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2)
12화. 구출 (3)
타다닷!
이벽은 발을 놀렸다.
가파른 산길을 내달렸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다 해도 자신이 범을 상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
혈육이었던 협은 등을 찔렀고, 아무런 관계도 없을 혁대웅은 목숨을 걸고 퇴로를 만들어주었다.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형님, 정말로 몰라서 묻는 말입니까? 끝까지 아둔하기 짝이 없군요.
또다시 기억이 스쳤다.
으득, 이벽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억, 헉.”
이내 숨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내공이 없는 몸뚱아리는 산길을 조금 달린 것만으로 금세 한계를 호소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다.
이벽은 그 사실에 분노했다.
몸의 신호를 무시하며 내달렸다.
타아앙!
그때, 정면 어딘가에서 묵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숲 저편에서 다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벽은 달렸다. 그리고 보았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풍경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범의 앞발에 부딪힌 혁대웅의 창대가 부러졌고, 발톱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혁대웅이 뒤로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범에게 짓밟혔다.
“…안 돼.”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탓, 후우욱!
그리고 위기의 순간 이벽의 몸이 거짓말처럼 공간을 도약했다.
신형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표홀했다.
청강유엽신법(淸江流葉身法).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벽의 손이 검을 향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발검제이식(拔劍第二式).
쾌검(快劍).
번쩍!
한 줄기의 섬광.
그리고 다음 순간 이벽의 검은 이미 범의 등을 사선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거죽을 뚫고서 긴 자상을 새겼다.
크아아아아!
범이 몸부림치며 물러섰다.
털썩, 혁대웅이 땅에 쓰러졌다.
명백히 죽음을 직감했으나 아직 죽지 않았다. 혁대웅은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다 이내 옆을 향했다.
상황을 파악한다.
“이…벽?”
“…….”
눈앞에 선 사제를 발견했다.
“…범을 베었어? 큭, 어, 어떻게 한 거야?”
“…잘 모르겠다.”
크르르르, 크르륵!
웅크린 범이 낮게 울부짖었다.
이벽의 검이 긴 상처를 입혔음에도 도망치기는커녕, 분에 휩싸인 듯 눈에는 핏발이 섰다.
“아니, 그보다… 왜 왔어?”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허.”
혁대웅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훅 인상을 찌푸렸다.
가슴팍이 저며지는 것 같다.
“지금, 큭! 그게 할 말이냐. 공연히 같이 죽게 생겼잖아. 이, 답답한 사제 놈아.”
“…아니, 죽지 않는다.”
우웅!
이벽은 몸 안에 흐르는 내력을 느꼈다. 거친 호흡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것은… 생명을 담보로 쥐어짜진 힘이다.
그리고 시시각각 소모되고 있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어? 너, 너 설마 내력을……?”
“…….”
쓰러진 혁대웅을 뒤로 하며 이벽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다시금 범을 마주했다.
동시에 빠르게 생각했다.
남은 내력으로 미루어 청강유엽검식은 더는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청강검식뿐이다.
타앗!
시간은 이쪽의 편이 아니다.
이벽은 그 즉시 달려들었다.
크허허헝!
분노한 범이 마주 함께 달려들었다.
후웅!
그리고 충돌 직전, 범의 앞발이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졌다.
이런 걸 정면으로 받았다간 온몸이 으스러질 테다. 허나… 방어에 할애할 내력은 없다.
후욱!
이벽의 검이 움직였다.
청강검식의 회검식을 펼쳤다.
슥, 스윽!
유(柔)의 묘리를 담은 검이 회수되며 범의 앞발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그 안에 담긴 힘을 틀어버렸다.
타아앙!
“컥.”
범의 앞발이 위로 튕겨 나갔다.
허나 그 안의 모든 힘을 전부 떨쳐낼 수는 없었다. 남은 충격이 검을 타고 이벽의 기혈에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 온몸이 경련했다.
허나 이 틈을 놓쳐선 안 된다.
터질 것 같은 두 팔을 억지로 붙들며 이벽은 거둔 검을 다시 내뻗었다.
발검식, 직(直)의 묘리.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졌다.
푸욱, 범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크허헝!
일순 범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벽은 이를 악물었다. 거죽은 질기고 갈빗대는 돌처럼 단단하다. 허나 이대로 쑤시기만 하면 끝이다. 내력을 쥐어짜면 어떻게든—
울컥!
그때, 핏물이 치솟았다.
이벽은 얼른 도로 삼켰다. 허나 일순 온몸에 힘이 빠졌고, 검 끝에 빈틈이 생겼다.
크허허헝!
그 틈을 타 범이 포효했다.
쩌억, 아가리가 벌어졌다. 피와 살점으로 얼룩된 범의 이빨이 이벽의 얼굴로 들이 밀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벽은 생각했다. 이대로 틀어박으면 동귀어진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놈의 육신은 무쇠와 같다.
죽는 것은 자신뿐일 것이다.
훅, 이벽의 검이 회수되었다.
회검식 변(變)의 묘리가 펼쳐지며 범의 몸 주위를 어지럽게 수놓았다. 거죽 위에 자상을 남겼다.
타앗!
그리고 이벽은 성큼 물러섰다.
“…….”
이벽과 범이 마주했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흘렀다.
조금 전의 회검식으로 이벽은 내력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을 느꼈다. 그리고.
“커헉.”
이벽은 각혈했다.
더는 허세조차 부릴 수 없다.
푹, 검 끝으로 땅을 짚었다. 쓰러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그르르르, 낮게 울부짖는 범.
그것은 마치 비웃음과 같았다. 이벽에게 남은 힘이 없음을 눈치챈 듯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척.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그때, 거구의 그림자가 이벽의 앞을 가로막았다.
“…혁대웅.”
“혹시나 기대했는데… 역시나 무리잖아, 인마. 됐으니까 다시 도망쳐, 얼른.”
혁대웅은 반 토막 난 창을 짧게 바투 쥐었다.
솔직히 서 있는 것조차 힘겹다.
울컥울컥, 움직일 때마다 가슴께에서 피가 샘솟는다. 그러나 둘이나 죽을 필요는 없다.
뭣보다 지금 이벽이 보여준 한 수를 생각한다면… 문주님과 사저를 위해서라도 살려서 보내야 한다.
“…싫다. 네가 가라.”
그러나 이벽은 고개를 저었다.
기어코 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아, 가라고.”
“싫다.”
혁대웅이 한 발 나섰다.
그러자 이벽도 한 발 나섰다.
“거 말 더럽게 안 듣네.”
혁대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사저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크허허헝!
타앗, 범이 자리를 박찼다.
이제는 물러서기엔 늦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일제히 무기를 내뻗었다.
검과 창.
허나 성난 범의 발톱에 맞서기에는 어느 쪽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툭 치면 그대로 꺾여나갈 듯 힘없는 공격이었다.
서걱!
그러나 다음 순간.
범의 앞발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아이고, 죽 쒀서 개 줄 뻔했네~ 어떻게 주워 모은 제자들인데 똥개 새끼가 감히?”
* * *
“끙차.”
이진천이 등에 업은 인영을 너른 풀밭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창백한 안색의 제갈소미였다.
“사, 사저?!”
“걱정 마라. 그냥 탈진했을 뿐이니까. 모자란 사제 놈들 죽을까 봐 산 아래까지 단숨에 죽어라고 뛰어 왔더구만.”
쌔액쌔액, 가쁜 호흡을 내쉰다.
가슴을 부여잡은 혁대웅이 비척거리며 다가갔다. 제갈소미 앞에 주저앉았다.
“뭐, 덕분에 살았네. 그치?”
그리고 이진천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씩 웃는다. 범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태평한 얼굴.
“…….”
이진천의 손에는 눈에 익은 비도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제갈소미의 물건을 빌린 듯했다.
우웅!
손바닥만 한 검신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빛은 다시 검 안쪽으로 갈무리된다.
뚜렷한 형체를 이루었다.
검강. 순수한 내력의 결정체.
크르르르르!
발 하나를 잃은 범이 낮게 웅크렸다. 그러나 달려들지도, 돌아서서 도망치지도 못한다.
본능으로 움직이는 짐승이기에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님을 더욱 잘 느끼는 것.
저벅!
“미안하지만 못 살려주겠네.”
이진천이 발을 뗐다.
“봐봐. 네가 엉망으로 만든 우리 애들 몸 보신시키려면 돈이 깨질 것 같거든? 그러니 네 뼈와 살과 가죽을 좀 받아 가야겠어.”
크허허헝!
범이 울부짖었다.
오랜 시간 동안 산의 왕으로 군림해왔던 존재로서 마지막 아성을 담아 땅을 박찼다.
이진천은 마주 걸었다.
흡사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
그리고 달려든 범이 스치는 순간 스윽, 허공에 칼을 그었다. 그것은 제대로 된 초식조차 아니었다.
흰 선의 궤적이 그어졌다.
푸확!
범의 목덜미 아래쪽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턱, 범은 땅에 내려앉았다.
잠에 빠져들듯 스르르 무너졌다.
“안 죽어줘서 고맙다, 얘들아.”
* * *
일행은 화정촌으로 돌아왔다.
탈진한 이벽과 의식이 없는 제갈소미, 중상을 입은 혁대웅, 이진천은 셋 모두를 업고 부축하고 이끌었다.
어두운 산길을 어떻게 헤치고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뚜렷하지 않다.
좌우간 낙검문의 처소에 들어선 이벽은 그대로 쓰러졌다. 죽은 듯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선우벽은 세가에 있었다.
넓고 잘 정돈된 연무장에서는 무사들이 호령에 맞추어 일제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세가의 구성원들 대다수는 많건 적건 어느 정도씩은 선우씨의 피를 이은 혈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하관계는 엄격했다.
선우세가는 설령 가까운 핏줄이라 한들 무재가 없는 이를 높이 대우해주는 곳은 아니었다.
경쟁은 치열했다.
선우벽은 가주 선우각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종을 어머니로 두었고, 방계 후손이 되었다.
직계 후손으로서 인정받은 것은 청강검식으로 같은 세대의 제자들 모두를 꺾은 이후였다.
태어난 지 십 년이 지난 후에서야 친부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는 건 퍽 이상한 일이다.
좌우간 선우벽은 검에 몰입했다.
베어야 할 것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든지 있었다. 검을 휘두를수록 선우벽은 단순해졌고, 강해졌다.
—형님, 저는 뭐가 문제일까요?
반면 협은 늘 무거워했다.
무재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쉬이 단순해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협은 결국 그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성장을 이루곤 했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에게 의존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선우벽은 협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또한 괜찮다고 생각했다.
욱씬, 또다시 고통이 스쳤다.
“…….”
이미 흘러간 기억이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으나, 고통으로 박힌 기억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그뿐이다.
나아가기 위해선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선우벽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벽은 눈을 떴다.
낙검문의 처소.
창밖에서 청명한 햇살이 비쳐들었다. 어딘가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고기를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드륵!
이벽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흥흥~ 흥~”
연무장 한복판에는 장작이 불타고 있었다. 이진천이 쭈그리고 앉아 꼬챙이에 꿴 고기를 잔뜩 굽고 있다.
한쪽에는 잘 벗겨진 범의 가죽이 빨랫대에 널려 있었다. 그 옆에는 발라진 뼈가 허옇게 쌓여있다.
그렇다면.
구워지고 있는 고기의 정체는…….
“…….”
이벽은 왠지 식은땀이 흘렀다.
“에휴, 냄새도 좋다~ 이 좋은 걸 풍류도 모르는 애송이들한테 먹여야 한다니~ 아이고 아까워라~”
슥, 이진천이 꼬챙이 하나를 집었다. 냠냠 씹다가 이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움찔, 놀란다.
“…오, 일어낭니?”
우물우물 꿀꺽, 황급히 삼킨다.
“이,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로…….”
타다닷, 찰싹!
“아 쫌! 그만 좀 처먹으라니까!”
그때, 어디선가 달려온 제갈소미가 이진천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리고 손에서 꼬챙이를 뺏어버렸다.
“뭘 잘했다고 자꾸 처먹어요! 다친 제자들 먹일 걸 훔쳐먹는 문주가 세상천지에 어딨어요!”
“하, 하지만 내가 잡은 건데…….”
“닥쳐요! 애초에 문주님이 술 퍼마시고 기녀랑 노닥거리러 마을을 내려가지만 않았어도 아무도 안 다쳤을 거 아냐!”
말문이 막힌 채 시무룩해지는 이진천. 제갈소미는 꼬챙이를 다시 불 곁에 꽂아두었다.
문득 이벽과 눈이 마주쳤다.
“…흠흠.”
헛기침을 하는 제갈소미.
저벅저벅, 이벽에게로 다가왔다. 얼마간 말없이 쳐다보다가 슥, 제갈소미의 손이 움직였다.
“잘했다, 꼬맹아. 칭찬해줄게.”
움찔, 이벽은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제갈소미의 손에는 칼도 붓도 들려있지 않았다.
“…이번엔 뭐지?”
“뭐기는. 칭찬이라니까.”
탁, 제갈소미의 손이 이벽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슥슥,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덕분에 무사해. 촌장님도, 석두도, 그리고 우리 집 곰탱이도. 뭐, 가슴팍이 걸레짝이 되어서 뻗어있긴 하지만.”
“…….”
어색한 공기.
이벽은 제갈소미를 바라보았다.
“에휴, 됐다. 오늘은 이 사저께서 특별히 고기를 구워줄 테니 얌전히 쉬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