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1)
11화. 구출 (2)
타닷, 탓!
사방이 대낮처럼 밝았다.
공터가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저만치로 혁대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염의 그림자 속에서 창을 꺼내든 뒷모습은 굳건하다.
…횃불로 불을 지른 건가.
하지만 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아졌다. 그의 발치 부근에 촌장이 쓰러져 있었다.
하체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리 한쪽이 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 패여 있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위급하다.
크르르르!
그때 불길의 장벽 저편에서 무언가가 낮게 울부짖었다. 이벽의 시선이 움직였다.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일순, 몸이 움츠러들었다.
범이다. 그곳에 범이 있었다.
“크아아아악!!”
혁대웅이 마주 울부짖었다.
훙훙훙, 불길을 헤치듯 창대를 회전시킨다. 쿠웅! 그리고 땅을 두드렸다.
불길 너머에 선 범 역시 태산 같은 기세의 혁대웅을 경계하는 듯,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
빈틈을 보이면, 물어뜯긴다.
“…혁대웅.”
이벽이 조용히 다가섰다.
움찔, 혁대웅이 반응했다.
“다행이다, 벽아. 무사히 구해왔구나. 미안해. 저놈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촌장님을 해하는 통에…….”
“…….”
“부탁 좀 하자. 힘들겠지만, 촌장님과 석두를 데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 얼른.”
시선은 여전히 불길 너머의 범에게 고정한 채, 혁대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다.
남아서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내가 남겠다.”
“이벽. 염병 떨지 마.”
“…….”
“가, 어서. 네 얄상한 검으론 저놈 상대로 시간도 못 끌어. 그리고…….”
혁대웅은 숨을 들이켰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나이가 같아도 내가 사형이야.”
말에 담긴 무게.
더는 받아칠 말이 없다.
이벽은 그 즉시 촌장에게로 다가갔다. 다리의 상처는 더할 나위 없이 위중하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범의 발톱이 스쳤음에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부르르!
촌장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안색은 파리하다. 의식이 없음에도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벽은 얼른 장석두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에 묶여있는 밧줄을 풀었다.
밧줄의 끄트머리를 필요한 만큼 잘라낸 뒤 촌장의 환부 위쪽을 묶어 출혈을 막았다.
부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벽 자신의 몸보다 큰 사람을 두 명씩이나 동시에 부축할 수는 없다.
짜악!
이벽은 장석두의 뺨을 쳤다.
“어, 어……?”
“정신 차려라. 장석두.”
의식을 찾은 장석두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길 너머로 범을 보 순간.
“히이익! 으아악! 쪼, 쫓아왔어! 죽을 거야! 내, 내 멧돼지를 다 먹어 치웠어! 빨리 도망쳐야 해!”
짜악! 짜악!
이벽은 다시 장석두의 뺨을 두드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장석두의 얼굴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봐라, 네 아버지가 위중하다.”
“어… 어? 아, 아버지……?”
마침내 장석두의 시선이 쓰러진 촌장에게 닿았다. 송골송골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내가 네 아버지를 부축하고 갈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네 발로 직접 걸어야 한다. 알겠나?”
* * *
꿀꺽, 혁대웅은 침을 삼켰다.
문자 그대로 범을 마주하고 서 있다. 두렵지 않을 리 없다. 삶과 죽음이 등을 맞대고 선 감각.
그러나 그것은 익숙한 감각이기도 했다. 낙검문의 제자가 된 이후로 퍽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물론 죽어줄 생각은 없다.
공포를 넘어 상대를 마주했다.
자신의 단전이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놈 역시 마냥 멀쩡한 상태인 것은 아니다.
거죽 위에는 곳곳에 흉이 내려 앉아 있다.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 역시 두어 개쯤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쇠약해진 범이 아니면 산속의 수많은 사냥감을 놔두고서 굳이 사람을 노리진 않는다.
훙훙훙!
혁대웅은 다시 창대를 돌렸다.
기세에서 밀려선 안 된다. 허세든 뭐든, 이대로 놈이 알아서 물러가 주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러진 않겠지.
독기가 오른 맹수는 눈앞에 보이는 먹잇감을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는다.
크르르르!
또르륵, 놈의 눈이 움직였다. 붉은 눈 너머로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놈의 눈길이 향한 곳은 조금 전 자리를 떠난 그의 사제와 일행들이 사라진 방향이다.
타앙!
“어딜!”
그렇게 놔둘 순 없다.
혁대웅은 그 즉시 땅을 박찼다.
오른발을 내뻗음과 동시에 몸의 방향을 틀어 우측 반신을 앞으로 내세웠다.
오른손으로 창대의 끝자락을 붙잡고 가능한 한 깊숙이 찔러넣는다.
후우웅, 퍼억!
몸의 무게, 그리고 회전력을 실은 창끝이 화염의 장벽을 뚫고서 파고들었다.
전륜패왕창(轉輪霸王槍).
극척(極刺).
한 점에 모든 힘을 실은 찌르기.
창끝에 찔린 놈의 몸이 훌쩍 밀려났다. 아니, 그러나 손에 닿은 감각은 얄팍했다.
그르르르!
찔리는 순간 놈이 훌쩍 뒤로 물러선 것.
창끝은 놈의 거죽에 작은 생채기를 냈을 뿐이다. 그러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한 듯했다.
크허허헝!
크게 한 번 울부짖은 놈이 마침내 땅을 박찼다. 그대로 불길을 뚫고서 혁대웅에게 달려든다.
혁대웅은 즉시 온 힘을 다해 옆으로 굴렀다. 한 바퀴 구르며 창대를 휘둘렀다.
서걱!
손끝에 다시 얕은 감각이 스쳤다.
착지 후 빠르게 놈을 마주했다. 옷깃에 불씨가 달라붙었으나 신경 쓸 틈은 없다.
크허허허헝!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놈은 앞뒤 재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혁대웅은 다시금 땅을 굴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면으로 부딪쳐선 안 된다. 구르고, 피하고, 흘려내야 한다.
팔이나 다리, 몸의 어디 한 군데라도 놈의 발톱에 스치는 순간 전투 불능이 될 것이다.
즉, 죽음이다.
타앗!
그때, 놈의 몸이 허공에서 튕기듯 방향을 틀었다.
위기의 순간, 혁대웅은 다급히 창대를 찔러넣었다.
까드득!
놈의 이빨이 창날을 물었다.
창의 회전이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면, 창을 대신하여 몸을 회전시킬 뿐이다.
착지와 동시에 다시 튀어 오른 혁대웅이 창대를 붙잡고 타 넘듯이 허공을 한 바퀴 굴렀다.
타앙!
창날이 범의 입안에서 회전했다.
범의 입이 벌어진 순간, 혁대웅은 서둘러 창을 거두었다. 손바닥이 찢어져 창대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무기를 아예 잃을 뻔한 것에 비하면 아주 싸게 먹힌 것이다.
그르르르!
자세를 낮춘 놈이 다시 목청을 긁었다. 후욱, 혁대웅은 숨을 들이켰다.
가능하다. 범이라 한들 쇠약해진 놈이다. 겁을 먹지 않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그러다 보면 놈에게도 자신에게도 체력의 한계가 올 것이다.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는지 겨뤄보는 수밖에.
범과의 체력싸움이라.
터무니없구나. 피식 웃었다.
크허허허헝!
“크아아아악!!!”
놈이 혁대웅을 향해 울부짖었다.
혁대웅도 있는 힘껏 마주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먹잇감이 아님을 주장한다.
“…….”
다시 영원과 같은 찰나의 대치 순간이 지나갔다. 혁대웅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휙!
그러나 그 순간, 놈이 돌아섰다.
혁대웅이 움찔했으나 본 척조차 하지 않는다. 놈은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수풀 속으로 향했다. 이내 사라졌다.
…순순히 물러간다고?
아니, 그럴 리 없다. 혁대웅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제자리에 못 박힌 채 집중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다경 정도가 지나도 범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척조차 멀어진 듯하다.
이내 서서히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서 고통이 느껴진다.
공터의 풀을 태운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스윽!
혁대웅은 천천히 창을 거두었다. 어찌 되었든 어두운 야산 속에서 불을 잃어선 안 된다.
혁대웅은 주변에서 적당히 썩은 나무를 찾았다. 잘게 부러뜨린 뒤, 묶어서 횃불을 만들었다.
놈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은 살았다고 봐도 되려나.
혁대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니다. 벽이와 석두는 괜찮을까?
범이 아니더라도, 이 어둠 속에 위험한 것은 널려 있다. 하물며 중태에 빠진 촌장님까지 챙겨야 한다면…….
“……!”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일… 놈이 성가신 먹잇감보다 만만한 먹잇감을 택한 거라면.
“…젠장.”
탓! 부스럭.
혁대웅은 그 즉시 공터를 박찼다. 횃불을 들고서 황급히 수풀 속으로 뛰쳐 들었다.
놈이 사라진 방향은 사제 일행이 향한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
하지만 얕은 꾀를 부리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물론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앞선 일행들의 안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타다닷.
혁대웅은 정신없이 달렸다.
이벽과 일행들에 대한 걱정으로 주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부스럭, 타악!
무언가 날랜 것이 제자리를 박차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이미 늦고 말았다.
크허허허허헝!
머리 위에서 그림자가 쇄도했다.
거대한 동체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고, 혁대웅은 고개를 들어 정체를 확인했다.
빛나는 두 개의 안광.
놈이다.
놈은 영악하게도 나무 위에 모습을 감춘 채 침착하게 혁대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은 나무로 막혀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찰나의 순간, 혁대웅은 판단했다.
횃불을 버린 뒤 창을 꺼냈다. 두 손으로 창대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충격을 대비했다.
타아아앙!
창대 위로 앞발이 내려쳐졌다.
일순 혁대웅의 몸이 휘청였다.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 그러나… 빠드득, 혁대웅의 이마에 핏줄이 일어났다.
평생을 갈고닦은 육신이다.
버틸 수 있고, 버텨야 한다.
버틸 수… 있—
빠지직!
“…어?”
그 순간, 창대에 금이 갔다.
과거, 단전을 잃기 전의 혁대웅은 타고난 용력으로 말미암아 열 살 무렵부터 이미 무쇠로 만든 창을 휘둘러왔다.
그러나 지금 그가 든 창은 촌장에게 빌린 물건으로, 나무대에 날붙이를 덧댄 것에 불과했다.
타앙, 퍼억!
이내 창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졌고, 맹수의 앞발이 혁대웅의 가슴을 후려쳤다.
“커…헉.”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
그리고 맹수의 발톱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쩌억, 범의 아가리가 벌어졌고, 피로 물든 이빨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는다.
그 순간, 혁대웅의 눈앞에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본가의 식솔들, 문주님, 화정촌의 주민들, 아이들, 새로 생긴 사제.
그리고.
—야, 곰탱아.
안 되는데.
죽으면 사저한테 혼날 텐데.
혁대웅의 몸이 기울어졌다.
* * *
“어흑, 흡, 으흑흑…….”
장석두가 숨죽여 흐느꼈다.
이벽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기식이 엄엄한 촌장을 등에 업은 채였다. 촌장의 상처는 엄중하다. 한시바삐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벽의 마음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고 온 혁대웅을 생각했다.
왜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사형이라 한들 이제 겨우 만난 지 열흘 남짓에 불과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 이유 따윈 없다.
만일 그가 홀로 몸을 빼내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터.
그러나 혁대웅은 기꺼이 미끼 역할을 떠맡았다.
—내가 사형이야.
“…….”
사형제란 무엇이지?
이벽은 생각했다. 그것은 이벽이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자신 혼자서는 절대로 그 답을 알 수 없다. 고로 혁대웅에게 그 의미를 물어봐야만 한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설령 범의 아가리에 몸을 던지는 꼴이 될지언정, 이벽의 마음은 계속해서 다시 돌아서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촌장은 의식이 없다. 그리고 장석두는 다리를 절뚝이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을 마을까지 무사히 데려가는 것이 혁대웅이 자신에게 양보한 역할이다.
따라서 제대로 해내야만 한다.
마을을 향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벽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이벽은 저만치 앞에서 불빛을 발견했다. 아니, 불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무리를 이룬 횃불들.
마을의 장정들이다. 촌장은 그들에게 돌아가라 일렀지만, 끝끝내 그들은 다시 모여서 길을 나선 모양이었다.
웅성웅성.
이내 저쪽에서도 장석두의 손에 들린 횃불을 발견한 듯,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라. 어서.”
이벽은 그 즉시 흐느끼는 장석두에게 촌장을 넘겼다. 그리고 지체 없이 돌아섰다.
“허엉, 헝! 흐, 하히마흐, 흐흑!”
등 뒤에서 장석두가 흐느끼며 무어라 말했으나 신경 쓸 틈은 없다.
타다닷!
이벽은 땅을 박찼다.
왔던 길을 빠르게 되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