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08)
111화. 공손수, 옅어지다 (2)
“그, 그게 무슨—”
“암기,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한 열두 자루 정도는 들어있던 거 같은데.”
“…….”
이내 공손수가 작게 웃었다.
“그럼 옷 안에 침 들어있는 거 내가 진짜 모를 줄 알았어요? 내 몸에만 숨겨진 암기가 몇 개인데… 와, 잠영난봉께서 우리 암영각을 진짜 개 호구로 보셨나 보구나~”
휙.
그때, 당려옥이 팔을 휘둘렀다.
다시 암기 세 개가 쏘아졌다. 공손수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타다닥.
침들이 다시 빈 허공을 갈랐다.
“이야, 진심인가 보네요.”
“…….”
“사실은 괜한 객기가 아닐까 내심 불안했는데… 기뻐요. 누구 말처럼 그 잘난 오룡삼봉을 꺾는다는 건 확실히 상징적인 느낌이 있네요.”
목소리는 왼쪽에서 들렸다.
당려옥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손수는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헌데 보는 눈앞에서 또다시 움직임을 놓쳤다.
안력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회심의 기습은 너무 쉽게 파훼되었으며, 두 번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당황스럽죠? 그렇겠죠. 근데 그거 알아요? 사실은 당 소저보다 제가 더 당황스럽거든요. 마치 반칙 같아.”
움찔, 당려옥의 어깨가 흔들렸다.
공손수가 발을 뗀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그 모습이 다시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일전에는 실력을 감췄나요?”
“뭐,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그런 걸로 해둘게요~”
“…….”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와 같았다.
한 번 발이 떨어질 때마다 위치가 바뀌지만, 머무른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암영각.
문득 당려옥은 떠올렸다.
당금의 사파무림이 패왕가 중심으로 안정화된 이래 그저 비밀스런 무림세력인 척하고 있으나.
본래는 살수집단이었던 집단.
특히 당대의 각주인 무영객은 마교와의 전쟁 속에서 수많은 마인들의 목을 허무하게 베어내어 천하제일 살수로 이름을 알렸다.
‘…끝이네.’
당려옥은 체념했다.
기습이 실패한 이상 더는—
“뭐해요? 더 던져보라니까요.”
공손수가 말했다.
“…뭐라구요?”
“뭐든 간에요. 할 수 있는 걸 해보세요. 소저의 몸 상태를 감안해서 암기가 바닥날 때까지 반격은 안 할 테니 걱정은 말구요.”
“…….”
빠득.
당려옥은 이를 갈았다.
“…조롱은 그만두세요. 저 문밖에 그 잘난 비룡대주가 버티고 있는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럼 이건 어때요? 소저가 저를 한 대라도 맞추면 당가의 무인들을 모두 풀어줄게요.”
“…….”
“진짜예요. 어차피 지금 우리가 하는 말들은 오라버니한테도 다 들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구요.”
울컥, 당려옥은 독심을 느꼈다.
황망한 감정 속에 가라앉아 있던 자존심이 문득 눈을 떴다.
오룡삼봉의 일인이자 잠영난봉이란 별호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다.
‘…살수 나부랭이가 감히!’
당가의 꽃봉오리에는 독이 있다.
설령 추후에 비룡대주가 어떻게 나오건, 그 사실을 이 건방진 사마외도의 계집에게 알려줘야 한다.
당려옥은 침통을 꺼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자, 봐요. 소저의 말대로 제겐 여섯 자루가 남았어요. 이 안에 승부를 보죠.”
“굳이 안 보여줘도 되는데…….”
공손수가 저만치로 물러났다.
당려옥은 남은 침을 모두 꺼내었다. 두 손에 나누어서 쥐자 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할 수 있다.’
설령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그리고 기나긴 찰나가 흘러갔다.
훅.
당려옥의 두 손이 흔들렸다.
그 순간 다섯 개의 침이 부채꼴을 그리며 전방으로 비산했다. 탓, 공손수가 튀어 올랐다.
“이야, 다섯 개를 한 번에 써버리다니. 역시 정파의 여협답게 통도 큰—”
채앵!
공손수가 황급히 비수를 뻗었다.
마지막 한 개의 침이 뺨을 스치려던 순간, 비수에 맞닿아 가까스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공손수가 착지했다.
“…보지도 않고 미리 던지는 건 예상 못 했네요. 튀어 오를 걸 예상했다 이건가요?”
“…하아.”
당려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졌어요. 못 당하겠군요.”
“뭐, 수고했어요.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네요. 천하의 잠영난봉조차 나를 맞추지 못한다면—”
저벅저벅, 공손수가 다가섰다.
허나 그때 당려옥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머리 장식을 위장한 최후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푸욱.
그대로 공손수를 찔렀다.
당려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 미안하지만 아직 남아있었답니다. 원망은 말아요. ‘우리’ 같은 이들의 싸움에서 눈치채지 못한 그쪽 잘못… 어?”
당려옥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허나 그 입에 자리한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감각이……?’
분명히 찔렀다.
허나 손끝에 걸리는 게 없다.
그때, 눈앞에 선 공손수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옅어진다.
“…자, 잔상?”
“당연히 그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우리’ 같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게 결국 거기서 거기죠 뭐~”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다.
“…쳇.”
당려옥은 혀를 찼다.
푸욱.
그리고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따끔함과 함께 당려옥의 의식이 멀어졌다.
“뭐, 됐어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얘기해요. 잘난 신세 걱정은 감히 하지도 말구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으면 내가 얼마나 편했겠냐고?”
* * *
“끝났나?”
“네, 오라버니.”
공손수가 문밖으로 나오자 바깥에 서있던 이벽이 말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전혀~”
“좋군.”
“맞아요. 좋네요.”
“돌아가지, 밥 먹으러.”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다.
이벽과 공손수는 나란히 의원을 나섰다. 밥 짓는 냄새가 앵화촌 거리 곳곳에서 감돌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객잔을 향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제 억지를 들어줘서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당려옥을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암기를 손 닿는 곳에 놔두었고, 점혈도 허술하게 해두었다.
눈치채지 못한 척 화를 내고 빈틈을 드러냈다. 그리고 계획대로 당려옥은 움직여주었다.
“나름대로 검증이 필요했어요.”
“…….”
“하다못해 후기지수 중에서 제일이란 오룡삼봉 정도는 꺾어두지 않으면 결국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이벽이 돌아보았다.
“이제는 된 건가?”
“네.”
공손수가 웃었다.
“자꾸 오락가락해서 죄송해요. 더는 약한 소리 안 할게요. 죽을 때까지 오라버니한테 따라붙을게요.”
“…죽으면 의미가 없다.”
“맞아요, 안 죽어야죠.”
덥석.
공손수가 이벽의 팔을 붙들었다.
“…….”
이벽은 조금 놀랐다. 오른편에서 함께 걷던 공손수가 어느새 왼팔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기척은 옅었다.
은밀함은 그림자와 같다.
문득 이벽은 눈앞에 있어도 본인이 입을 열기 전까지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암영각주 천막심을 떠올렸다.
“이 정도면 적어도 위험할 때 제 몸 하나는 건사하겠다 싶어요. 파 소협의 말이 좀 이해가 가네요.”
“…….”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알고 있다는 걸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눈앞에 새로운 벽이 있네요.”
“…그렇군.”
“영약 한 뿌리 먹겠다고 목숨까지 내던지는 게 무인인데 이 정도 가르침을 받았으면 저도 염치가 있지 제 몫은 해야겠죠.”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네 스스로 도달할 곳이었다. 파진성과 마찬가지로.”
“네, 맞아요. 하지만 최소 20년은 걸렸겠죠. 그 전에 어딘가에서 칼 맞고 죽었을 수도 있고요.”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영약은 자신에게 의미가 없으며, 낙검진천신공을 나눈다 해서 딱히 무언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본의 아니게 생색을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공손수의 마음 또한 이해가 갔다.
보다 위로 오르고자 하는 갈망.
그것은 모든 무인들의 숙명과도 같으며, 때로는 목숨보다도 우선시된다.
“그거 아세요? 저희 공손가는요, 먼 옛날 암영각에 합류하기 전에는 어느 군왕의 호위무가였대요.”
“…그렇군.”
“헌데 그 왕조가 망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결국은 살수집단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죠.”
그것은 퍽 갑작스런 얘기였다.
이벽이 돌아보자 마치 비룡대에 처음 합류했던 그때처럼 공손수는 묘한 웃음을 보였다.
“오라버니,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오라버니를 주군이라고 부르면 어떨 거 같아요?”
“…심하게 부담스럽군.”
“그래요. 그럼 겉으로는 계속 오라버니로 하되 저 혼자 속으로만 그렇게 부르죠, 뭐.”
“…….”
“표정 굳지마요. 농담이에요. 저도 그런 성격은 아닌 거 아시잖아요?”
공손수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대화는 멈추었다. 어느덧 일행이 묵고 있는 객잔이 나타났다.
당가 무인들과의 일전으로 객잔은 엉망이 되었으나, 당가 무인들이 지니고 있던 돈으로 해결했다.
끼익.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 중앙의 탁자에는 이미 송영영과 철면개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케헤, 왔냐?”
“아~ 배고프다. 밥은요?”
“알아서 시켜놨으니 걱정 마라. 하루 이틀 같이 밥 처먹는 것도 아니고, 케헤헤!”
“잘했어요, 파 소협. 길들이는 보람이 있네요~”
툭툭, 공손수가 파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벽과 공손수는 당연하다는 듯 비어있는 두 자리에 앉았다.
“…뭐야?”
문득 송영영이 말했다.
“뭐가 ‘뭐야’에요, 소저?”
“…….”
송영영의 시선이 공손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는 미간이 작게 흔들렸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요. 잘 됐죠.”
“…….”
송영영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턱을 궤고서 입술을 삐죽였다.
“…짜증 나. 또 나만 몰라.”
* * *
“걸개, 권왕은 어떤 사람이죠?”
공손수가 물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철면개를 향했다.
게걸스레 닭다리를 뜯던 철면개가 커흠, 헛기침을 했다.
“그건… 꽤 갑작스럽구만. 무슨 의민지 설명을 더 해주겠소? 당가의 잡것들이 무슨 말이라도 좀 털어놓던가?”
“천하제일인이라던데요.”
“…뭐라?”
공손수가 젓가락을 놓았다.
“뭐, 아직은 좀 더 털어봐야겠지만… 자신들은 그 뜻에 따랐을 뿐이고, 천하제일인의 명령에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단 식으로 얘길 하더라구요.”
“하.”
송영영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공손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천하의 콧대 높은 당가가 스스로 아래를 자처하다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빈말이라기엔 좀 지나치다 싶어서요.”
앞서 의혈맹주는 비룡대주 이벽에게 나포령을 내렸고, 이에 팽가를 비롯한 많은 세가들이 그 뒤를 쫓았다.
허나 우여곡절 끝에 이벽은 무당과 소림, 개방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그 시점에서 의혈맹의 추적은 사실상 끝이 났다.
헌데.
“따지고 보면 중견 이하의 무가들이 떨어져 나가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당가가 나선 꼴이잖아요? 하지만 제아무리 의혈맹주라곤 해도, 다른 오대세가를 수족으로 부린다는 건…….”
“…….”
“뭐, 애초에 그렇게까지 우릴 노리는 것부터가 어처구니없는 일이구요. 우리가 무슨 의혈맹에 돈을 꿨나 쌀을 꿨나…….”
철면개가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을 소매로 슥 닦은 뒤 퍽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인.”
“…….”
“분명 광오한 이야기요. 십대고수들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비무가 이뤄진 적이 없고, 따라서 당금 무림에선 누구도 감히 그 이름을 자처할 수 없소. 허나… 아마 그들에겐 진심이겠지.”
철면개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래, 사파에서 오신 소협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군. 사실 근래의 의혈맹은 단순히 무림세가들의 연합체가 아니라오. 출발은 그랬을지도 모르나, 그 성격이 점점 변질되고 있지.”
“…그게 무슨 말이죠?”
철면개가 설명을 이었다.
정파무림의 한 축을 이루던 다섯 개의 세가가 구 무림맹을 뛰쳐나간 이래, 무림세가들은 하나둘 오대세가의 위명 아래 모여들었다.
그것이 의혈맹의 시작이었다.
허나 어느 정도 형태가 갖춰진 뒤, 현재의 의혈맹은 진짜로 ‘혈맹’을 맺기 시작했다.
“남궁가도, 당가도, 모용가도… 모두 황보가의 혈통과 혼인을 치뤘거나 혹은 장차 혼인을 약조함으로써 보다 강한 결속을 맺었소.”
“…….”
“생각해 보면 꽤 웃긴 일이지. 혼인을 통해 권력을 집중시키다니, 이미 무림의 논리가 아니오. 핏줄과 무공을 한데 엮어서 권왕이 아니라 진짜 왕이라도 될 생각인가 보지.”
철면개가 코웃음을 쳤다.
허나 일행은 함께 웃지 못했다.
“…제갈가는요?”
문득 공손수는 오대세가 중 하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뭐, 제갈가 역시 본래는 황보가의 소가주와 혼담이 오갔었다고 하오만… 그 소가주가 퍽 유명한 망나니라서 말이오. 3년 전쯤 그 당사자인 제갈가 여식이 돌연 집을 떠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하더군.”
“……!”
문득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러나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다. 직감적으로 떠오른 생각 하나를 털어내었다.
“어쨌건 제갈가로선 입장이 꽤 난처해진 셈이지. 감히 위대한 황보세가의 소가주를 역으로 소박을 맞히다니 말이오. 따지고 보면 얼마 전 제갈가의 소가주가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소?”
앞서 제갈성은 말했다.
황보혁의 막내딸이 혼기가 찼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세가들보다 앞서 비룡대주를 붙잡는 공을 세우고자 했다고.
“…….”
일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아무리 의혈맹주라곤 해도, 오대세가에 십대고수가 권왕 황보혁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궁세가에는 검왕이.
그리고 당가에는 독왕이 있다.
허나 그런 것치고는 의혈맹과 오대세가의 무게추는 이상하리만치 황보세가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솔직히 우리도 잘 모르오. 허나 아마 그들끼리는 ‘그렇게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
“…충분한 이유라.”
이벽이 말했다.
“그래, 가령 검왕과 독왕이 이미 권왕에게 패배했다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충격적인 무언가가 말이오.”
천하제일인.
그 무거운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정도의 이유.
“좌우간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이오. 황보세가와의 혈맹 여부에 따라 다음 대에는 오대세가의 구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이오.”
“…….”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애초에 오대세가의 구성원 같은 건 늘 바뀌어왔지. 수십 년 전쯤만 해도 황보세가 따윈 그 안에 감히 들지도 못하던 시절도 있었소.”
철면개가 턱을 괴었다.
본인의 뜻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황보세가나 권왕의 행보를 좋게 보지는 않는 듯 했다.
“이유는 퍽 명확했지. 한때 산서에는 산동의 황보세가를 가볍게 짓누르던 당대의 권법제일가 진주언가가 있었거든. 허나 그쪽은 마교와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사실상 맥이 끊겼소.”
“…….”
“천하를 위해 의로운 피를 흘린 이들은 오히려 종적을 감추고 몸을 사렸던 이들이 성취를 얻어 득세를 하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타악.
숟가락이 식탁에 부딪혔다.
“아… 죄송해요.”
아하하, 언미희가 웃었다.
다소 맥이 빠진 웃음이었다. 손에서 숟가락을 떨어뜨린 언미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아녜요. 그냥 좀 피곤해서… 요새 자꾸 잡념이 많아지네요. 운기를 좀 해야겠어요. 먼저 올라가 볼게요.”
타닷.
언미희가 빠르게 자리를 떴다.
“…….”
이벽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미희는 팽가 무인들의 피를 뒤집어쓴 이래 조금씩 상태가 안 좋아졌다.
심마(心魔).
남의 일만은 아니지만.
이벽은 문득 책임감을 느꼈다.
“…큰일이에요.”
그때 공손수가 말했다.
목소리는 더없이 심각했다.
“언니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밥을 겨우 두 그릇밖에 안 먹었어요.”
“…….”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