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94)
아카데미가 망했다 94화
아나르엘은 깍지 낀 손 너머로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끔씩 보여 주는 모습으로, 좋게 말하면 진지한 표정이며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이 무게나 잡는 표정이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군요.”
무게를 잔뜩 잡는 아나르엘의 목소리에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 아몬은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손톱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톱을 너무 짧게 깎았더니 느낌이 어색했다!
그 무반응에 아나르엘은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했다.
“드디어 올 게 왔군요.”
“…….”
“드디어 올 게, 아몬 선생님?”
“뭐요.”
“혹시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제가 꼭 반응을 해 드려야 하는 말이었습니까?”
퉁명스러운 아몬의 반응에 아나르엘은 울상을 지었다.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죽어! 죽어어! 당신 때문에!’
‘켁! 이, 이 개망나니가 진짜 미쳤나! 에라, 모르겠다! 펜도리안 가문이고 뭐고 너만 죽고 나는 살자!’
‘뭣! 내가 먼저 죽일 거야!’
‘크아아악!’
‘끼아아아악!’
피오라와의 화끈한 투쟁!
그런 일이 있었기에 아몬은 아나르엘에게 피오라의 해임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아나르엘은 어떤 부분에선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다운 엘프다.
‘펜도리안 공작 전하께서 직접 연락하셔서 피오라 아가씨를 맡겼어요.’
‘그래서 안 자르시겠다고요?’
‘못 자르는 거죠.’
그 결과 심술이 나도 단단히 난 아몬은 파업을 시행했다.
물론 학생들을 위한 수업은 꼬박꼬박 나갔고, 서류 작업 등의 정규 업무를 방치했다!
그 바람에 아몬의 업무를 떠맡은 카이만 고생이었다.
물론 황태자로서의 공무를 처리하는데 익숙한 카이였기에 말만 힘들다고 할뿐, 실제론 여유로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왜 부르셨는데요? 저는 파업하느라 바쁜데요.”
“……오, 올 게 왔다고요.”
“오긴 뭘 자꾸 옵니까.”
한숨을 쉰 아몬이 짧게 깎은 손톱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카데미 홍보 전단이요? 발주 넣어 놓으셨다고 카이가 말해 주던데요.”
“네, 완성만 되면 전단을 뿌릴 거예요. 그럼 본격적인 아카데미의 부흥이 시작되는 거죠.”
“……학교장님.”
“말씀하세요.”
“제가 냉정히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고개를 모로 꺾은 아몬이 말했다.
“제가 학생이라면, 이 아카데미 안 옵니다.”
“엑.”
“교사진이 이 모양인데요, 뭘.”
아나르엘이 즉각 반박했다.
“우리 교사진이 뭐 어때서요! 하나같이 훌륭하고 좋은 분들이신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는 말도 아니었다.
“다들 간판만 그럴싸하죠.”
“…….”
“마리온 럼덤! 전쟁영웅!”
아몬이 말을 이었다.
“주정뱅이죠.”
“…….”
“슬로스 피드! 피드 후작가의 영애! 침낭 인간이죠.”
“또 누가 있냐, 아몬 드레이크! 망나니한테 맨손 싸움으로 밀리다가 결국 개같이 패배한…….”
“그만, 그만!”
냉소적이다 못해 비관적이며, 자조까지 담겨 있는 아몬의 호소에 손을 휘저은 아나르엘이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돈주머니였다.
“임시 보너스예요.”
“허 참 나!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금화를 조금 넣었어요.”
“허 참 나! 그 생각은 옳습니다.”
어쩐지 주머니가 작더라.
날름 돈주머니를 챙긴 아몬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보다 못한 아나르엘이 최후의 수단으로 피 같은 돈까지 내밀었으니 시위는 이쯤하면 됐겠지.
“그래서 진짜 왜 부르신 겁니까? 홍보 전단 발주 넣었으니 전단지나 돌리라고 부르시진 않았을 거고요.”
“맞아요. 발주를 넣은 홍보 전단이 도착하기까지 한 주는 걸릴 거예요.”
“꽤 걸리는군요. 하긴, 지난번엔 웃돈까지 줘서 다른 일정을 모두 미루고 받아서 그런 건가.”
“맞아요.”
근데 진짜 전단지 돌리라고 시킬 생각일까?
아나르엘이 말을 이었다.
“즉 한 주 정도의 시간, 그 안에 남은 일정을 모두 해결해야 해요.”
“한 주 안에. 남은 일정.”
되새기듯 들은 말을 중얼거린 아몬이 생각했다.
‘우선 남은 일정 중 하나는 정규 테스트. 여름방학이 끝났으니 슬슬 치를 때가 되긴 했지.’
제국 교육부가 지정한 지침을 따르는 정규적인 테스트다.
1학년 1학기 때 충분한 배움과 가르침이 있었는지를 점검하고 2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
‘그래서인지 시기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 그래도 1학년 때는 학생이 아카데미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느슨한 분위기로 풀어 주니까, 안 될 건 없지.’
아무튼 학생 전원이 1학년이니, 테스트는 ‘마법사 길드 환영 던전’을 협동으로 클리어하는 것이리라.
‘마침 최대 인원이 다섯이니 딱 맞네. 사실 그 던전은 진작 클리어했으니까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지만, 교육부의 지침이고, 우리도 증거는 필요하니 어쩔 수 없지.’
뭐, 지금 학생들의 수준을 감안하면 각자 혼자서 들어가도 던전을 깨부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일정이 현장 체험 학습…… 이라고 쓰고 소풍이라 읽지.’
분기마다 있는 그놈이다.
지난번에는 아몬네인 드레이크 영지로 갔었고.
‘가서 신나게 감자밭 보수만 했던 것 같지만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 일정.’
아카데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축제’다.
하지만 교사 다섯, 학생 다섯인 시점에서 제대로 된 축제를 열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럼 축제는 빼고, 일정 두 개를 소화해야 하나?’
아몬은 두 개의 일정 중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을 결정했다.
“그럼 가장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겠군요.”
“그래요!”
“테스트…….”
“당연히 현장 체험 학습부터 해야죠!”
“…….”
아나르엘이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테스트는 급할 것 없잖아요?”
“…….”
“듣자 하니, 어차피 마법사 길드의 환영 던전은 학생들 하나하나가 클리어할 수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죠.”
맞는 말이긴 한데 왜 빡치지.
“학교장님으로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에이, 학교장이 뭐 대단한 자리라고요.”
하긴, 펜도리안 가문의 이름값에 귀를 꼬리처럼 흔들어 대는 걸 봤으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테스트는 이미 합격한 거랑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현장 체험 학습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아나르엘이 눈을 반짝 빛냈다.
“아몬 선생님네 영지…….”
불끈 쥔 주먹을 들고 있는 아몬을 본 아나르엘이 얼른 말을 바꿨다.
“……는 저번에 갔으니까! 다른 곳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아하하…… 네. 그럼 어디가 좋으려나. 헤헤헤.”
놀 생각으로 귀를 파닥거리는 아나르엘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몬이 별생각 없이 툭 던졌다.
“그럼 학교장님 마을은 어때요?”
“네? 우리 왕국이요?”
“왕국이었어요? 아무튼, 예전에 세계수 있고 달팽이들 바글바글 기어오르고 있던 거기요.”
“…….”
아나르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아몬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어어? 이것 봐라?’
자기 고향에 가자고 하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싫어하네?
우리 영지에는 자기 집처럼 가자고 하더니?
어? 열 받네?
아몬이 벌떡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외쳤다.
“가죠! 학교장님의 고향!”
“그, 그게에…….”
“예전부터 한번 시간을 들여서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웅장한 세계수! 현명한 숲의 일족인 엘프의 터전!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큰 자극이 될 테죠!”
아나르엘이 귀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 아몬 선생님은 지난번에 갔잖아요? 또 가면 재미없을 걸요?”
“지난번엔 달팽이만 보고 왔는데요.”
“…….”
어떻게든 거절하려 머리를 굴리는 아나르엘을 본 아몬이 몸을 돌렸다.
“그럼 알겠습니다.”
“네? 네?”
“제가 직접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오죠!”
“자, 잠깐……!”
아나르엘이 붙잡으려 했지만, 아몬은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 학교장실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런 아몬의 얼굴은 비열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게 브레슬의 기분이었구나!’
남이 싫다는 걸 억지로 밀어붙일 때의 어두운 쾌감이었다!
* * *
다른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찬성이었다.
‘호오, 엘프 왕국? 이슬을 모아 만든 술이 있다던데, 꼭 한번 먹어 보고 싶었는데. 쩝쩝.’
‘엘프 왕국? 나무 엄청 많겠지? 그런 곳에서 한숨 자 보고 싶긴 하네.’
‘황태, 커흠!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한번 가 보고 싶군요.’
‘아, 꺼져. 말 걸지 마.’
다들 생긴 대로 노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모두의 반응이 긍정적이었으니, 아몬은 그 사실을 알리러 학교장실로 향했다.
‘근데 학교장이 엄청 싫어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아몬도 꾸역꾸역 엘프 왕국으로 현장 체험 학습을 갈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모두의 의견이 이러한데, 학교장의 판단에 맡기겠노라 말할 작정이었다.
아몬은 망할 다크엘프가 아니니까!
“학교장님.”
“……네.”
“모두 찬성했습니다.”
“…….”
“다만, 학교장님이 정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한 걸음 물러나려 던진 말.
한참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나르엘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달팽이 경주 땐 잘만 가더니.
“달팽이 경주 때는,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었잖아요.”
“……속마음을 읽은 겁니까?”
“표정이 딱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아무튼 엘프 왕국에 아카데미의 인원이 체류하려면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해요. 제가 그곳 출신이니 허가 자체는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 사정이 걸리는 거고요.”
“사정…….”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범죄 엘프는 아니시죠?”
“아니에요! 대체 엘프를 뭐로 보고.”
269살, 반올림하면 300살이니 한번쯤은 저질러 볼 법도 한데 말이지.
아무튼 머리를 긁적거리던 아나르엘이 말했다.
“휴, 조만간 한번 들르긴 해야 했으니 방문을 조금 앞당겼다고 치면 되겠죠. 원래는 10년쯤 뒤에 들르려 했는데.”
“엘프의 시간관념은 참…….”
“아무튼, 그럼 다들 준비하라고 전해 주세요.”
“예? 준비라뇨?
아나르엘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말했다.
“현장 체험 학습 가야죠?”
“……대체 왜 이럴 때만 엘프식 시간관념이 아닌 겁니까?”
* * *
아몬은 세계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보는 광경이지만, 그 모습은 가슴에 새겨지는 것처럼 웅장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달팽이도 없으니 참 보기 좋…… 있네?’
가만 보니 몇 마리가 세계수 기둥에 붙어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응, 클로에. 왜 그러니?”
“세계수에 이상한 게 붙어 있어요.”
“달팽이란다.”
“네?”
“달팽이야.”
“왜 달팽이가……?”
그건 나도 궁금하구나.
“어머나! 다들 열심히 훈련 중이네요.”
“……평소에도 저기 붙어서 훈련을 하는 건가요?”
“맞아요.”
“미관을 해치는 것 같은데요.”
“네? 달팽이가 왜 미관을 해쳐요?”
엘프의 미적 감각이란.
아무튼 모두들 처음 온 엘프 왕국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물론 다들 저마다의 목적에 충실했다.
“저, 저게 이슬로 담근 엘프주. 꿀꺽.”
“킁킁…… 피톤치드 엄청나네. 아, 졸려라.”
“슬슬 제국도 엘프 왕국과 본격적인 동맹을 맺으면 안 되려나?”
마침 아몬과 눈이 마주친 피오라가 으르렁거렸다.
“뭘 봐. 눈 안 깔아?”
아몬은 눈을 깔았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교사진!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입을 꼭 다문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세계수에 달팽이가 왜 있지?’
‘세계수 가지로 만든 마법 지팡이가 성능이 엄청 좋다던데…….’
‘엘프목으로 만든 목검? 목검이 왜 저렇게 예리해?’
아미는 생각했다.
‘금은 없나?’
라스티아넬도 생각했다.
‘금은 없나?’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낀 아나르엘이 박수를 짝짝 쳤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이니까, 짐부터 먼저 풀자고요. 둘러보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네에.”
교사, 학생 할 것 없이 아나르엘의 뒤를 우르르 쫓아갔다.
나무뿌리가 이곳저곳 복잡하게 얽혀 있어 잘못하면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를 걸었을까.
휙-!
돌연 달려든 누군가가 선두를 걷고 있는 아나르엘을 덮쳤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모두가 나서려는 찰나.
철썩-!
호되게 등짝을 얻어맞은 아나르엘이 그대로 고꾸라지고.
난데없이 나타나 아나르엘을 쓰러트린 엘프 여인이 그녀의 등판을 철썩철썩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야 이 계집애야!”
“악! 아아악!”
“무슨 염치로 집구석에 기어 들어와!”
“아아악! 엄마! 엄, 아파아악!”
엄마? 아나르엘을 저렇게 후려치고 있는 엘프 여인이 아나르엘의 어머니란 말인가? 그 사실에 모두가 충격으로 굳어 있는 와중.
이어진 아나르엘의 어머니가 터뜨린 고함에 모두들 한층 더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시집가기 싫다고 집 나가더니 무슨 낯짝으로 기어 들어와!”
“아아아아악!”
아나르엘은 공벌레처럼 몸을 말며 절규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