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uined Academy Life RAW novel - Chapter (95)
아카데미가 망했다 95화
마치 하늘을 찌르려는 듯 구름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세계수.
그 신화적인 모습의 세계수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거대한 나무의 내부에는 엘프 양식의 가구와 장식품들로 가득했다.
마치 나무 그 자체로 이뤄진 것 같은 모습의 가구들.
아나르엘이 말했다.
“실제로 나무가 의지를 가지고 가구와 장식품 모습이 되어 준 거예요!”
진짜 나무 그 자체였구나.
“우리 나무 이름은 모데라우스예요!”
이름도 있구나.
설명하는 아나르엘은 어머니에게 얻어맞아 퉁퉁 부운 등판을 뽐내려는 것처럼 엎드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통증 탓에 눈물이 나는지 아나르엘의 속눈썹은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평소였다면 그 영양가 없는 소리를 받아 주지 않았겠지만.
“그렇군요! 모데라우스! 참 멋진 이름입니다!”
칭찬하기가 무섭게 앉아 있는 의자가 기쁘다는 듯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어어, 시원하다.’
그간 쌓인 피로를 사르르 녹여 주는 숙련된 안마 솜씨!
하긴, 나무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살며 엘프의 어깨를 책임져왔겠는가.
‘흠, 그나저나 왜 나만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지?’
다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엘프 왕국을 구경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는데, 아몬만이 나무집 안에서 아나르엘과 함께 남아 있었다.
아몬 역시 등이 부은 엘프의 부름을 야멸차게 거절하며 관광을 즐기려 했으나, 아나르엘의 어머니인 ‘아르엔’의 말에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왕국에서 추방할까요?’
‘남겠습니다!’
결국 아몬은 등판을 까고 낑낑대고 있는 아나르엘과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아몬이 나무집이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을 즐기고 있는 와중.
아나르엘의 어머니, 아르엔이 약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마를 즐기고 있는 아몬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점.”
“예?”
“반려자 될 엘프가 고통에 신음하는데, 남의 일처럼 방치하다니. 감점.”
얼마나 놀랐는지 아몬은 벌떡 일어났다.
“반려자 될 엘프라뇨! 무슨 기괴망측한 소리를 하십니까!”
“응? 아닌가요?”
아나르엘도 낑낑대며 외쳤다.
“어머니! 우린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아몬이 발작했다.
“쓸데없는 보조사 끼워 넣지 마십쇼! 아직이 아니라 ‘영원히’입니다!”
하늘이 뒤집어져도 이토록 격렬한 감상이 나오지는 않으리라.
아나르엘이 불만스레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요?”
“화가 안 나게 생겼…… 휴, 제가 학교장님보다 워낙 수준이 떨어져 큰 무례라 될까 싶어 그러는 것뿐입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머나.”
아나르엘이 ‘금칠은!’ 하며 웃었지만, 아몬은 아르엔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 남의 집에서 남의 딸자식을 욕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럼 이 인간이 아니고 다른 인간인가 보구나?”
“……네?”
“나이 든 남성 인간 하나랑, 젊은 남성 인간 하나가 더 있었잖니?”
“그,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럼…… 어휴, 얘! 아무리 인간이 빨리 자라도 인간 아이는 좀…….”
“어머닛!”
아나르엘이 벌컥 화를 냈다.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아몬도 분노했다.
“어디 우리 귀한 학생들을 학교장 같은 폐…….”
“뭐라고요?”
“학교장님께 폐가 되죠, 그럼요.”
간신히 ‘폐급’을 삼킨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두 사람의 정당한 분노에 아르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것아, 시집 안 간다고 기세등등하게 집을 나가더니만 웬 남자들을 데리고 와서 혹시나 싶어 말해 본 거다.”
“…….”
“하여간 그래. 오랜만이구나.”
“……네, 40년 만이네요.”
40년의 가출!
엘프의 시간관념은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온다.
퉁퉁 부은 아나르엘의 등에 약을 발라 주던 아르엔이 말했다.
“기왕 왔으니 푹 쉬다 가렴.”
“……네, 어머니. 그런데 아버지는요?”
아르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숲으로 돌아간 지 10년쯤 되었단다.”
그 말에 아몬이 침음을 흘렸다.
‘저런…… 가출한 사이에 그런 비보가 있었다니.’
“언제쯤 돌아오세요?”
‘어라?’
“금방 돌아올 거라 했으니 몇 년 안에는 오겠지.”
“그렇군요.”
“아무튼, 됐다. 등 부은 건 곧 가라앉을 거야.”
“이렇게 약 발라 주실 거면 살살 좀 때리시지 그랬어요?”
철썩-!
다시 등을 얻어맞은 아나르엘이 다시금 공벌레의 형태를 취했다.
“그럼 이만 나가 보마. 푹 쉬고.”
“아으으…… 네.”
이윽고 아르엔이 나간 후, 아몬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학교장님. 어머니 숲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네? 아아, 제국어의 뉘앙스로 말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죠?”
아하하 하고 웃은 아나르엘이 말했다.
“어머니 숲은 장소예요. 하이엘프가 자라는 곳이죠.”
“그렇군요. 흐음, 하이엘프라…….”
“하이엘프에 대해 아세요?”
“알려진 만큼만 압니다.”
평범한 엘프보다 막대한 마나와 정령과의 친화력을 타고 나는 종족.
그것이 하이엘프다…… 라는 건 오래된 정보고, 하이엘프는 단순하게 엘프의 ‘우량아’ 정도라고 들었다.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좋은 돌연변이’라 해야 하려나.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게 아니라, 세계수의 선택을 받아 한 대에 하나만 태어나는 것이 하이엘프였다.
그리고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난 하이엘프가 엘프 왕국을 다스리는 ‘국왕’이 된다고 했다.
“아버지가 하이엘프신가 보군요.”
“네? 아뇨, 부모님은 평범한 엘프세요. 아버지는 아마 국왕이시니 일 때문에 가신 걸 거고요.”
“예? 하이엘프가 국왕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때 아나르엘이 당당하게 귀를 쭉 폈다.
“제가 하이엘프거든요!”
“……예?”
“제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께서 대신 왕위에 오르셨죠!”
“……어?”
“서, 설마 제가 하이엘프라는 걸 모르셨나요?”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르엘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왜, 어째서 모르셨어요?”
“말을 해 줘야 알죠.”
“아니, 딱 보면 알아야죠?”
“대체 뭘 보고 하이엘프라고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세상천지 누가 이 빡통 귀쟁이를 하이엘프라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아나르엘은 세상 억울하다는 기색이었다.
“나가요!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 * *
마침 일행들은 모데라우스 근처를 구경하고 있었다.
“마리온 선생님! 마리온 선생님!”
“응? 학교장님?”
상기된 얼굴로 후다닥 달려온 아나르엘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리온 선생님은 아실 거예요!”
“예? 뭘 말입니까?”
“제가 하이엘프라는 거요!”
마리온이 눈을 둥글게 떴다.
“하이엘프셨습니까?”
“엥.”
“한 대에 한 사람…… 아니지, 한 엘프만 나온다는 하이엘프가 학교장님이셨습니까? 세상에, 정말 놀랍군요.”
진심으로 놀랍다는 마리온의 반응을 보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아나르엘이 상처 받은 얼굴로 이번에는 슬로스를 바라봤다.
“스, 슬로스 선생님?”
“하이엘프셨어요? 근데 왜, 음. 네. 그랬군요.”
“…….”
아나르엘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하나 구질구질하게 카이와 피오라에게 묻는 우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마리온, 슬로스, 아몬이 모르는데 신입인 그들이 알 리가 없을 테니까.
다만 그 생각과 달리 카이는 알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선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 힘들겠군.’
황제, 아버지와 황후인 어머니가 아나르엘에 대해 자주 말해 줬으니 카이로선 모를 리 없었다.
“세, 세상에……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잔뜩 풀 죽은 얼굴로 귀와 치를 떨던 그녀가 기절한 채 몸을 뒤척거리는 브레슬을 바라봤다.
“부학교장님은 알고 계시는데…….”
아몬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말씀을 해 주셔야 알죠. 말씀을 안 해 주시면 어떻게 압니까?”
“하, 하지만 제 입으로 말하면 하이엘프라고 유세 부리는 것 같잖아요.”
“이러시는 게 훨씬 유세 부리는 것 같습니다만…….”
마리온의 지적에 ‘맞아요.’ 하며 고개를 끄덕인 아몬이 말을 이었다.
“근데 아까 딱 보면 알아야죠, 하셨는데 뭘 보고 알 수 있는 겁니까?”
갑자기 아나르엘의 귀가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뭘 보고 아냐니까요?”
파닥파닥-!
“학교장님?”
푸드덕푸드덕-!
“아니, 왜 말을 안 하시는…….”
“귀요! 귀!”
“예?”
울상을 지은 아나르엘이 말했다.
“하이엘프는 귀가 더 잘 움직여요!”
“……아, 예. 그렇군요.”
하이엘프의 충격적인 진실이군.
삐졌다는 듯 팔짱을 낀 아나르엘이 투덜거렸다.
“어쩜,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있죠?”
“그걸 왜 알거라 생각하시는지를 모르겠군요. 근데 그러고 보니…….”
아몬이 아직도 기절해 있는 브레슬을 슬쩍 바라봤다.
“브레슬 부학교장보다 귀가 훨씬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 같긴 하네요.”
브레슬의 귀는 저렇게 비둘기 날개처럼 푸드덕거린 적은 없었다.
“역시 그렇죠? 알아주시는구나!”
저렇게 뿌듯해하는 걸 보면, 귀가 잘 움직이는 게 자랑거리라도 되는 걸까.
‘휴우, 학생들아. 너희는 커서 저렇게 모자란 어른이 되지 말아야…… 응?’
아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애들 어디 갔습니까?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지 않아요?”
“응? 아, 저쪽으로 가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쪽에서 아이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장님, 저쪽에 뭐가 있습니까?”
“응? 아아, 저쪽에 마사(馬舍)가 있어요.”
“마사? 마구간이요?”
그 말에 아나르엘이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쉿! 쉬잇. 마구간이라는 말 들으면 싫어해요.”
“예? 누가요?”
“유니콘이요.”
“유, 유니콘이요? 전설 속의 유니콘?”
아나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니콘 몇 분이 우리 집 뒤편의 마사에 머물고 계세요.”
“몇 분…… 지성체 취급이군요.”
“어휴, 실제로 지성이 있으시거든요?”
“마사나 마구간이나 똑같은 말인데, 마구간이라 부르면 싫어한다는 시점에서 지성체라는 느낌이 팍 줄어드는데요? 엄청 지성 없어 보여요.”
“그분들은 마사가 좀 더 있어 보인데요.”
있어 보인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또 갑자기 지성체 느낌이 확 나는군.
아무튼 아몬이 뒤편에 있다는 유니콘의 마사로 향했다.
“얘들아, 거기서 뭐 하니?”
“와! 와와!”
보리스와 레이몬드는 눈을 반짝거리며 유니콘을 타고 놀고 있었고, 클로에와 아미는 머리칼을 질겅질겅 씹는 유니콘의 행동에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아몬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저렇게 타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유니콘은 순결한 자와 아이들을 좋아하거든요.”
“그것도 전설대로네요.”
다만 라스티아넬은 기운을 최대한 숨긴 상태였지만,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전설이 있는 유니콘들은 드래곤인 라스티아넬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니 기분이 나쁘네요.”
-히, 히히히힝!
“알았어요, 알았어요.”
-히히히잉…….
와, 유니콘이랑 대화가 통하네.
그때 유니콘 하나가 투레질을 하며 다가왔다.
“어머, 유니코르 님. 오랜만이에요.”
-히히히힝.
“네, 잘 지냈죠. 아드님은요?”
-힝! 히힝! 히히힝!
“아하! 정말요?”
아나르엘도 대화가 통하나 보네.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유니코르라 불린 유니콘이 다가오더니 아몬의 머리칼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이건 뭡니까? 유니콘이 이런 짓을 한다는 건 못 들어 봤는데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친애의 표시예요! 아몬 선생님이 마음에 드신데요!”
아몬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은근슬쩍 자신의 사생활이 까발려진 탓이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아나르엘도 머리카락을 씹히고 있었다.
“아하하! 간지러워요.”
“허어.”
묘한 동질감과 269세의 나이에도 때 묻지 않은 아나르엘에 대해 감탄을 터뜨리는 와중이었다.
“학생들 여기 있는 것 맞지?”
“마, 마리온 선배님!”
아몬이 황급히 마리온을 가로막았다.
유니콘은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마리온을 뒷발로 차거나 뿔로 찌를 게 분명했다!
“오시면 안 됩니다!”
“엥? 왜 그러나?”
그때 유니콘이 앞발을 들며 울음을 터뜨리더니 마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이런!’
황급히 유니콘을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껄껄껄! 간지러워라!”
유니콘에게 머리칼을 질겅질겅 씹히는 마리온을 본 아몬이 입을 틀어막았다.
자칫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껄껄껄! 응? 아몬, 자네 왜 울려하나?”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응? 그래? 근데 이 유니콘,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저는 모릅니다!”
“그건 유니콘의 친…….”
“학교장님! 조용하세요!”
머리칼을 씹히다 못해 뽑힐 것처럼 휘둘러지고 있는 마리온!
그때 슬로스와 피오라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뭔데? 무슨 일인데?”
“슬로스 선배! 오지 마세요! 개망나니, 너는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아몬이 피오라의 발에 걷어차여서 땅을 구르고, 잠시 후 힘겹게 고개를 드니 슬로스와 피오라도 유니콘에게 머리칼을 씹히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탄식을 금치 못하는 와중.
질겅질겅-
슬로스가 질질 끌고 다니던 기절한 브레슬도 어느새 다가온 유니콘 한 마리에게 머리칼을 우물우물 당하고 있었다.
‘……우리 아카데미,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카데미의 교사진 모두가 가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게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그때 카이가 나타났다.
“아! 다들 여기 계시는…….”
-히히히히힝!
“크아아악!”
카이가 번개처럼 달려든 유니콘에게 걷어차여 날아가 땅을 구르는 광경에 아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이, 너 이 새끼 너 혼자…….’
카이에 대한 호감도가 바닥을 뚫고 아래로 꼬라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