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29)
133화. 검존과 무봉
난데없는 피리 소리. 허나.
곡조는 봄바람처럼 온화했다. 따뜻한 음색이 살랑이며 이벽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화악.
꽃이 만개하는 환영이 스쳤다.
“……!”
이벽의 검이 멈추었다.
꽃은 찰나처럼 피고 저물었다. 허나 곡조가 끝난 이후에도 이벽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벽의 몸 안에서 성난 급류처럼 내달리던 적파심공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느슨해졌다.
덥석.
그때, 발목이 다시 붙잡혔다.
“…소, 소협, 제발.”
“…….”
이벽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관채령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스승의 검에 짓이겨졌음에도 스승을 구하고자 한다.
문득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녀도, 남궁천수도 아니게 되었다. 이벽은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만치 주루를 둘러싼 담장에 걸터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월향?’
피리를 든 여인은 지난밤 잠깐이나마 자리를 함께했던 기녀 월향이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소리 없이 땅으로 내려섰다. 이벽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벽은 작은 혼란에 빠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는 분명 월향이었으나, 동시에 이벽이 기억하는 월향이 아니었다.
마치 하룻밤 사이 몇 년이 흘러가 버린 듯, 그녀는 소녀가 아닌 묘령 이상의 여인이 되어있었다.
“소협, 그자를 베실 건가요?”
마침내 다가선 월향이 물었다.
“…잘 모르겠군.”
“주제넘은 이야기입니다만, 소협. 남궁세가와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검을 거두심이 어떨까요?”
“…….”
앗아버린 목숨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이벽으로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언미희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인질로 붙잡힌 언미희를 생각했을 때, 베는 것과 베지 않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일지 섣불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협께서 허락하신다면, 그자의 신원은 제가 수습하지요. 그래 봬도 남궁세가의 혈통이니 협상의 가치는 있지 않겠어요?”
그때, 이벽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다시 월향이 말했다.
“…….”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철컥,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월향입니다. 벌써 잊으셨나요?”
“…….”
후훗, 월향이 작게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소협. 사실 지난밤에는 가벼운 주안술로 소협의 마음을 어지럽혔네요. 사내 앞에서 어려 보이고 싶은 뭇 여인의 마음이니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월향이 품 안으로 피리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기녀 월향이라 합니다. 모자란 몸이나마 수호대에 적을 두고 있답니다.”
“……!”
* * *
호북성 무당산.
일찍이 송대(宋代)에 시조 장삼봉 진인이 터를 잡은 이래, 그 신령스런 산의 봉우리과 계곡 곳곳에는 깨달음을 원하는 수많은 도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내 그들은 무당파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굳어졌으며, 다시 그 이름은 지난 수백여 년간 도가의 성지이자 정파무림의 한 축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무당의 산기슭에 자리한 해검지(解劍池)는 그러한 무당의 위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그 어떤 무인이라 해도 그 앞을 지나칠 때에는 일단 멈춰서 검을 풀어야 하며, 본산의 허락 없이는 감히 이를 어길 수 없다.
그 엄격한 규율 앞에서는 심지어 같은 무당의 제자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탓, 탓.
소녀는 아랑곳 않고 해검지를 지나쳤다. 검을 풀기는커녕 발걸음조차 멈추지 않았다.
“그만! 멈추시오! 그대는 지금 감히 본산의 규율을— 아, 아니, 사고?!”
이내 해검지 앞을 지키는 무당파의 청 자배 젊은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소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일제히 행동이 멈추었다. 감히 그 앞을 막아서지 못한다.
휘휙.
소녀는 그런 제자들을 지나쳤다.
산기슭을 오르는 그 발걸음은 평지를 걷듯 표홀했으나, 다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이내 소녀의 눈앞에 무당파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현문이 나타났다.
그 앞을 지키고 선 것은 중년의 도인이었다.
“…사매?”
중년 도인의 눈썹이 흔들렸다.
도인은 당금 무당의 이대제자 배분에 해당하는 현자 배의 현철(賢鐵)이었다.
소녀, 송영영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제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현문을 넘어설 수는 없다.
꾸벅,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솜털도 마르지 않은 소녀가 중년의 도인에게 행하는 인사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모양새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건방지다 여길 수도 있다. 허나.
“아니, 이게 누구신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찌 된 일인가, 사매? 장문인의 특명은 어떻게 되었고?”
현철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은? 안에 있지?”
“다행히도 그렇다네.”
“빨리. 나 지나갈래. 얼른.”
송영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허헛, 현철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소녀, 송영영은 나이로는 청 자배 아이들보다도 어린 편에 속하며 심지어는 도호조차 받지 못한 속가제자였다.
허나 동시에 장문인 태허진인의 직전제자이며, 따라서 배분으로는 자신의 사매에 해당했다.
“본래는 물론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어허, 공연히 시간을 끌면 사매가 나한테 칼을 뽑을 것 같으니 이거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구만?”
현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 즉시 한켠으로 비켜서며 산문을 열어주었다.
“자, 지나가시게.”
“…고마워, 사형.”
“허헛, 별말을 다 하는군.”
꾸벅, 송영영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즉시 산문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현철은 빠르게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의 입가에 호젓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 송영영은 불과 몇 년 전 바깥으로 유람을 나갔던 장문인이 손수 데려온 아이였다.
물론, 그 자체론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속세에서 연이 닿은 아이를 데리고 와 본산의 제자로 삼는 것은 도가에서는 퍽 흔한 일이다.
문제는 장문인이 그 아이를 청자 배에 넣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직전제자로 삼아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즉, 졸지에 열 살배기 계집아이가 무당파의 중견이라 할 수 있는 현자 배와 같은 배분이 되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논란이 없지 않았다.
허나 누구도 장문인이자 정도맹주인 태극검존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다만 그 이후 한동안 경내에는 그녀가 장문인이 숨겨두었던 딸이라느니 하는 불경한 소문이 나돌았다.
허나 이제는 모두 옛날 얘기였다.
송영영이 자신에게 따라붙은 그러한 소문들을 재능으로써 전부 일축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청 자배 제자들을 가볍게 압도했으며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여, 채 묘령조차 되지 못한 나이에 검끝으로 태극을 그려냄으로써 차고 넘치는 자격을 스스로 증명해내었다.
이제는 모두가 장문인의 안목을 칭송했으며, 그녀야말로 무당의 미래라는 것에 의심을 품는 이는 더 이상 없었다.
타앗.
송영영은 경내를 가로질렀다.
이내 그녀를 발견한 제자들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으나, 더 이상 그녀가 멈춰서는 일은 없었다.
콰앙.
이내 무당의 중심이자 장문인의 거처가 마련된 상청궁(上淸宮)이 나타나자 송영영은 냉큼 안으로 뛰쳐 들었다.
궁내는 퍽 복잡했으나 그녀에게는 마치 어릴 적부터 나고 자란 앞마당과 같아서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몇 개의 사당을 지나치자 이내 작은 야외가 나타났다. 정원이라 말하기에도 어려운 공터였다.
“오, 왔느냐, 제자야.”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곳에는 노인이 있었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담뱃대를 문 작은 체구의 노인이야말로 정도맹주이고 무당의 장문인이며 천하십대고수인 태극검존 태허진인이었다.
“…장문인.”
마침내 태허진인을 만난 송영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긴장을 넘어 안도감이 스친 것이다.
사제지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헌데 말이다. 다시 돌아올 땐 ‘네 사제’를 데려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혼자인 게냐?”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뿜어낸 태허진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
송영영은 침묵했다.
그녀는 현재 태허진인의 가르침을 받는 유일한 제자이며, 배분상으로도 현자 배의 막내에 해당한다.
고로 사제따윈 없다. 허나.
그 말이 누굴 가리키는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산 아래에 있어.”
“왜 안 올라온 대냐?”
“아직 덜 꼬셔졌어.”
“허허! 콧대 높은 소도장이로고.”
허허롭게 웃은 태허진인이 이내 땅 위로 내려섰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사람 좀 빌려줘.”
송영영이 말했다.
“예끼, 그게 무슨 말이더냐? 대저 사람이란 천지에 존재하는 만물의 중심으로서 감히 빌리고 빌려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말은 됐고. 남궁세가로 갈 거야. 그러니까 최소 절정 이상.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뭐라?”
태허진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미묘하게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이 잠시 송영영을 향했다.
“…에잉, 쯧쯧. 잘 타일러서 데려오라 일렀더니 오히려 네가 넘어가 버리면 어쩐단 말이더냐?”
“그런 거 아냐.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도와주면 더 잘해볼게. 거의 넘어왔단 말야.”
“어허! 어불성설이로다! 말인즉슨 그놈한테 환심 한 번 얻어 보자고 지금 의혈맹과 전면전이라도 하잔 말이더냐?”
“…….”
송영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나중에 싸울 거잖아.”
“아니,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이더냐? 정도를 걷는 동도들끼리 싸우긴 왜 싸워?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도 말거라!”
노인의 목소리는 짐짓 단호했다.
허나 송영영은 그 뒤에 감춰진 노인의 진짜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더.
“…노인네 음흉해.”
“껄껄, 어쩔 수 없잖느냐? 이 늙은 몸에 걸려있는 목숨들이 대관절 몇 개인지, 그 무게를 네가 알기는 아느냐?”
노인이 다시 웃었다.
“아직은 아니다, 제자야. 뭣보다 내가 얻는 것도 없이 괘씸한 사파의 애송이를 왜 도와야 하느냐?”
쩝, 태허진인은 입맛을 다셨다.
세간에서 말하는 오룡이니 삼봉이니 하는 그런 어쭙잖은 허명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노도사가 원하는 것은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수준의 재목뿐이며, 그 외에는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이 아이의 재능을 몰라볼 리 없다.
진짜 재목은 서로를 알아본다.
음과 양은 이끌릴 수밖에 없다.
“…속물. 그러고도 도사야?”
“허헛, 잘 알지 않느냐, 제자야? 도사라는 건 즉, 아직 신선이 못 되었다는 뜻이란다.”
“…….”
후욱.
다음 순간, 송영영이 발검했다.
노인이 서 있던 공간을 찌르고 들어갔다. 허나 태허진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허, 아직은 안 된다, 제자야. 이 무당파를 네 맘대로 주무르고 싶더냐? 얼마든지 그러거라. 허나 아직 오십 년은 이르단다.”
노인은 어느새 송영영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쳇, 늙은이. 말코.”
“너도 말코란다, 제자야.”
“나는 안 늙었어.”
“너도 곧 늙을 거란다, 제자야.”
“…싫어.”
그리고.
검과 담뱃대가 부딪혔다.
헌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태극과 태극이 맞닿는 자리에 충돌은 없다. 힘은 고스란히 상대에게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몇 번의 주고받기가 이어지자 이내 그 안에 자리한 힘은 감당할 수 없이 증폭되었다.
최소한 송영영에게는.
“칫.”
“허헛, 허허헛! 허헛!”
타앙.
마침내 송영영의 검이 날아갔다.
“좀 늘었구나, 제자야.”
“…진짜 이러기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다.”
“…….”
송영영의 눈이 잠시 노인을 노려보았다.
허나 노인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오면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것임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예상한 대로였다.
송영영은 내심 포기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각자의 역할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비룡대원들의 얼굴들이 눈앞을 스쳤다.
—뭐, 이판사판이긴 하지만 부디 죽지만 말고 잘 버티고 있으라고! 그다음은 우리가 어떻게든 구해줄 테니 말야, 케헤헤!
—그래요. 말 그대로 ‘어떻게든’이네요. 오라버니께는 늘 면목이 없지만… 우리 꼭 언니를 구해요. 어떻게든요.
‘어떻게든’이라고 했다.
또다시 혼자 소외되는 기분은 싫다. 다음 순간, 송영영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몰라. 삐뚤어질 거야.”
그것은 술병이었다.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제, 제자야, 네가 술을…? 어, 어디서 그런 못된 버릇을 배웠더냐?! 어, 어찌 신성한 경내에서……?!”
노인이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허나 송영영은 멈추지 않았다. 터엉, 이내 텅 빈 술병을 땅 위에 내팽개쳤다.
“끄윽!”
그리고 소매로 입을 훔쳤다.
삽시간에 붉어진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던 송영영의 몸이 비틀, 흔들렸다.
풀썩.
“제, 제자야—?!”
“아아아아! 고수 내놔아아아아!”
땅에 쓰러진 송영영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백색의 도복이 흙범벅이 된다. 필살의 나려타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