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92)
아카데미가 망했다 92화
아몬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장점은 ‘적응력’이었다.
영지에서 나오기 전까진 몰랐지만, 그가 가진 완력이 대단하다는 건 그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까놓고 아카데미의 역사학 교사가 힘을 쓸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엔 좀 많이 쓴 것 같지만.’
뭐, 아무튼 아몬의 적응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둥뿌리가 다 빠진 아카데미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겠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슬금슬금 아카데미의 숨통이 살아나자 이곳을 부흥시키겠다는 생각까지.
또한 절망적인 수준의 동료들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걸 감안하면, 극한의 오지에 떨어트려놔도 그곳의 원주민들과 적당히 화합하며 살아갈 위인이었다.
하지만 적응하는 건 적응하는 거고, 힘든 건 힘든 거다.
“크흡……!”
간신히 눈물을 참은 아몬의 뒤에는 피오라가 삐딱하게 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신입답게 아몬의 수업을 참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연신 뒤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쿠우욱! 큼큼.”
“……그래서, 지난번에 말했듯 용사 그레고리는.”
“커억! 크르륵!”
“시, 신검 누카엘을 뽑았는데 누카엘의 전승에 의하면…….”
그나마 다행인 건 가래만 끌어 올릴 뿐 땅에 뱉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모아 뒀다가 내 얼굴에 뱉으려는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상상을 하며 아몬이 치를 떠는 와중, 피오라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명문가 다운 교육과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에 피오라는 가래를 뱉는다거나 하는 천박한 행동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아, 면접 땐 예외다!
아무튼 지금도 생목만 긁고 있는 것이다.
‘목 아파! 책에서 보면 건달들은 항상 이러던데, 목은 괜찮은 걸까?’
울상을 짓고 있던 피오라가 화들짝 놀라며 표정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아몬이 문득 뒤를 돌아본 것이다.
“저, 피오라 선생님.”
“크르륵! 뭐요?”
“수업 중이니까, 조금 자제해 주셨으면…….”
“커르르륵! 그럼 그냥 뱉을까요?”
“아뇨…….”
아몬이 도로 고개를 돌렸다.
“크흡!”
명문가를 등에 업고 있는 망나니의 행태 때문에 몰려오는 서러움!
피오라도 아몬이 고개를 돌리자 촉촉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크르릅!”
명문 펜도리안 가문의 영애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아몬은 신경 진정에 효과가 좋은 캐모마일 찻잎이 들어 있는 티백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린 것이다.
“야, 너 뭐 해? 왜 티백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어?”
“……슬로스 선배님.”
한창 검술 수련을 하던 와중이었는지,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며 다가온 슬로스를 본 아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광경에 슬로스가 흠칫했지만, 아몬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슬로스 선배.”
“으, 응?”
“새삼 선배가 피드 후작가라는 명문에 걸맞은 귀족 영애라는 사실을, 이렇게 뒤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뭐……?”
슬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지?’
하지만 들려온 것은 칭찬이요, 칭찬은 게으름뱅이도 춤추게 한다.
“흐흥, 그걸 이제야 알았어?”
“죄송합니다. 선배님의 명문 귀족다운 기품, 자애로운 마음씨를 몰라봤던 제 눈이 옹이구멍이죠. 아뇨, 옹이구멍이 뭡니까. 눈이 없었네요, 없었어.”
“흐흐흥! 그렇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이런 저를 용서해 주시렵니까?”
“그래에, 용서해 줄게.”
“역시 명문 귀족, 피드 후작가의 영애이신 슬로스 피드 아가씨…….”
아몬이 신들린 듯 자신을 칭송하자 슬로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녀석이 갑자기 이러는 걸 보니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던 슬로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하지만, 돈은 못 빌려준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갑자기 왜 이러는데? 부담스럽게.”
“크흡!”
갑자기 아몬이 오열하자 슬로스는 흠칫 놀랐다.
“스, 슬로스 선배.”
“왜, 왜?”
“어제 들어온 신입 있잖습니까.”
“신입?”
슬로스가 문득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수업 시간에 웬 여인이 신입이라며 들어오긴 했었다.
‘크르릅! 신입인 피오라입니다.’
‘어. 그래.’
‘……제, 제가 뭘 하면 되죠?’
‘신입이면 그냥 수업하는 거 보면 돼.’
‘네, 넵.’
기억을 더듬던 슬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이상한 거 없어 보였는데? 얌전히 수업만 구경하던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슬로스의 무관심한 대응에 피오라는 ‘대충 해도 되려나?’싶은 마음에 컨셉질을 자제한 것이다!
나태가 몸에 밴 슬로스가 의도치 않게 피오라의 마음을 지켜 준 것이다.
하지만 아몬은 이상하지 않다는 슬로스의 반응에 역정을 냈다.
“이상한 게 없어 보였다고요!? 시도 때도 없이 큼큼거리면서 가래나 뱉으려고 하고, 수업 시간 내내 뒤에서 담배 피고 싶다고 투덜투덜, 이딴 짓을 대체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주절주절!”
“뭐? 정말로?”
“예! 그딴 개망나니가 무슨 교사라고…….”
교사라는 직업에 자긍심을 지니고 있는 아몬이었다.
그러나 그 자긍심이 피오라라는 악적으로 인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근데 네 성격에 그걸 가만히 내버려 뒀어? 한 대 안 쥐어박고?”
그 지적에 아몬이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펜도리안 가문 출신이래요.”
“……펜도리안? 그 펜도리안 공작 가문?”
“예. 대명문가, 펜도리안.”
슬로스의 얼굴이 굳었다.
피드 후작가도 명문가지만, 펜도리안 공작 가문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제국 7대 황제의 심복으로 시작해 대대로 아모니스 황가를 섬겨 온 곳이 펜도리안 가문이다.
피드 후작가 역시 꽤 긴 세월 황가를 섬겨 왔지만, 펜도리안 가문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 세월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 가문이 명문이라 불리게 된 건 아버지가 제국 4대 기사로 임명되고 난 이후지.’
즉 대대로 명문가였던 펜도리안 공작가보단 수준이 뒤떨어진다.
멋쩍게 한숨을 쉰 슬로스가 말했다.
“너도 펜도리안 가문 사람을 건드리긴 무섭구나.”
“……제 목은 보시다시피 하나거든요.”
“난 잘만 건드렸으면서.”
어감이 이상한데요, 하고 중얼거린 아몬이 말을 이었다.
“그분 할머님을 뵌 적 있거든요.”
“설마 디아나 펜도리안?”
“예. 그분이랑 면식이 있는데, 그분이 그 망나니를 손녀딸, 손녀딸 하면서 예뻐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손 한번 잘못 놀렸다가는, 디아나 님이 칼춤을 추면서 저를 아몬 육회로 만들 걸요.”
“……그, 그렇겠네.”
만약 아버지인 바티스타도 아몬이 슬로스에게 일삼는 무례를 알게 된다면, 그날 피드 후작가의 저녁 메뉴는 아몬 통구이로 정해질 게 분명했다.
“쳇, 디아나 님 앞에선 내숭 엄청 떨던데, 근데 선배님은 그 사람 누군지 모릅니까? 같은 명문가잖아요. 명문가는 시도 때도 없이 파티 열고, 사교장에 들락거리고…… 하긴, 슬로스 선배님이시지.”
게으른 슬로스가 그런 곳에 갈 리가 없잖은가!
아몬이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짓는 게 화났지만, 그 결론이 옳기에 뭐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분했다.
“에휴, 그러니까 칭얼칭얼…….”
“…….”
“중얼중얼, 개망나니, 이게 다 가정 교육이 주절주절!”
“…….”
연신 불만을 토하는 아몬을 바라보던 슬로스는 생각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슬로스의 눈동자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 * *
이튿날, 검술 수업.
피오라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이제 좀 진정이 되네.’
어제 모든 수업에 참관해 본 결과, 자신이 망나니짓을 일삼는다는 사실을 아는 교사는 아몬 하나뿐이다.
다행히 아몬이 다른 교사들에게 소문을 내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람 앞에서만 행동을 조심하면 될 거야.’
열심히 망나니 흉내를 내야 하는 걸 조심한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피오라는 검술 수업이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피드 후작 가문의 슬로스. 검술 명가 사람답게 매사에 초연하고 타인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니까 그 사람 앞에서는 조금 긴장을 풀어도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연무장으로 들어간 피오라는 흠칫하고 말았다.
어제 본 슬로스와 달리, 침낭을 완전히 탈피한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슬로스의 진심 모드였다.
“……어, 어?”
“슬로스 피드입니다. 어제 뵀었죠?”
“그, 그렇습니다.”
“펜도리안 가문의 영애시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피오라가 흠칫했다.
‘어, 어제 일부러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안 거지?’
상대가 피드 가문 출신인 이상, 펜도리안 가문의 이름에 더 이상 먹칠을 할 순 없었기에 일부러 성은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머지않아 밝혀질 테지만,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찌 하루 만에 자신의 가문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 의문은 곧 밝혀졌다.
“아몬이 말하길…….”
‘그 망할 인간이 말했구나!’
“성격이 상당히 거치시다고 들었습니다.”
‘망나니라는 것도 다 일러바쳤구나!’
피오라는 내심 울상을 지었지만, 금세 자신의 콘셉트에 집중했다.
다 까발려진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비호감스러운 면모를, 교사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다른 교사들에게 각인시켜 두면 이곳에서 쫓겨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커어어억! 퉤! 그런데요.”
“음.”
“카아악! 퉤엣! 무슨 문제라도 있슴까?”
“흠.”
피오라는 나오지도 않는 가래를 생목을 쥐어짜 뱉어댔다.
‘슬슬 이쯤하면 침 좀 그만 뱉으라고 해 주세요!’
하지만 이곳은 연무장의 흙바닥!
침을 뱉건 토를 하건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피오라가 굳어 있는 와중, 애써 껄렁거리는 피오라를 유심히 살펴보던 슬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네요.”
‘뭣!?’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든단 말인가!
반항 심리 탓일까, 피오라는 한층 더 콘셉트에 몰입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슬로스는 피오라의 필사적인 ‘흉흉한 얼굴’을 보고도 꿈쩍 않았다.
‘치와와 같네.’
슬로스는 오빠인 랜슬로가 ‘오거보다 문명화가 덜된 인간’이라 평가한 여섯째 오빠의 얼굴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평온한 슬로스의 반응에 피오라의 얼굴이 발갛게 붉어지고, 피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슬로스가 말했다.
“아무튼 반가워요. 앞으로 열심히 해 봐요.”
“여, 열심히 하긴 개애~ 뿔.”
“네, 네.”
슬로스가 다시 벤치로 돌아가 앉자 피오라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 큰일 났다. 저 사람도 나를 망나니라고 알고 있는 거야?’
슬로스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망나니지만 펜도리안 가문 출신이니까 잘 보여 두는 게 좋겠지? 게다가 한동안은 유심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이제 검술 수업에서도 매일 이렇게 굴어야 하는 거야?’
‘그래도 내 첫 인상은 좋았겠지? 뭐, 내가 첫 인상이 나쁘진 않으니까! 괜히 마음에 든다면서 안 하던 아부까지 떨어 놨으니 말이야.’
‘아몬, 슬로스. 이 두 사람…… 기억해 두겠어.’
피오라는 내심 눈물을 흘렸고, 슬로스는 인맥을 쌓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피오라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내 신세야…….’
슬로스는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 손바닥을 비벼 댔다.
‘역시 피오라 펜도리안 님, 거친 모습이 너무 어울리십니다.’
‘크, 크르릅! 퉤! 커억!’
‘담배도 피신다 들었는데, 한 대 피시죠. 수업 중이니 저쪽 구석으로 가셔야겠지만요. 네, 여기 불이요!’
‘고, 고맙…… 콜록! 쿨러어어억!’
여태 아몬을 지켜보며 체득한 아부의 정석!
슬로스 딴에는 대명문가 펜도리안 가문의 영애와 친분을 쌓아 보겠다고 질척거리는 것이다.
귀찮음이 도를 넘는 그녀가 이렇게 인맥 관리에 힘을 쏟는다는 건, 펜도리안 가문의 명성과 입지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휴우. 그래도 검술 수업 끝. 그럼 이제 마법 수업인데…….’
마법 과목의 교사는 마리온 럼덤.
전쟁영웅으로, 홍염의 마귀라는 이명은 피오라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서로 면식이 있는 건 아니었고, 어제도 자신의 이름만 알려 줬더니 ‘그렇구만! 반갑네!’하며 자신이 펜도리안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까진 모르는 듯했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 왜 주정뱅이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별 관심은 없겠지?’
그리 생각한 피오라가 마법 수업이 있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술을 퍼마시던 마리온이 피오라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이게 누구신가! 펜도리안 가문의 개망나니가 아니신가!”
피오라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몬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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