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06)
109화. 마음의 공유
드륵, 타악.
“아무렴 어떠냐? 케헤헤!”
그때였다.
파진성이 불쑥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이벽과 공손수의 사이에 끼어든다.
안색이 콰했다.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있었다. 종종 그렇듯이 객잔의 지붕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살리건 죽이건… 끄윽! 모조리 대주님께서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우리가 그렇게 정했잖아? 앙?”
“…….”
당가의 경우에는 아직 아무도 죽은 이가 없으므로, 살려 보내는 데에 충분한 의의가 있다.
허나 팽가는 다르다.
고로 팽무옥과의 대화를 통해 이벽이 그 처분을 결정한다. 그것이 일행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까짓거, 제깟 놈들이 계속해서 원한을 품으면 어쩔 건데? 대주까지 갈 것도 없어. 다음 번엔 이 해남의 별 선에서 책임진다!”
타앙!
파진성이 가슴팍을 두드렸다.
“…퍽이나 든든한 말씀이네요. 근래에 성취를 좀 이뤘다고 팽가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요?”
공손수가 쏘아붙였다.
“뭐, 아직은 무리지만. 케헤헤!”
벌컥벌컥.
파진성이 술병을 들이켰다.
문득 조금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래, 얼마 전까지 일류 언저리에서 끙끙대던 녀석이 이런 말을 하면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나, 어쩌면… 뭔가 좀 보이는 것도 같거든.”
“…….”
눈빛은 또렷했다.
파진성은 기연을 얻었다.
그것은 소환단의 내력, 그리고 이벽의 ‘추궁과혈’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목천의 경지에 이른 지금.
이벽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무아지경 속의 추궁과혈은 분명 목천의 시간 속에서 이뤄진 공능이었으며, 또한 낙검진천신공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낙검진천신공.
처음에는 그저 ‘단전 없이 내력을 일으키는 방법’을 가리키는 공부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의 절학이다. 허나… 그마저도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했다.
그 가르침의 진의는 결국 선천의 힘을 다루는 것에 있었으며, 이는 즉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말로써 설명되지 않는다.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전수된다.
그리고 앞서 이벽이 이진천에게서 가르침을 얻었듯, 가르침의 파편은 다시 파진성에게로 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절정조차 넘어선 경지.
그곳에 있는 선천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미리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잠재된 재능을 일깨운다.
응축된 노력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일지언정 그 깨달음의 시기를 앞당기는 계기 정도는 되어준 것이다.
후욱, 탁.
“그래요. 모처럼 맘이 맞네요.”
그때, 또다시 인영 하나가 창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섰다. 언미희였다.
“애당초 공자를 따르기로 한 게 우리의 선택이니, 공자의 판단에 따른 책임도 다 같이 나누면 그만인 일이잖아요?”
언미희는 좀 더 야위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었다.
일전에 팽가 무인들의 피를 뒤집어쓴 이래 그녀는 더더욱 틈만 나면 수련을 거듭했다.
베어냄으로써 떨쳐내고자 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생각했거든요. 공자가 함부로 사람을 해칠 리 없죠. 그쵸?”
결국은 네 사람이 한데 모였다. 모두가 이벽의 결정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아.”
공손수가 이마를 잡았다.
“난 몰라. 물가에 어린애가 세 명… 파 소협까지 이 모양이니 이러다 정파로 전향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케헤헤, 불안하면 쥐방울 네가 남아서 사파의 자존심을 지켜내던가.”
“…하아.”
당연하다는 듯 책임을 나눈다.
‘…물가의 어린애라.’
그 말에는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제갈성의 진법을 경험한 이래, 이벽은 종종 꿈속에서 세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았고, 그 관계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에.
바꿔 말하자면.
불안함은 곧 소중함의 반증이다.
누가 더 강하거나 약하거나에 상관없이, 소중한 이는 종종 물가의 어린애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면.
“잠깐 괜찮겠나?”
이벽은 셋을 돌아보았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뭐가요?”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갑자기 할 얘기가 생각났다.”
* * *
일행은 처소에 둘러앉았다.
때마침 철면개는 개방의 분타로 향해 있었고, 송영영은 팽무옥의 처분 따윈 아무래도 관심 없다는 듯 일찍이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고로 자리한 것은 네 사람뿐이다.
기회라면 기회다.
이벽은 입을 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았다.
선우세가의 서자 선우벽이었던 시절부터 소가주가 되고, 습격을 당해 절벽에서 떨어지고, 이진천에게 주워져 낙검문에 이르기까지.
“…….”
말재주는 그닥 자신이 없다.
종종 맥락은 어긋났고 이야기는 이곳저곳으로 튀어 나가기도 했다.
허나 일행들은 침묵 속에서 이벽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화한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이야기는 천향루에서의 언미희와의 만남을 거쳐 사패련의 비무, 그리고 비룡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끝이 났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야기는 퍽 길었기에 각자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헹.”
파진성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 대강 알겠다. 단전에 빵꾸 나고 사부를 만나고 기연을 얻은 것도 잘 알겠고… 솔직히 대주 네가 아니었으면 미친놈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말야. 근데.”
탕,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다 좋은데 왜 복수를 안 하냐?”
“…….”
“선우세가? 운남 촌구석에서 방귀 좀 뀌는지는 몰라도 그래봐야 팽가 정도 수준 아니냐?”
씨근거리며 말을 잇는다.
“이해가 안 가네. 핏줄이고 나발이고 뒤통수를 까였으면 놈들 대가리는 앞뒤로 으깨버려야지. 나라면 살점을 회 친 다음 산 채로 줄에 묶어서 해남 앞바다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서서히 말려 죽일 텐데 말야.”
파진성은 화가 난 듯했다.
벌컥벌컥, 다시 술병을 들이켰다.
“최악이군. 고구마를 서른 개는 처먹은 것 같은 기분이다. 기가 막혀서 술이 맹물 같네.”
“…….”
마치 자신의 일처럼 진지하게 화를 낸다. 그 분노 앞에서 이벽은 할 말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래요.”
이어 공손수가 입을 열었다.
“뭐, 갑작스럽긴 하지만… 말해줘서 고마워요. 여러모로 궁금하던 것들도 조금 이해가 되구요. 대신에 새로운 궁금한 것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긴 했지만…….”
복잡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기뻐요. 그만큼 믿음을 샀단 뜻이니. 하지만 오라버니는 끝끝내 사파 무인은 아니란 뜻이군요.”
“…….”
“말하자면 처음부터 비룡대에 사파는 나와 파 소협 두 사람뿐이었단 뜻이네요. 어쩐지 이상하게 잘생겼더라니~”
흠칫, 언미희의 어깨가 흔들렸다.
공손수가 피식 웃었다. 언미희의 뿌리 역시 사파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모양.
“…저는.”
꾸욱, 언미희가 옷자락을 쥐었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들을 겪고도 공자가 지금의 공자라는 건요. 다만.”
언미희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눈이 이벽을 향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슨 말이오?”
“저는 머리가 나빠서… 지금 공자의 얘길 듣고 나서도 정말로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좋죠?”
“…….”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이벽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파진성도 공손수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애초 의도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 과거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을 쓰거나 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소. 그저…….”
이벽은 잠시 말을 골랐다.
“…문득 이제는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단 생각이 들었소.”
과거는 발목을 붙잡는다.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허나.
“이만큼 함께했고 얼추 등을 맡기는 관계가 되었으니 내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지.”
의도가 있다면 오히려.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었다.
낙검문의 사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이벽은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세 사람을 조금 더 마음 깊은 곳에 두었다.
머쓱한 분위기가 흘렀다.
“또한 진짜로 하고자 하는 말은 오히려 따로 있소. 파진성.”
“…나? 왜?”
“근래에 얻은 깨달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나?”
“아니 그게 뭔 씨니락 까먹는—”
퍽 답답한 듯한 얼굴로 동이 난 술병을 입안에 털어 넣던 파진성이 다시 이벽을 향했다.
허나 그 표정이 퍽 진지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기억이 또렷하진 않다. 그 귀한 소환단 처먹고 주화입마에 빠져서 천하제일로 등신 같은 죽음을 맞이하나 싶었지. 헌데 그때 갑자기 네 기운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더군.”
“…….”
“그래 마치…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읽히는 기분이었다. 나보다 내 무공을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소름이 다 끼치더구만?”
그것은 어떤 의미로 퍽 정확했다.
거울처럼 마음을 비춤으로써 깨달음을 점검하게 한다. 낙검진천신공의 가르침은 그러한 경로로 전수된다.
“낙검진천신공이라고 한다.”
“…그게 오라버니가 사문으로부터 전수받은 무공인가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초식도 없고 구결도 없지. 문주님께선 이 가르침을 두고 무공이라 할 수 있을지 어떨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
“허나… 분명한 것은 이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단전 잃은 폐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행은 침묵했다.
어찌 되었건 네 사람은 모두 무인이었고, 무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공기는 사뭇 달라졌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타인의 마음을 비추는 공능이 있다는 것도… 파진성의 주화입마가 아니었다면 아마 알지 못했겠지.”
“…….”
잔잔한 충격이 흘렀다.
삼류무인에서 강호 최정상의 고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무인에게 있어 깨달음이란 결국 혼자만의 영역이다.
스승에게서 단초를 얻을 수는 있되, 자칫 거기에 지나치게 매달렸다간 오히려 그 말 자체에 사로잡혀 벽이 되고 심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헌데.
“단전도 없이 내력을 끌어다 쓰고, 말을 넘어서서 타인의 깨달음을 돕고… 상식을 너무 벗어나는데요. 대체 오라버니의 ‘문주님’은 뭐 하는 분이세요?”
“…나도 잘 모른다.”
“아, 그게… 저도 잘은 모르지만요. 저희 하오문에서는 공자께서 지닌 그 패를 본다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케헤.”
파진성이 작게 웃었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이벽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 내가 대주뿐만이 아니라 사문에까지 신세를 진 모양이군. 그치? 가서 인사라도 드려야겠는데 우리 문주님께선 뭘 좋아하시나? 응?”
“…….”
이벽은 문득 상상했다.
낙검문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 제갈소미가 던진 돌멩이에 뚜드려맞는 파진성의 모습을.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워낙에 촌구석이라 어차피 찾기도 어려울 테다. 다만.”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공손수.”
흠칫, 공손수의 눈썹이 흔들렸다.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우리에게는 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세 사람은 대체로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
일순 분위기는 싸해졌다.
“지금 설마 농담한 거예요?”
“…따라서 네가 원한다면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겠지.”
이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물을 타듯 부드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니, 진짜로 괜찮아요?”
“뭐가 말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사문의 가르침이잖아요? 파 소협이야 우연이었다고 쳐도 함부로 유출시켜서 어쩔 건데요?”
“그저 한 번 겪었다고 해서 가져갈 수 있는 가르침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너조차 알지 못하는 너의 마음을 비출 뿐이지. 또한.”
이벽은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산적으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호남무림을 향하던 그때와는 입장이 퍽 뒤바뀌었단 생각이 스쳤다.
얼핏 웃음이 스쳤다.
“일전에는 너희들이 강해지는 게 곧 나를 위한 일이니 ‘부디 키워달라’고 내게 간곡히 청하지 않았었나?”
“…하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아뇨. 생각은 그만할래요.”
공손수가 피식 웃었다.
흔쾌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요. 까짓거 해보죠. 어째 이러다 어영부영 계속 끌려다닐 것 같은데. 더 고민해봤자 별로 달라진 것도 없겠네요.”
“…….”
“솔직히 이제는 참기도 지쳤어요.소환단에 사문의 가르침까지 꽁으로 떠먹여 준다는데 무인으로서 그걸 어떻게 참아요? 오히려 내가 매달려야 할 것 같은 입장인데…….”
시선이 파진성을 스쳤다.
케헤, 파진성이 웃음을 흘리자 공손수의 표정에서 웃음과 한숨이 뒤섞였다.
“…오라버니를 꼬시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역으로 내가 꼬셔지고 있네요. 어쩌다 이렇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