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86)
아카데미가 망했다 86화
아몬은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리치.’
리치 단 한 구로서의 위험성은 실력 좋은 흑마법사 수준이지만, 리치의 진면목은 ‘사령술’에 있었다.
때문에 리치가 나타났다면 놈이 사령술을 사용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었다.
사령술로 인한 망자의 군대만 없다면 리치는 ‘실력 좋은 흑마법사’에 불과하고, 당연히 리치를 토벌할 가능성이 현격히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리치는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한때는 인간이었던 흑마법사다.’
더 강한 마법을 추구하며 흑마법에 빠져들었다가 ‘금기’를 건드린 인간의 말로가 바로 리치인 것이다.
‘사악, 위험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어지간한 군대라도 쉽게 해치울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리치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굳은 믿음을 간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리치가 손쉽게 당할 리가 없지. 게다가 사악, 위험 그 자체인 리치가 앞서 있었던 허무맹랑한 일처럼 해결될 일도 없을 거고!’
리치를 향한 신뢰!
이번에야말로 ‘바바란 마을을 점령한 리치’를 퇴치하고 부와 명성을 한 손 가득 거머쥘 수 있으리라!
“자, 아미! 라스티아넬! 가자! 우리들의 모험은 지금부터야!”
아몬의 뒤편에 쓰러진 채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던 아미와 라스티아넬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와아아…….”
* * *
야트막한 언덕에 우뚝 서 있는 노년의 여인이 검집에 검을 꽂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시시했구나. 리치가 나타났다기에 황급히 달려왔더니.”
그런 여인의 발밑에는 흑색의 해골 한 구가 흩어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바바란 마을을 점령한 리치가 쓰러진 것이다.
언덕 아래에서 주변을 살펴보던 젊은 여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할머님 정도의 기사에게 리치 따위가 대수일까요? 아크 리치가 아니고서야,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후후, 너도 아부가 꽤 늘었구나.”
“사실인걸요.”
젊은 여인, 손녀의 말에 ‘디아나 펜도리안’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국의 4대 기사 중 하나, 그랜드소드 마스터.
마침 근처를 지나던 디아나가 바바란 마을의 참사를 전해 듣고 이곳으로 와 리치를 퇴치한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주변을 둘러보던 디아나의 손녀, 피오라 펜도리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할머님, 누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어요.”
“응? 그렇구나. 누구일까?”
“혹시 이 마을을 떠나 있던 생존자가 아닐까요? 기척을 보니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것 같아요.”
멀찍이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던 피오라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의 생존자가 맞는 것 같아요. 힘없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어요.”
“저런, 상심이 크겠구나. 이를 어쩐다.”
탄식을 내뱉은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피오라의 말대로 젊은 사내로 보이는 인물이 비틀거리면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더구나 얼마나 슬펐는지, 털썩 무릎을 꿇은 사내가 땅을 치며 오열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 광경에 마음씨 고운 디아나와 피오라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쯧쯧, 참으로 딱한 청년이구나.”
“그러게요. 어떻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휴, 안 되겠구나.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저 청년이 다른 마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여비라도 조금 쥐어 줘야겠…….”
말을 잇던 디아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멀찍이서 오열하는 청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다 보니, 상당히 낯익은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잠깐! 저 청년은!?’
디아나가 눈을 부릅떴다.
청년이 누군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 * *
아몬은 땅을 치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럴 순 없어!”
바바란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리치!
무려 ‘난이도 불명’에 달하는, 해결만 하면 막대한 보상과 명예가 따라올 게 분명한 의뢰!
그렇기에 청운의 꿈을 품에 안은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바바란 마을까지 달려왔건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호밀밭처럼 깔려 있는 언데드의 사체들이었다.
더군다나 저 멀리 언덕에 서 있는 사람의 발밑에서 시커먼 해골 한 구가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리치는 진즉 뒈졌다는 뜻이다!
‘리치잖아! 그 이름도 대단한 리치잖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퇴치당한다고?’
자신이 한 발 늦은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바바란 마을을 첫 번째 행선지로 잡았을 텐데, 하고 아몬이 땅을 치며 후회하는 와중이었다.
“어머나, 이게 누구냐?”
“……!”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몬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 서 있던 누군가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디아나 펜도리안.’
자신을 제자로 삼으려고 혈안이 되어서 깝치더니만, 황제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제국의 적을 베고 와야만 제자로 들일 수 있다’며 단숨에 내쳐 버린 인물!
그 과정에서 검 한 자루도 줬다 뺏었으니 감정이 고우래야 고울 수 없는 상대였다.
“디아나 펜도리안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자연스레 나온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마을에 참변이 일어났다기에 서둘러 와 봤단다.”
“……저도 같은 이유로 왔는데, 한발 늦었군요.”
리치를 퇴치하러 왔다는 아몬의 말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이 녀석 설마?’
자신이 말했던 ‘제국의 적’을 베라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이행하려 하고 있었던 것일까?
확실히 리치쯤 되는 존재라면 제국의 적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만약 정말로 리치를 퇴치했다면, 그걸 구실로 제자로 들이더라도 황제 폐하께 무어라 말할 명분이 생겼을 텐데…… 아쉽구나.’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는 디아나를 본 아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웃나? 갑자기 혀를 차네?’
아몬이 고개를 떨어트린 채 불만을 삭이는 와중, 생각에 잠겨 있던 디아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저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언데드로 시름을 앓고 있는 영지가 하나 있단다. 그곳에 가 볼 생각은 없느냐?”
정말로 아몬이 제국의 적을 해치우고 자신의 제자가 될 작정이라면, 이 또한 ‘제국의 적’과 다름없는 존재이니 기뻐하며 그곳으로 향할 터!
그런 생각으로 던진 말에 아몬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녀왔습니다.”
“저, 정말이니?”
“예. 알고 보니 그곳의 영지민들이 흑마법사를 착취하고 있었고, 병사와 기사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체포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죠.”
“…….”
한창 이 근처를 유랑 중이었던 디아나인지라 그런 최신 소식까진 미처 접하지 못한 것이다.
“그, 그럼 저쪽으로 가면 보그 산맥이라고 있는데…….”
“친제국 오거 부족이더군요. 그들은 제국과의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
디아나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 외엔 ‘제국의 적’이라고 할 법한 안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어쩐다. 이 아이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동분서주하고 있건만, 스승 될 자라는 작자가 방해를 해 버린 셈이니…….’
죄책감에 디아나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휴, 미안하구나.”
“하.하.하. 디아나 님께서 미안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 발이 느린 게 잘못이지요. 암, 그렇고말고요.”
비꼼이 다분한 말이었지만, 디아나는 그것을 달리 해석했다.
‘내 실책인 상황이건만 애써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다니. 역시 성품이 훌륭하군.’
제자 될 자의 따스한 마음씨에 감탄한 디아나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떡한다? 역시 이 아이를 어떻게든 제자로 들이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황제 폐하께서는 이 아이를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는 것 같지만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다.’
그렇다고 또 다른 ‘제국의 적’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랑 중 대충 상황을 들어 보니, 제국의 전력에 생긴 공백을 틈타 일어나 발생한 던전과 몬스터 사태에 수많은 모험가들이 때 아닌 호황에 기뻐하며 대륙 각지를 들쑤시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마당에 한발 늦게 새로운 사건으로 향한다 한들, 괜한 마찰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애초에 아몬이 접한 오거 군집 건, 언데드 마굴 건, 리치 건은 그런 모험가들이 언감생심 손도 댈 수 없었기에 차례가 돌아온 것에 불과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디아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디아나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피오라! 이리 와 보거라!”
디아나의 부름에 멀찍이서 바바란 마을의 참상을 안타깝다는 듯이 둘러보던 피오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할머니?”
“그래. 소개해 주마. 이 아이는 아몬 드레이크란다.”
예전에 아몬을 제자로 삼으려 할 때 혼담을 주선해 주겠다던 손녀딸이 바로 피오라였다.
마침 손녀와 나들이 삼아 대륙을 유랑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기다니!
디아나가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몬, 이 아이는 내 손녀딸인 피오라 펜도리안이라 한단다.”
아몬도 그녀가 예전에 제자가 되면 혼담 어쩌고 했던 여인이라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딴 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반갑슴다. 아몬 드레이크임다.”
때문에 아몬의 반응은 퉁명스러웠지만, 디아나는 그것을 또 달리 해석했다.
‘녀석! 수줍어하기는!’
그러니만큼 디아나는 자신이 이 상황을 주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당장 제자로 삼겠다는 계획도 어그러졌고, 황제의 눈치 때문에라도 아몬과 피오라의 혼담을 강행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밀가루가 익어 빵이 된 상황이라면 황제 폐하께서도 뭐라 말씀하실 수 없을 테지.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은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피오라, 이 청년이 내가 예전에 말한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교사란다.”
난데없는 디아나의 말에 피오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데요, 할머니?’
제자로 삼겠다는 계획이 어그러졌고, 혼담 자체도 물 건너갔으니 디아나가 피오라에게 아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명문 귀족인 펜도리안 가문의 여식, 피오라는 귀족 특유의 예절에 능숙했기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할머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몬 공자님.”
예의 바른 피오라의 말에 아몬은 생각했다.
‘내 욕을 많이도 들었나 보군.’
몇 번이고 눈 뜨고 뒤통수를 맞아왔던 아몬의 무시무시한 피해의식!
아몬이 썩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피오라 아가씨.”
딱딱한 아몬의 인사에 디아나는 ‘아직 수줍어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얼른 말을 이었다.
“한데 아몬, 요즘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상황은 좀 어떠냐?”
“아카데미 사정이야 늘 그렇고 그렇죠. 한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후후, 다름이 아니라…….”
디아나가 피오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최근 이 아이가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것 같더구나. 그러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 아이를 아모니스 아카데미의 교사로 써 줄 수 없겠느냐?”
일절 언질도 듣지 못한 취직 청탁에 피오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할머니? 그게 무슨……!’
그때 아몬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호오, 그럼 드디어 교사가 다섯이 되는 건가?’
망할 첩자놈, 파이스가 쫓겨난 바람에 이룰 수 없었던 꿈!
정규 교사가 다섯이 되면 시행할 수 있는 아카데미의 본격적인 홍보!
아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고, 디아나는 그 미소를 보며 또 단단히 착각했다.
‘녀석! 내 손녀딸과 같이 일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라하기는!’
‘이제야 내 동생과 드래곤님에게 면목이 서겠군!’
‘저렇게 좋아하는 꼴을 보니 증손자를 보는 건 조만간이겠구나! 그럼 당연히 아몬 저 아이도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될 테니, 내 제자로 들이는 것도 간단하겠지!’
두 사람이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다.
“할머님.”
“응? 왜 그러느냐, 피오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피오라가 쌩하니 몸을 돌려 떠나고, 그 광경에 디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피, 피오라야!”
“놓으세요. 집에 갈 거예요.”
“자, 잠깐 이야기나 좀 들어 보려무나!”
“듣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 정말 미워요.”
할머니, 정말 미워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손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디아나가 털썩 주저앉고, 멀어지는 피오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몬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카데미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지. 이젠 실망도 안 해.’
아몬의 한숨은 날이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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