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59)
163화. 심, 기, 체 (2)
타닥, 탁.
장작이 시커멓게 타올랐다.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끄윽.”
취풍신개가 걸쭉한 트림을 뱉었다. 통통, 올챙이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렸다.
“푸헐, 잘 먹었다! 그래, 인생 뭐 있남?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거늘 술 한 잔 없는 게 옥의 티로구나. 쩝!”
“…….”
멧돼지 한 마리는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허나 이벽은 그다지 먹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기는 취풍신개의 작은 몸 안으로 사라졌다.
식사는 맹렬했으며, 하나뿐인 입은 먹는 데 쓰였으므로 ‘대화’ 따윈 이뤄지지 않았다.
“뭘 그렇게 보나? 할 말 있나?”
취풍신개가 잔뼈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이벽은 조금 얼이 나가서 입을 열었다.
“…할 말은 걸개께서 있다고 하지 않으셨소? 기예가 어떻고 사다리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요?”
“아, 참참, 그랬었지… 푸헐!”
거지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기름이 범벅된 입가가 진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의 그 ‘꽃’은 꽤 재밌더군.”
팅, 거지가 잔뼈를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그리고 몽둥이를 닮은 멧돼지의 다리뼈를 집어 들었다.
“살의를 품은 강기가 아무것도 베지 못하는 꽃으로 피어나다니, 내 하오문의 무공이 그리도 심오한 이치에까지 뻗어있을 줄은 내 생각도 못 했네.”
“…….”
물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화영검무였다.
적파심공의 기운으로 몸 안이 살기에 가득 찬 순간, 뇌리에 스며든 화영지정의 곡조를 불러온다.
통제가 불가능한 적파심공의 강기와 더불어 맞서고 있는 적의 힘까지 일거에 ‘꽃잎’으로 화해버리는 힘이었다.
또한.
그것은 이벽이 가진 몇 가지의 검들 중에서도 스스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힘이기도 했다.
음공의 묘리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어째서인지 검은 펼쳐진다.
마치 타인의 힘을 빌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뭐, 어찌 되었건 그것이 자네의 ‘기예’이자 ‘사다리’란 말이네. 푸헐헐!”
다시 취풍신개가 말했다.
손에 쥔 뼈가 하늘을 가리켰다.
“알겠나? 마음(心)의 눈으로 ‘하늘’을 보았으되… 비루한 몸뚱이(體)가 거기까지 다다르기 위해선 기예(技)라는 사다리에 기대어야 법이네.”
“……!”
이벽의 눈이 치켜 떠졌다.
취풍신개가 쥐고 있던 뼈를 손에서 놓았으나… 뼈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꼿꼿이 하늘을 가리킨 채,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리기라도 하듯 그 상태 그대로 허공에 머무른다.
“뭘 이런 걸로 놀라나? 헐헐!”
취풍신개가 능청스레 웃었다.
훙훙, 심지어 뼈는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취풍신개의 몸 주위를 맴돈다.
“이기어(以氣馭)뼈라고 해두지.”
“…….”
이벽은 할 말을 잃었다.
“그야 겉보기에는 참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네만… 사실은 하나도 대단할 거 없네. 이쯤이야 요령만 터득하면 지금의 자네도 할 수 있는 기예에 불과하지.”
“…그게 정말이오?”
“정말이고 말고. 내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자네와 내가 펼치는 무공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일세.”
취풍신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검신합일입네 어검비행입네, 언뜻 보기에는 대단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절정고수가 강기를 뽐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네.”
“…….”
“그저 상단전이 활성화됨으로써 새로운 시간이 열리고 기의 운용이 빨라졌기에, 그 이전까지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기예가 가능해지는 게지.”
탁, 취풍신개가 몽둥이를 잡았다.
“결국 이따위 ‘잔재주’는, 하늘로 밟고 올라갈 사다리의 발판 한 칸에 불과하단 뜻이네.”
“…….”
하늘을 보다.
그것은 목천의 경지를 가리킨다.
선천의 힘은 곧 마음의 힘이며, 상단전에 스며듦으로써 생각의 속도를 마음의 흐름에 일치시킨다.
심즉사(心卽思).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서는, 기존의 한계를 넘어선 기의 운용, 즉, ‘기예’가 가능해진다.
“우선은 기예를 목표로 하게.”
다시 취풍신개가 말했다.
“그 꽃과 같이, 목천의 영역 속에서 오직 자네만의 기예를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네. 즉, 밟고 올라갈 사다리의 발판을 늘리란 말이지.”
“……!”
“심(心)은 이미 앞서있으니, 체(體)의 한계에 도전하고 습득한 기(技)가 많아질수록 자네는 점점 성장할 것이네.”
헐헐, 취풍신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뭐, 무작정 사다리의 발판 갯수만 늘린다고 하늘에 오를 수 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네만…….”
“…….”
기예는 사다리에 불과하다. 허나 사다리가 없어선 하늘에 오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머리는 퍽 복잡해졌다.
허나 최소한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문득 이벽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천의 기예’를 헤아려보았다.
우선은 화영검무가 있었으며, 눈앞의 거지에게서 보고 배운 ‘일보’가 있었다. 또한.
청강유엽검식의 연계, 혹은 청강검식과의 합일은… 그 자체로 이미 목천의 영역이 아니고서는 시전할 수 없는 기예였다.
“…가르침에 감사드리오.”
무언가가 조금 후련해졌다.
이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취풍신개를 향해 포권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훈수였소.”
“헐헐!”
훙훙, 취풍신개가 뼈를 휘둘렀다.
“이 뼈, 쥐는 감각이 제법 마음에 드는구먼. 황보혁이 미친개한테 줄 선물로 가지고 가야겠어!”
“…….”
이벽은 뼈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문득 소림에서 목도했던 방장 북두천존 혜능선사와 취풍신개 간의 일전이 떠올랐다.
단순한 주먹질과 단순한 몽둥이질. 허나… 그 안에 자리한 위압감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았다.
이벽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건방진 일일 지도 모르겠소만… 걸개께선 이미 하늘에 오르셨소?”
그리고 질문을 참지 못했다.
“뭐라? 푸헐!”
훅, 뼈 몽둥이가 집어던져졌다.
이벽은 황급히 연엽보를 밟았다. 왼쪽으로 몸을 빼며 가까스로 몽둥이를 피했다. 허나.
뻐억!
“……!”
엉덩이에 충격이 일었다.
이미 피했음에도 다시 되돌아온 뼈가 이벽의 배후를 두드린 것이다.
‘…이기어뼈.’
황당한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예끼, 애송이 주제에 어딜 그런 소릴 하나? 말 그대로 건방진 질문을 했으니 볼기짝 한 대 맞아야지. 푸헐헐!”
덥석, 그리고 취풍신개가 본인에게로 얌전히 되돌아온 뼈를 다시 움켜쥐었다.
“또한 이 거지의 발재간을 멋대로 훔쳐 간 벌이기도 하네. 에이, 기예 도둑놈 같으니!”
“…….”
기예 도둑놈.
이벽은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보고 기억했으며 위기의 순간 깨달았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뭐, 농담일세. 가르쳐준 것도 아닌 것을 재능만으로 보고 따라했다는데 난들 어쩌겠나?”
끙차, 취풍신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뼈 몽둥이로 자신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허나… 솔직히 말하자면 어젯밤 자네의 그 기예를 봤을 때 좀 난처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네.”
“…드릴 말씀이 없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깐 그러네. 보고 배우는 게 가능한 시점에서 그건 이미 자네의 재능이고 자네의 기예이지 내 것이 아닌 것이네.”
“…….”
“다만…,‘근본’이 없기 때문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판이란 말이지. 그 발판에 함부로 의지했다간 오히려 자네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네. 스스로도 느끼지 않았나?”
이벽은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분명 속도는 가공할 만큼 빨랐다.
허나 그렇기에 제대로 가눌 수 없었으며, 방향 전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심지어는 아주 조금만 동작이 흐트러져도 착지조차 제대로 못 한 채 땅을 구르기 일쑤였다.
“그 기예를 제대로 다루려면 결국은 그 기반이 되는 보법을 익혀야 하고, 경신법을 익혀야 하고, 내공심법을 익혀야 한단 말이지.”
긁적긁적, 취풍신개가 머리를 긁었다.
“헌데…, 내가 그 바탕이 되는 무공들을 내어줄 수는 없네. 명색이 개방주가 되어 가지고 비전을 외인에게 유출할 수는 없지 않나?”
“…물론이오.”
그것은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당연한 얘기였다. 잠깐의 정적이 감돌았다.
쩝, 취풍신개가 입맛을 다셨다.
흠, 수염을 만지며 헛기침을 하다가는 문득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자네… 거지가 될 생각은 없지?”
“…뭐라고 하셨소?”
“아니 그게… 그럼 참 이것저것 편해질 텐데 말야. 뭐하면 이 이기어뼈의 묘리라도 얹어줄 수 있는데…….”
훙훙, 뼈몽둥이가 다시 날았다.
“어때? 멋있지 않나? 술자리에서 닭다리라도 날려 보내면 소저들한테 인기 많아질걸?”
“…….”
이벽은 침묵했다.
빠악!
이벽의 몸이 흔들렸다. 어느새 이벽의 뒤로 돌아선 이기어뼈가 다시 엉덩이를 두드린 것이다.
“헹, 그럼 그렇지! 기대도 안 했다 이놈아! 하기야 무당 말코도 소림 땡중도 마다한 우리 천하의 비룡대주께서 한낱 거지의 뼈 휘두르기에 혹할 리 없겠지!”
흥, 취풍신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훈수는 끝일세! 헹! 남의 제자 좋은 일만 시켜주니 여간 배알이 꼴려서 못 살겠구만!”
“…죄송하게 되었소.”
“죄송은 옘병, 뭐 하고 자빠졌나? 갈 길이 창천구만리인데 뭣 빠지게 달리질 않고!”
훅, 취풍신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저만치 점이 되었다.
“…….”
다시, 전력 질주의 시작이었다.
* * *
“헉, 허억…….”
이내 이벽의 숨이 가빠졌다.
취풍신개가 멀어지면, 그 뒤를 다시 따라잡는다. 어제와 같은 반복이 반나절 정도 이어졌다.
허나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취풍신개의 말대로라면 이처럼 신체를 한계로 몰아붙이는 것이 곧 성장의 동력이 되리라고 했다.
회복력의 상승. 그리고.
심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숫자로써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단전을 통해 목천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는 시간이나 횟수 역시 분명히 늘고 있었다.
고작해야 두세 번의 초식이 한계였던 때에 비하면 탈진을 걱정해야 하기까지의 시간은 퍽 여유로워졌다.
심, 기, 체의 조화.
앞서나간 마음을 신체가 쫓는다.
이벽은 저 멀리의 취풍신개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볍게 뻗는 모든 걸음과 모든 초식은 곧 자신에게는 목천의 기예에 해당했다.
‘…그것이 하늘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
이벽은 생각의 주제를 바꾸었다.
기예의 문제는 생각할수록 애매했다. 취풍신개는 ‘자신만의 기예’를 정립하는 것이 곧 사다리를 쌓는 길이라고 했다. 허나.
청강유엽검식의 연계.
화영검무, 취풍신개의 일보.
가진 기예들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 방법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그저 단순히 지닌 무공의 숙련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공과 무공 사이의 ‘접점’을 찾는 일처럼 느껴졌다.
청강검식의 초식 간 연계와 청강유엽검식에 담긴 무리를 엮어 하나의 검술로 통합시키고.
적파심공의 강기를 일으킴과 동시에 화영지정의 곡조로 살기를 가라앉혀 화영검무를 펼친다.
또한 그렇다면.
취풍신개의 일보 역시 어떠한 무공과 무공의 사이에서 탄생한 기예일 가능성이 높다.
허나… 그것이 개방의 비전무공이라면 물론 자신이 그에 대해 알 방도는 없었다.
취풍신개의 말마따나, 근본이 없는 기예의 불완전함은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헉, 허억…….”
어쨌거나 이벽은 달렸다. 멀어지고 따라잡기를 다시 몇 번을 반복한 즈음이었다.
“쯧쯧, 생각이 짧으니 몸이 고생을 하는군 그래!”
문득 취풍신개가 말했다.
따라잡았음에도 멀어지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몸을 한계까지 쥐어짜라고 한 것은 걸개가 아니오?”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쿵, 취풍신개가 가슴을 쳤다.
“누가 달리지 말라던가? 단지 달릴 때 생각을 좀 하면서 달리란 말이네!”
“……?”
의미를 알 수 없다.
이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효효.”
취풍신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니까…, 자네는 대체 보법이나 경신공을 뭐라고 생각하는 겐가?”
“…걷고 달리는 무공이오.”
“그래, 걷고 달리는 무공이지. 그 또한 엄연한 무공이야. 헌데 자네는 검공에는 그렇게나 공을 들이면서 경신공은 왜 이리 찬밥 취급을 하나?”
“……!”
“생각해보게. 개방의 경신공을 얻을 수 없다면, 이미 자네가 가진 무공에 기예를 녹여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조금 전까지 이벽이 품고 있던 고민을 전부 꿰뚫어 본 듯한 말이었다.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오?”
“불가능하다면 말하지도 않지 이놈아! 이건 이미 훈수의 선을 넘는 건데…, 에효효!”
거지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간에 말일세. 황보혁이 그 자식이 만에 하나라도 지랄맞게 굴면…, 그때에 자네를 살리는 건 검이 아니라 발이 될 걸세.”
“…….”
“어차피 지금의 자네로서는 절대로 놈을 당해낼 수 없고, 나 역시 자네를 챙겨줄 여력은 아마 없겠지. 알겠나? 목숨이 걸린 일일세. 그러니 생각을 좀 하게. 생각 좀!”
거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훅, 그리고 다시 멀어졌다.
164. 쾌보 (1)
이벽은 종일 달렸다.
또한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달리는 시간이 곧 생각하는 시간이었으므로, 생각할 시간은 지나칠 만큼 충분했다.
—헌데 자네는 검공에는 그렇게나 공을 들이면서 경신공은 왜 이리 찬밥 취급을 하나?
취풍신개의 말마따나, 이벽은 줄곧 경신공에 소홀했다.
이벽은 진량현 개방 분타에서의 일전을 생각했다.
무너지는 분타 내에서 의식을 잃은 채 천장의 파편에 깔릴 위기에 처한 언미희를 구하려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취풍신개의 일보를 떠올렸고 어떻게든 구해낼 수 있었다. 허나.
‘발이 느린 것은 약한 것과 같다.’
이미 절절히 느꼈었다. 또한.
—명심하게. 이 강호에서 적을 베는 건 강한 검이지만 나를 살리는 건 빠른 발일세.
남궁세가가 자리한 안경에서 일행들이 달아날 시간을 끌기 위해 시내를 종횡하던 때, 공손욱 역시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권왕 황보혁과의 협상에 대비하여 오늘 아침 취풍신개가 한 말과 정확히 같은 의미였다.
“…….”
물론, 경황이 없었다.
진량현의 사건이 마무리되자마자 남궁세가에 의해 언미희가 납치를 당했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남궁세가에 쳐들어갔다.
취풍신개에 의해 도움을 받았고.
다시 의혈맹과의 갈등을 마무리 짓기 위해 취풍신개와 함께 황보세가로 향하고 있다.
경신법에 대해 고민하고 수련을 갈고닦으려 해도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아니, 하지만.’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시간적 여유’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이렇게까지 경신법만을 죽어라 펼쳐본 적이 없었다.
안휘에서 산동까지 성과 성을 맨발로 가로지르고 있는 바로 지금, 경공 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한단 말인가?
—누가 달리지 말라던가? 단지 달릴 때 생각을 좀 하면서 달리란 말이네!
—생각해보게. 개방의 경신공을 얻을 수 없다면, 이미 자네가 가진 무공에 기예를 녹여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
이벽은 다시금 취풍신개가 던져준 화두에 대해 생각했다.
‘일보’와 경신법의 조화.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허나 취풍신개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 분명히 무언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이다.
‘…가진 무공부터 정리한다.’
현재, 자신이 펼치고 있는 무공은 물론 선우세가의 경신법인 청강유엽신법이었다.
이는 흐르는 강물 위의 나뭇잎을 밟고 달리듯 표홀함에 중점을 두고 있는 신법이다.
또한, 익히고 있는 보법으로는 역시 선우세가의 보법인 연엽보가 있었다.
이는 빠르기보다는 선우세가의 검식이 지니는 발검과 회검의 순서 강제라는 한계의 보완에 중점을 둔 보법이다.
경신법과 보법.
언뜻 헷갈릴 수도 있으나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었다.
즉, 경신법이란 가능한 한 몸을 가볍고 다루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 속도를 이끌어 내는 가르침이며.
보법이란 땅을 밟는 발의 움직임으로, 주로 전투 중 상대와의 간격을 조절하고 검로를 확보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경신법은 몸의 공부이며 보법은 발의 공부이다. 그리고 두 가지가 같이 쓰이는 일은 좀처럼 없다.
“……!”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청강유엽검식이 그러하고 화영검무가 그러하듯, 목천의 기예라는 것이 곧, 무공과 무공의 ‘접점’을 찾아내는 일이라면.
‘…보법과 경신법의 접점.’
이벽은 황급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취풍신개가 남긴 말들을 조목조목 돌이켜보았다.
—그 기예를 제대로 다루려면 결국은 그에 수반하는 보법을 익혀야 하고, 경신법을 익혀야 하고, 내공심법을 익혀야 한단 말이지.
그랬다.
일보의 기예를 설명하며, 취풍신개가 언급한 것은 분명 경신법뿐만이 아니었다.
보법, 그리고 심법.
그리고 그중에서도 심법은 근본적으로 내력을 다루는 공부이며, 청강유엽신법도, 연엽보도 모두 청강유엽공의 내력에 근간하므로 그 이상 접점을 찾을 것은 없었다.
따라서, 그렇다면.
“…….”
이벽은 몸을 떨었다.
연엽보와 청강유엽신법.
두 무공은 하나의 심법에 뿌리를 둔 세가의 무공임에도 그 움직임은 마치 전혀 별개의 것과 같았다.
그리고 선우세가의 어느 누구도 그에게 두 무공의 접점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허나.
‘시험해 볼 가치는 있다.’
타다닷.
그 즉시 이벽의 다리가 연엽보를 밟았다. 동시에 그의 몸은 청강유엽신법을 멈추지 않았다.
두 가지 무공이 동시에 펼쳐졌다. 그 순간.
후욱.
이벽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전방을 향해 쏜살같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털썩, 데굴데굴.
고꾸라진 채 땅을 굴렀다.
“…….”
다리가 꼬였다.
경신법을 펼치며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움직이던 걸음걸이를 보법으로 의식하게 되자, 몸과 다리가 따로 논 것이다.
툭.
구르던 이벽의 몸이 멈추었다.
뼈 몽둥이가 구르는 경로를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이벽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늙은 거지의 추레한 눈빛을 마주했다.
“축하하네. 벌써부터 새로운 기예를 익혔나 보군. 어디 보자, 몸으로 착지하여 민첩하게 용서를 구하는 굼벵신법인가?”
“…….”
“확실히, 천하의 황보혁이라도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는 무공 앞에서는 당황을 금할 수 없겠어.”
* * *
다시 하룻밤이 저물었다.
어둠이 낮게 깔렸을 즈음, 어느 수풀 속의 너른 공터에서 취풍신개는 멀어지는 것을 멈췄고, 이벽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식사 따윈 생각지도 못했다.
그대로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촤아앗.
“……!”
그리고 또다시 취풍신개에 의해 찬물이 끼얹어졌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아침이 되어있었다.
“나날이 순조롭게 거지꼴이 되어 가는군, 그래. 푸헐헐!”
취풍신개가 웃음을 흘렸다.
“좌우간에 정신 바짝 차리게나. 오늘 내로 산동에 들어설 거니까 말일세.”
“…잘 알겠소.”
안휘가 남궁세가의 영역이듯, 산동은 황보세가의 영역이다. 즉, 명백한 적진이다.
슥.
이벽은 몸을 일으켰다.
몸은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이후, 이벽은 청강유엽신법과 연엽보의 접점을 찾고자 수도 없이 시도했고 번번이 땅을 굴렀다.
그 결과.
딱히 전투를 하거나 비무를 치르지도 않았음에도 몸 상태는 마치 격렬한 일전을 치르고 난 이후와 같았다.
말마따나 굼벵이처럼 땅을 기다시피 했으니, 진일보한 회복력으로도 하룻밤 새에 말끔해지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에효효, 고되다 고돼! 늘그막에 싸움질 좀 막아보자고 이게 무슨 짓인지…….”
취풍신개가 품에서 육포를 꺼냈다.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찌푸린 얼굴로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
이벽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어제의 일들을 회상했다.
끝도 없이 땅을 구르는 이벽을 보며 취풍신개는 연신 콧방귀를 뀌면서도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즉, ‘청강유엽신법과 연엽보의 접점을 찾는다’는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이벽은 돌아섰다.
어쨌거나 취풍신개가 물을 뿌렸다는 건 가까이에 수원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벽은 귀를 기울였고, 물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
꽤 그럴듯한 계곡을 발견했다.
풍덩—!
이벽은 그대로 뛰어들었다.
옷을 벗지도 않은 상태였다.
자맥질하며 온통 흙범벅이 된 몸과 옷을 동시에 빠르게 씻어낸 뒤, 물속에서 발검했다.
푹, 푸욱.
검이 민첩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촤앗.
이벽이 뭍으로 다시 올라왔을 때 검 끝에는 네 마리의 물고기들이 꿰어져 있었다.
이벽은 다시 돌아왔다.
취풍신개가 보는 눈앞에서 장작을 그러모은 뒤, 화섭자를 꺼내어 불을 피웠다.
“아니… 자네, 지금 뭘 하나?”
“아침밥 준비하는 중이오만.”
“…무슨 그리 여유를 부리고 앉았나? 내 갈 길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허나 이제 곧 적진인데… 최소한 한 끼 정도는 든든히 먹어둬야 하지 않겠소?”
“…끄응.”
말문이 막힌 취풍신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내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타닥, 탁.
이벽은 잔가지를 꺾어 물고기를 꿰었다. 그리고 불가에서 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이내 고소한 냄새가 감돌았다.
흘끗.
취풍신개가 곁눈질을 했다. 허나 이벽과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피해버린다.
“걸개께서도 한 마리 드시겠소?”
“…헐헐! 나는 거지의 몸이라 남는 밥 외에는 손대지 않는다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권한다면야—”
“그야 어렵지 않소.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훈수 한 마디만 더 부탁드리고 싶군.”
“…뭐, 뭐라?!”
취풍신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이 거지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나? 고작 생선 한 마리 따위에 가르침을 달라고?! 자네, 너무 날로 먹으려고 드는 거 아닌가?!”
“날로 안 먹소. 굽고 있지 않소?”
“…크흥!”
취풍신개가 콧김을 뿜었다.
“됐네, 일없네! 자네나 많이 먹게. 어제는 자네가 불쌍해서 살계를 범했을 뿐, 나는 개방도에 충실한 사람이네!”
“…….”
이벽은 물고기 꼬치를 잡았다.
한 마리를 빠르게 해치웠다. 침묵 속에서 이벽이 생선살을 씹는 소리가 공터를 맴돌았다.
덜덜덜.
문득 고개를 돌리자 이벽은 취풍신개의 다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식, 이벽은 웃었다.
천하십대고수 씩이나 되는 이가 고작 물고기 따위에 절절매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진천의 그림자가 스쳤다.
휙.
“…비려서 더는 못 먹겠군.”
두 마리 째를 집어 든 이벽이 한 입 베어 문 뒤, 도로 불가에 꽂아놓았다.
“슬슬 출발해도 좋소, 걸개.”
“…무, 무슨 짓인가 자네?”
“생각보다 맛있진 않아서 말이오. 쓸데없이 너무 많이 잡은 것 같군. 전부 다 버려야겠소.”
“그 아까운 걸…. 아이고!”
문득 취풍신개가 역정을 내었다.
“고얀 놈! 천벌 받을 놈! 음식 귀한 줄을 모르고! 네놈이 거지의 서러움을 아느냐!”
“왜 역정을 내시오?”
이벽이 웃었다.
나머지 생선들을 가리켰다.
“모두 ‘남는 밥’이오.”
“……!”
취풍신개의 눈이 흔들렸다.
휙, 다음 순간 번개처럼 달려든 거지가 생선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양손에 든 뒤, 마구 뜯기 시작했다.
“아이고 좋다… 쩝쩝, 하지만 어림도 없다 이놈아! 쩝, 이런 걸로, 쩝, 내가 입이라도 뻥끗할 것 같으냐!”
“그렇군. 어쩔 수 없구려. 그러면 더는 묻지 않겠소. 좌우간에 맛있게 드시오.”
이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쩝쩝… 엥?”
“그야 나도 잘 알고 있소. 이미 걸개께선 차고 넘칠 만큼 베풀어주셨지. 답답한 마음에 여쭤보았을 뿐, 안 된다는 걸 무리해서 욕심을 부리진 않소.”
“…….”
“그리고 그건 그냥… 대접해드리는 거요. 딱히 스승도 제자도 아니지만, 내 물고기 정도야 얼마든지 잡아다 드릴 수 있소.”
침묵이 감돌았다.
쩝, 취풍신개가 입맛을 다셨다.
“이 반 토막짜리 소협께서 날 쫌생이 거지 만드네… 아까워서 안 먹을 수도 없고. 아이고!”
거지는 계속해서 생선을 뜯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네 마리가 앙상한 뼈만 남았다. 끄윽, 트림을 뱉은 취풍신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어째 얕은 꾐에 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구만…….”
“그럴 리가 있겠소?”
이벽은 작게 웃었다.
“…일없네. 그럼 진짜 마지막으로 말할 테니 잘 듣게. 자네는 검공에 비해 경신공을 너무 소홀히 했네.”
그것은 이미 들은 말이었다.
허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알겠나? 검을 쥔 팔도, 땅을 달리는 다리도 모두 몸에서 뻗어나간 것인데… 빌어먹을, 대체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건가? 응?”
“……!”
“내가 해줄 말은 결국 한 가지밖에 없네.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네.”
다르지 않다.
이벽의 무공과 취풍신개의 무공이 다르지 않고, 팔과 다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미 앞선 훈수를 통해 반복해서 들은 말이었다. 다음 순간 훅, 취풍신개가 다시 멀어졌다.
그것은 오늘의 여정이 시작되었음과 동시에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음을 뜻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타닷.
이벽은 그의 뒤를 쫓았다. 동시에 취풍신개가 남긴 마지막 화두에 집중했다.
팔과 다리가 다르지 않고.
손과 발이 다르지 않다면.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작은 의문이 스쳤다.
선우세가의 비전검식은 청강유엽검이며, 경신공은 청강유엽신법이다.
그리고 양쪽 모두 독문심법인 청강유엽심법과 함께 세가의 시조인 초대가주 선우명에 의해 창안된 무공이라고 하였다.
청강유엽검과 청강유엽신법.
‘…왜 이름이 같지?’
그것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의문이었다. 물론, 그저 같은 이름의 내공심법에 의존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나.
무공을 창안하는 대종사가 그리도 단순하게 이름을 붙이려 들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스쳤다.
이름이란 정체성이다.
무엇보다도 그렇다면.
독문 보법인 연엽보 역시 그 이름이 연엽보가 아닌 청강유엽보여야 했다.
쿠웅.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충격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