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53)
157화. 흐린 하늘
쏴아아.
창밖에서 비가 내렸다.
홀로 객실의 침상에 앉아 내상을 다스리던 이벽은 문득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에서의 사건 이후.
각자의 ‘입장 정리’를 위해 월향과 철면개가 마련한 자리는 생각지 못했던 결론과 함께 흐지부지 끝이 났다.
입장 정리라고는 했으나, 결국 제대로 입장을 밝힌 것은 본래부터 녹림과 혈교의 뒤를 쫓고 있었던 개방과 하오문에 그쳤다.
양호명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난 이야기인 것 같다며 슬쩍 발을 빼었다.
암영각의 공손욱과 천소연 역시 침묵했고, 호남의 세 문주들 또한 섣불리 뜻을 굳히지는 못했다.
허나 어찌 되었건 월향과 철면개는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애초에 자리를 마련하기 이전, 이벽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두 사람은 명확한 결론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온갖 이해관계들로 복잡하게 뒤엉킨 당금의 세력판도에서 ‘믿을 수 있는’ 이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흑천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의혹을 느낀 적은 없으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겠노라 했다.
“…….”
녹림, 혈교, 흑천방.
그것은 이벽의 억측이었다.
호남의 정파를 습격한 흉수들의 진짜 정체가 누구였건 간에 연결고리를 주장할 근거로는 한없이 빈약하다.
그러나.
이벽은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심지어는 입 밖으로 내었다는 것이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럽게도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찜찜한 감각이 스쳤으나, 어찌 되었건 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이내 저마다 심신을 수습하여 떠날 채비를 마친 이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자 이벽을 찾아왔다.
우선은 공손욱과 천소연이었다.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패왕가와 흑천방 간의 문제라면 우리 암영각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키는 것이네.”
“…….”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암영각주 천막심은 말했다.
이벽이 살아있는 한 암영각의 칼날이 패왕가를 겨누는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그 칼이 흑천방을 겨눌 이유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 나서서 도와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것은 없네. 이번 일은 그저 암영각의 방식대로 ‘의뢰’를 받아 움직였을 뿐이니.”
“…의뢰?”
이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듣자 하니 우리 애가 무려 소림의 소환단을 집어먹었다면서요? 그 정도면 부모가 움직일 만하죠~”
천소연이 답했다.
그것은 물론 갖다 붙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허나 이 두 사람에겐 움직임에 대한 ‘명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자네, 내 말 잊지 말게나.”
그때, 공손욱이 다시 말했다.
“경신공을 갈고닦게. 또한 필요하다면 그 외의 어떤 잡기도 마다하지 말게.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검의 날카로움 뿐만이 아니네.”
“…….”
남궁세가 태상 장로들의 추적으로부터 달아나던 때, 공손욱은 이벽을 업고 달리며 그런 말을 했었다.
또한 그것은 이벽으로서도 이미 느끼고 있던 바였다.
“자네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네.”
“……!”
공손욱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목숨은 한 개뿐이므로 죽어서는 안 된다. 허나 그런 당연한 말을 꺼내는 의미는 명백했다.
이벽이 ‘살아있는 한’ 암영각은 패왕가를 적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벽이 얻어낸 약속이었다.
그것은 분명 암영각주의 입장과는 다른, 남촌장 공손욱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현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대혀업~?”
불쑥, 천소연이 다시 끼어들었다.
“뭐예요, 그 딱딱한 호칭은? 집어치워요. 우리가 남인가요? 됐으니까 어서 아버님이라고 해봐요.”
“……!”
흠칫, 이벽이 흔들렸다.
허나 동요한 것은 이벽 뿐만이 아니었다. 공손욱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벽은 사내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벽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공손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됐네, 하지 말게. 자네에게 내가 아버님이라고 불릴 이유는 터럭만큼도 없으니.”
“…푸풉, 푸흐흡!”
천소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
그리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객잔을 떴다. 장강을 건너 강서의 암영각으로 향했다.
다음으로 이벽을 찾아온 것은 호남 사파를 대표하는 채무근과 우진희, 전사욱이었다.
“무하핫! 잘 있으시오, 대주! 이 채무근이가 그래도 간만에 사람다운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하구려!”
이벽의 손을 붙잡은 채무근이 위아래로 붕붕 마구 휘둘러댔다.
“…세 분께는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좌우간 이번 일로 입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진희가 이벽의 말을 끊었다.
“감사는 남들끼리나 하는 거죠. 대주께선 이미 우리 호남의 영웅이신데 대체 우리가 아니면 누가 대주를 돕는단 말인가요?”
오호홋, 우진희가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렸다. 이벽이 애매한 표정을 띄우자 전사욱이 말을 받았다.
“음, 맞는 말이지. 혈교인지 녹림인지는 둘째치고, 우리 금강회 동맹을 먼저 호남에서 치워버리려고 한 건 흑천방이오. 그러니 암영각과는 달리 우리에겐 소협과 패왕가 외의 선택의 여지가 없지.”
“…….”
틀리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러니 부디 이상한 데에서 죽지 말고 무럭무럭 커 주세요. 정 죽을 것 같으면 언제든 호남으로 도망쳐도 된답니다. 오호홋!”
우진희가 다시 웃음으로 말을 맺었고 탕, 탕, 채무근이 이벽의 등을 두드렸다.
“무하하핫! 어디 이를 말이겠소! 비룡대주께선 누가 뭐래도 우리 호남의 영웅 ‘낙검신룡’이시외다!”
그렇게.
이벽은 세 문주부터 또다시 ‘죽지 말란’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세 사람 역시 호남을 향해 떠나갔다.
“…….”
‘나’는 관계 속에 존재한다.
처음은 화정촌의 사형제들이었으며, 그다음은 비룡대였다. 그러고도 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늘어왔다.
낙검신룡.
퍽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쏴아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저벅, 이벽은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다가가자 빗물에 젖어 우수수 흔들리는 버들잎들이 보였다. 저만치에 펼쳐진 장강의 모습은 퍽 절경이었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화정촌을 떠나온 것이 새해가 밝았던 무렵이었으므로 반년 이상을 떠돌아다닌 셈이 되었다.
문득 달착지근한 비 냄새 사이로 희미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오직 이벽에게만 맡아지는 냄새였다.
이벽은 화영지정을 떠올렸다.
월향의 고요한 피리 소리는 이벽의 머리에 각인되었고, 이벽은 살기를 가라앉힐 힘을 얻었다.
어쩌면… 그것은.
첫 살인과 함께 심마를 얻은 이벽이 사패련을 나선 이래 줄곧 찾고자 했던 바로 그 힘일지도 모른다.
해답은 이미 하오문에 있었다.
우연치고는 퍽 얄궂은 일이었다.
허나.
호남무림에서 낙검신룡이 되었던 그 날, 동정호에 가라앉은 이벽은 무림행의 ‘결말’을 찾지 않고는 화정촌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우쳤다. 그리고.
결말은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림에 얽혀들수록, 화정촌으로 돌아갈 날은 점점 더 막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언미희는 심신에 상처를 입었고, 남궁세가와는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쌓았으며, 혈교의 자취를 추적하는 일은 요원할 뿐이었다.
‘…어쩌면 이대로는.’
툭.
무서운 생각이 스치던 찰나였다.
문득 창살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빗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피식, 이벽은 가볍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그러지 않아도 슬슬 찾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공손수, 재미있나?”
“그럼, 재미있고 말고!”
“……!”
허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걸걸했다. 당황한 이벽이 황급히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쏴아아.
그리고 객잔의 외벽에 달라붙은 채 ‘드러누워’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시, 신개, 여긴 어쩐 일로……?”
“헐헐, 어쩐 일은! 비는 쏟아지는데 이 불쌍한 거지가 도무지 갈 데가 없어서 말일세! 괜찮으면 좀 들여보내 주지 않겠나?”
* * *
“…들어오시오.”
“헐헐! 고맙네.”
이벽은 얼른 창가에서 비켜섰다.
이내 개방주 취풍신개가 훌쩍 안으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비가 무색하게도 그의 옷자락은 전혀 젖지 않았다.
그리고.
이벽과 거지가 마주하고 앉았다.
“…….”
개방주 취풍신개.
앞서 철면개는 그가 이미 이 근방을 떠났노라 말했다. 등장은 퍽 갑작스러웠으므로 이벽은 꺼낼 말을 잠시 고민했다.
“…우선은 감사드리겠소.”
꾸벅, 이벽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은 남궁세가와의 충돌을 승리로 이끈 것은 취풍신개 단 한 명의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당장은 말뿐인 감사인지라 퍽 송구스럽소만, 어쨌건 목숨을 건졌소. 신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에헤이, 이 사람! 그러지 말게!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사과를 해야지, 자네가 왜 감사를 하나?!”
허나 취풍신개가 손사래를 쳤다.
“나 원, 공연히 잘못된 판단으로 남의 집 귀한 후계를 데려다가 개죽음만 당하게 할 뻔하지 않았나? 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가는 하마터면 사패련주와 생사결이라도 벌일 뻔했어!”
“…….”
이벽은 머쓱해졌다.
공손욱도, 그리고 호남의 세 고수도, 그리고 취풍신개마저도 당연하다는 듯 이벽의 감사를 마다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취풍신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험, 험!”
무언가 꺼낼 말이 있으나 섣불리 꺼내기 어려운 듯, 이벽의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반복한다.
“…….”
천하십대고수가 눈치를 본다.
진귀하다면 진귀한 광경이었다.
“…크헐!”
문득 취풍신개가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그래. 내 소림에서 자네에게 하늘을 보여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만큼의 ‘사다리’를 쌓았는가?”
“……!”
사다리.
알 듯 말 듯 모호한 말이었다.
“과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일세. 자네 같은 제자를 가진 녀석은 얼마나 좋을꼬! 쯧!”
“…과찬이시오.”
어흠어흠, 취풍신개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가? 자네가 원한다면야… 내 며칠 자네 곁에 머물면서 ‘훈수’를 조금 더 해줄 수도 있네만.”
“……!”
그것은 물론 이벽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이야기였다.
허나 이벽은 취풍신개의 제자도, 하물며 개방도도 아니다. 지나치게 듣기 좋은 제안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감사한 말씀이오만, 그래서 신개께서 내게 정말로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이오?”
“그게… 후우.”
취풍신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을 좀 해봤는데 말일세. 남궁천승 그놈을… 내가 흥분을 하는 바람에 좀 심하게 두들겨 패지 않았나?”
철면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
말마따나 이벽은 그때, 초절정고수가 그저 뺨을 맞는 것만으로 죽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본래 ‘우리’들끼리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나름의 규칙이라서 말일세. 헌데 내가 그런 짓을 해버리는 바람에… 아무래도 이대로는 진짜로 사달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더군.”
‘우리’들.
이벽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천하십대고수,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들은 당금의 강호무림에서 좀처럼 전면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래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다른 고래 역시 나설 수밖에 없으며, 결과가 어떻게 되건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내 어떻게든 무마를 좀 해보려고 빠르게 움직였네. 근데 문득 드는 생각이… 어쩌면 나 혼자서는 공연히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렇군.’
이벽은 이어질 말을 짐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아직까지도 황보혁이가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자네를 괴롭히는지 모르지?”
“그렇소.”
“어때? 궁금하지 않나?”
“…….”
그것은 물론 궁금했다.
허나 위험하기 짝이 없다. 다음의 행보를 사파무림으로 결정한다면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때, 취풍신개가 말했다.
“면목이 없네만, 자네나 나나 어차피 나선 길일세.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 함께 산동으로 가서 황보혁이 그 미친개와 담판을 지어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