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09)
112화. 흑천의 암운
저벅저벅.
노인 한 명이 정원을 거닐었다.
노인의 인상은 청수했다. 희끗희끗한 수염, 그리고 웃음으로 빚어진 입가의 잔주름은 눈이 내린 겨울의 개울가를 연상케 했다.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뒷짐을 진 채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양은 마실을 나온 노학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나 주름 없이 정갈한 백의무복과 허리에 걸쳐진 커다란 도 한 자루는 노인의 정체가 무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끼익.
노인이 대문을 열었다.
정원의 바깥에는 다시 외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정비된 돌바닥과 화려한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앗, 핫!”
머지 않은 곳에서 수련에 열중하는 무인들의 기합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물론,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사패련 사대세력 중의 하나이자 광서무림의 실질적 지배자인 흑천방의 본단이기 때문이다.
“허헛.”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는 쪽을 향해 휘적휘적 나아갔다.
“어… 어?”
이내 노인이 연무장에 들어섰다.
제각기 수련에 열중하던 흑운대의 무인들이 하나둘 노인을 발견했다.
쿠웅, 쿵!
“바, 방주님을 뵙습니다!”
“방주님을 뵙습니다!”
다음 순간,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돌바닥에 이마를 찧는다.
“아이구, 일어나게! 뭘 또 그리 요란하게들 구는가? 그저 간만에 얼굴들이나 보려고 했더니만.”
“아,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어서들 일어나래도? 우두머리 되는 이가 식구들의 수련을 방해해서야 되겠나?”
노인이 손사레를 쳤다.
그제서야 무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허나 차마 허리를 펴지는 못한 채 조용히 눈치를 본다.
“…방주님.”
그때, 무인들 사이에서 중년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게 누구야. 우리 흑운대주 아닌가? 그간 목소리는 자주 들었어도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또 오랜만이구만?”
“…….”
흑운대장 마령기는 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이는 분명 그의 주인이자 흑천방의 지존이기도 한 흑천뇌왕 맹철극이었다.
헌데… 분위기가 다르다.
과거 맹철극에게는 분명 거대방파의 종주다운, 좌중을 짓누르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그러나 약 2년 전, 맹철극은 불현듯 폐관수련을 선언했다. 그리고 연공실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지금.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같은 얼굴을 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방주님, 폐관은 이제……?”
“뭐, 이쯤 했으면 됐지 싶네.”
맹철극이 수염을 쓸었다.
“그럭저럭 얻은 것도 있고… 슬슬 좀이 쑤셔서 말야. 이제 그만 바깥 공기 쐴 때가 되었지. 자네들도 그간 나 없이 해나가느라 고생들 많지 않았나?”
“아아!”
마령기는 탄성을 내질렀다.
“성취를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립니다!”
쿠웅!
마령기가 다시 엎드렸다.
그러자 분위기를 살피던 다른 흑운대원들 역시 일제히 머리를 박았다.
“거 일어나래도? 이거 왜 이러나 이 사람? 자네 때문에 대원들까지 난처하지 않나?”
쿠웅, 쿵!
마령기는 아랑곳 않고 이마를 박았다.
그의 주군이 연공실에 틀어박힌 이래, 그 주변에 감돌던 알 수 없던 피 냄새는 온데간데없다.
지금의 맹철극은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노인과 같았다.
허나 그것이야말로 성취를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이기도 했다.
본래부터 이미 절정조차 넘어선 분이었다. 헌데.
‘흑천방의 천하가 올 것이다!’
마령기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천하무림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일지도 모른다.
“이것 참, 내가 계속 여기 있다간 수련은커녕 자네들 이마가 터져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구먼? 수고들 해!”
“존명!”
“존명!”
맹철극은 돌아섰다.
그리고 연무장을 나선 순간, 노인의 얼굴에 맺혀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찮군.”
노인의 눈빛은 서늘했다.
흑천방은 참으로 별게 없다.
맹씨 성을 쓰는 몇 놈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저 머릿수로 밀어붙일 뿐인 삼류흑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고작 저런 게 최정예 무력대라니.
허나…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라 해도 칼은 칼이다. 준비된 칼은 한 자루라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호오.”
문득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휘적휘적, 노인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전각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파직, 파지직.
“흐악!! 크아악!!”
그 중앙의 연무대에서는 거구의 청년이 홀로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파직, 파직.
청년은 연신 악을 내질렀다.
그 칼끝에서는 이따금씩 시커먼 뇌기가 번쩍였다. 사이사이로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훌륭하구나, 우강아.”
“어떤 놈이냐!! 내 분명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청년, 맹우강이 고개를 돌렸다.
핏빛이 감도는 사나운 눈이 노인을 향한 순간, 휘둥그레 해졌다. 털썩, 그 즉시 무릎을 꿇었다.
“바, 방주님을 뵙습니다! 가, 감히 말실수를 하다니, 제자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되었다. 무려 2년 만에 보는데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지금은 우리 둘뿐이지 않느냐? 모처럼이니 아버님이라고 해라.”
“……!”
노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맹우강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흑천방주 맹철극의 먼 조카뻘이지만, 어린 시절 그 재능을 인정받아 방주의 양자이자 직전제자가 되었다.
허나 단 한 번도 노인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따뜻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툭, 툭.
노인이 손이 맹우강의 어깨에 가 닿았다.
“성취가 있었구나. 내가 곁에 없었음에도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크흑!”
맹우강이 흐느꼈다.
쿠웅! 이마를 찧었다.
“죄송합니다 방주… 아버님! 소자가 불민하여 흑천방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되었다. 강호무림에서 이기고 지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 어떻게 매번 이길 수만 있겠느냐?”
“…….”
감정이 격해지는 와중에도 맹우강은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방주는 본래 이런 따뜻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네가 약한 게 아니다. 단지 비룡대주 그 아이가 너무 강했을 뿐이겠지.”
“……!”
허나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맹우강은 머리를 비우고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흑운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그 아이는 이미 사파무림을 떠나 정파로까지 나아갔다더군. 그 나이에 벌써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다.”
툭, 노인의 손끝이 다시 맹우강의 어깨를 스쳤다.
“허나 우강아, 비룡대주란 이름은 본래 너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 않느냐?”
“……!”
말마따나 비룡대는 본래 흑천방의 작품이었다.
사파의 후기지수들을 모으고, 자신이 그 정점에 이르러 흑천방 시대의 상징이 되고자 했다. 허나.
갑자기 튀어나온 패왕가주의 후계에게 어처구니없이 패하고 말았다.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어때?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 있겠느냐? 그럴 만한 힘을 내게 보여줄 수 있겠어?”
“…….”
터벅.
맹우강은 일어섰다.
말없이 도를 잡았다.
파직, 파지직!
이내 도신 위로 뇌기가 모여들었다. 기를 쥐어짜는 맹우강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바르르, 도를 쥔 팔이 잘게 떨렸다.
후욱.
그때였다.
응축된 기운이 형체를 이루었다.
“허억!”
파앙!
다음 순간, 맹우강이 숨을 내쉬었다. 불안정한 기운이 산산이 흩어졌고 맹우강은 다시 주저앉았다.
“허! 훌륭하구나.”
노인은 감탄했다.
그것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고 단 한 순간에 불과했으나… 분명히 강기였다.
“…단 한 순간도 그 패배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니, 잊고 싶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쿡, 맹우강이 도를 짚었다.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안색은 창백해졌으나 눈빛만은 붉었다.
“믿어주십시오, 아버님. 이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놈은 제 손으로 죽여버릴 겁니다. 반드시.”
“우강아.”
노인이 목소리를 달리했다.
“같은 세대에 그만한 적수를 만났으니, 아마도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부딪혀야 하겠지. 그것은 너의 업이다. 마치 혁군악을 만난 것이 나의 업인 것처럼 말이다.”
“…….”
“허나 두고 보거라. 이 맹철극은 살아생전에 반드시 혁군악을 넘어 흑천방의 천하를 이룰 것이고, 차후에 그걸 물려받을 이는 물론 너뿐이다.”
움찔, 맹우강이 다시 흔들렸다.
“그러면 너는 거기에서 안주하지 말거라. 우리는 사파다. 안주란 곧 죽음과 같으며, 장차 비룡대주뿐 아니라 장강 너머의 정파를 쳐부수는 것 역시 너의 몫이다.”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맹우강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패배는 그저 패배일 뿐, 너무 연연하지 말고 크게 보고 크게 생각하거라. 언제나 믿고 있다.”
노인은 다시 한번 그 어깨를 다독인 뒤 돌아섰다. 흐느끼는 맹우강을 뒤로 하며 문밖으로 나섰다.
‘나쁘지 않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 쓰레기 같은 집단에도 될성부른 떡잎이 하나쯤은 있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좋은 칼로서 자라날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영원히 비룡대주를 넘어설 수는 없겠지만.
재능이란 냉혹한 것이다.
“정파로 빼돌린다라, 쯧.”
노인은 문득 혀를 찼다.
확실히 혁군악도 바보는 아니다.
낌새가 이상해지는 것 같자 놈은 암영각을 거쳐 부랴부랴 비룡대를 정파무림으로 보내버렸다.
묘수라면 묘수였다.
그곳에서라면 분명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다. 자칫 정파 놈들의 시선을 끌어버리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한발 빨랐다, 혁군악.”
크흐, 노인은 웃었다.
씨앗은 잘 심어졌으며, 마무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물론 그 마무리 역시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정파무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속하게 끝을 내야 한다.
“이거 아끼고 아끼던 칼인데 말야. 설마하니 벌써부터 꺼내쓰게 될 줄은 몰랐구만.”
* * *
당려옥을 비롯한 당가의 무인들을 그 이상 물고 늘어진들 더 나오는 정보는 없었다.
고문 같은 것을 가하지는 않았다.
공손수가 조심스레 제안했으나, 이벽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전력을 잃은 적에게 다시 한번 손을 댄다면 아예 죽일 각오를 해야 한다.
허나 죽이는 것은 곤란하다.
일행은 그대로 며칠을 묵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처를 수습한 당가 일행과 그리고 팽무옥이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부랴부랴 떠날 채비를 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마을을 나서기 전, 당가의 마차 앞에 선 당려옥이 이벽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구차한 이야기이지만… 먼저 치고도 자비를 얻어 몸 성히 살아나가니, 구명의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살펴 가시오. 다시 만나는 일은 가급적 없었으면 좋겠군.”
“염려는 마세요.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답니다. 무엇보다 이견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패배했으니까요.”
당려옥이 허리를 들었다.
이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비룡대주께선 협객이시군요.”
“…….”
“누워있는 동안 소녀 나름대로 많이 고민했답니다. 어쩌면… 정파니 사파니 하는 섣부른 틀에 갇혀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협객.
그것은 들어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잘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저같이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 무방비로 당해 누워있는데도 손대지 않았다는 건… 보통의 수행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
이벽의 인상이 꾸겨졌다.
이 여자는 머리가 좀 이상하다.
“어쨌거나 소녀의 말에 그리 큰 의미는 없겠지만 소협의 자비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황보세가를 조심—”
후욱.
그때, 암기가 날아들었다.
당려옥이 황급히 고개를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암기가 마차의 외벽에 꽂혀 들었다.
“갈 거면 빨리 꺼져요. 쌍년아.”
공손수가 방긋 웃었다.
“…소저도 잘 있어요. 여러모로 신세를 졌네요. 언젠가 당가에 들른다면 ‘다과’ 정도는 대접하죠.”
“응, 안 가~ 사천 쪽으론 오줌도 안 눌 거야~”
당려옥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벽은 아직 타지 않은 마지막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팽무옥이었다.
눈빛은 탁했다.
범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던 거구의 사내는 며칠 간 마치 메말라 쪼그라든 것만 같았다.
꾸벅.
팽무옥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
다그닥, 다그닥.
이벽은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목숨의 무게는 무겁다. 참으로 살려 보내는 것이 더 어렵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다.
“하아. 협객이고 뭐고, 올바른 일 하기 참 힘드네요. 찝찝하기 짝이 없네. 이래서 난 정파가 싫어~”
“까짓거, 뭐 어떠냐? 제깟 놈들이 무슨 맘을 먹건 감히 엄두도 못 내게 우리가 더 끝없이 강해지면 그만이지. 케헤!”
“얼씨구, 협객이 또?”
공손수가 파진성을 흘겨보았다. 이내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어쩌겠어요? 우리가 익숙해져야죠. 그런 성가신 사람을 따르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벽을 향했다.
“자, 이제 어쩔까요, 오라버니?”
그것은 여러 의미가 포함된 물음이었다. 산적의 추적, 의혈맹의 역습을 포함한 앞으로의 행보.
그리고… 언미희의 상태에 대해.
이벽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때, 파진성의 팔이 이벽의 어깨에 얹어졌다.
“케헤, 어쩌긴 뭘 어째? 우선 아침밥이나—”
타다다닷.
“비, 비룡대주! 이벽 소협!!”
그때였다.
소란스런 목소리에 일행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거지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지의 소속은 명백하다.
“무슨 일이오?”
“아, 비, 비룡대주! 헉, 그… 그게 긴급한 소식입니다요! 집의당주… 철면개 어르신께서 찾으십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퍽 오랫동안 달려온 듯, 거지의 온몸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우선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을 좀 해보시오.”
“그… 그게!”
거지가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지, 지금 당장 이동할 준비를 부탁드린다고… 헥, 이, 이곳에서 머지않은 인근 분타 하나가……!”
“…분타가?”
“…스, 습격을 당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