠!”
“하.하.하. 그래야죠.”
아몬도 저린 다리를 부여잡은 채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무슨 과목을 맡으시려고요?”
“……일단 마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은 소화 가능합니다. 고등 교육 과정은 조금 힘들지만요.”
첩자로서 여러 분야에 대해 교육받았기에 당연한 일.
아몬이 아나르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과학 과목이 좋겠죠?”
“힛! 귀 간지러워요!”
“거참 좀, 들어 보십쇼. 카이가 곧 정식으로 수학 과목을 맡을 거고, 파이스 선생님이 과학 과목을 맡아 주면 슬슬 우리 아카데미도 기본 교육 과정은 전부 갖추는 거잖아요?”
“그, 그렇죠?”
아나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교육부가 지정한 기본 과목은 검술, 마법, 역사, 수학, 과학.
이외에도 여러 과목이 있지만, 일단 ‘필수’ 과목은 앞서 말한 다섯 개였다.
“그러니까 슬슬 우리 아카데미도 본격적으로 운영금을 써서 신입생 입학 홍보 전단을 뿌려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기본 과목이 갖춰진 아카데미만 홍보 전단을 뿌릴 수 있죠.”
“맞습니다. 여기저기 연줄 써서 학생들도 끌어모으고…….”
감언이설에 아나르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신입생들…….”
“예, 예. 지나간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영광을 되찾는 겁니다.”
“과거의 영광…….”
“생각해 보십시오. 단상 위에 선 우뚝 선 학교장님. 그런 학교장님을 바라보는 수많은 학생들!”
아나르엘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 광경을 상상하는 모양인지, 감격으로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녀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영명하신 판단입니다, 학교장님!”
이로써 아카데미는 빠른 속도로 부흥할 것이다.
‘그럼 입학한 드래곤님도 흡족해하실 거고, 내 동생도 졸업장만 따 두면 어디 가서 밥 굶을 일은 없겠지!’
모처럼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아몬이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걱정되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다만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파이스 선생님이 위약금만 마련되면 여기서 도망칠지도 몰라. 그러니 실수를 만회하자. 파이스 선생님이 이곳을 떠날 마음을 먹지 않도록 아카데미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량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아몬이 파이스를 바라봤다.
파이스를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접하는 당사자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저 음흉한 웃음! 분명 방금 학교장과 귓속말로 내 처우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야.’
‘오오, 파이스 선생님도 웃어 준다, 웃어 줘.’
‘내 목숨을 쥔 놈에게 잘 보이려 억지로 웃어야 하다니. 이런 굴욕이…….’
아무튼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아나르엘과 아몬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파이스 선생님, 저희는 슬슬 일어나 볼게요! 푹 쉬세요!”
“파이스 선생님! 또 뵙겠습니다!”
아몬과 아나르엘은 아카데미 홍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빠르게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홀로 남은 파이스는 조용히 베개를 얼굴 위로 덮었다.
사나이의 눈물은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법이다!
“……크흑!”
곧이어 파이스의 얼굴을 덮은 베갯잇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이스는 긍정적인 사내였다.
어쩌면 한바탕 울고 나니 기분이 조금 풀린 것일지도 모른다.
‘……휴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위약금까지 남은 액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한두 달만 일하면 채울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자.’
그리고 그 한두 달은 자신이 이곳에 잠입한 본연의 목적을 위해 쓸 것이다.
‘지금은 비록 쇠퇴한 아모니스 아카데미라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정보가 몇 가지는 있겠지.’
결국 긍정적으로 보자면 시작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근데 속이 왜 이렇게 쓰리지?’
어제 마신 술 때문은 아니리라!
아무튼 감정도 무사히 추슬렀겠다. 방에서 나온 파이스는 웬 청년과 마주칠 수 있었다.
“오오, 안녕하십니까. 파이스 선생님.”
“아, 반갑습니다. 카이 선생님.”
“하하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저보다 훨씬 연장자신데요.”
호탕하게 웃는 카이의 턱살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앓아누운 황제 대신 국정을 보느라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폭식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파이스는 힘차게 흔들리는 카이의 턱살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다른 교사들은 첩자라 의심하고 있었지?’
즉 동업자이며, 라이벌인 셈이었다.
그리 생각한 파이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젊다. 정말 첩자라면, 아직 미숙한 녀석일 터.’
그리 생각한 파이스가 카이를 향해 슬그머니 말했다.
“저어, 카이 선생님?”
“예?”
파이스가 슬그머니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실례지만, 어디 출신입니까?”
마른델 왕국의 첩자 파이스가 ‘제국의 황태자’를 상대로 제국의 정보를 캐내기 위한 첫발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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