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62)
167화. 검치의 핏줄
“…….”
선우벽.
본래는 자신을 뜻하던 과거의 이름 앞에서 이벽은 침묵했다.
황보혁을 바라보았다.
확신을 지닌 맹수의 눈빛 앞에서 어설픈 부정이나 말장난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이해했다.
자신의 과거를 그가 어떻게 알았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정검문주 양호명의 말마따나 이벽은 이름을 바꾸지도 않았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세가의 무공을 펼침에 있어서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알려질 사실은 알려진다.
그뿐이었다.
“선우세가에서 사람을 보냈더군.”
“……!”
다시 황보혁이 말했다.
“운남 구석에 오십 년이나 틀어박혀 있던 세가의 수준이야 더 볼 것도 없지만, 혹시나 해서 선우굉이란 자를 만나봤더니 예상보다도 더 쓰레기 같았다.”
“…….”
“하기야 모처럼의 재능을 품고도 제 손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죽인 놈이 버젓이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데 알아채지도 못하는 수준이야 오죽하겠냐마는.”
피식, 황보혁이 다시 웃었다.
“좌우간 그따위 쭉정이만 남은 세가 따윈 알 바 아니다. 가만히 놔둬도 의혈맹 내부에서 도태되겠지만, 원한다면 네 손으로 직접 부숴버려도 좋다.”
“…….”
황보혁은 마치 선심을 써서 ‘자신의 물건’을 내어주듯 이야기했다. 허나 이벽은 여전히 꺼낼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선우세가는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말에 이벽은 내심 안도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선우세가? 뭔 장황한 헛소릴 늘어놓고 있나? 산에서 안주 거리 찾다 이상한 버섯이라도 캐 먹었나?”
그때, 취풍신개가 말했다.
“여기 있는 건 사패련 비룡대주이자 하오문의 비호를 받는 이벽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다.”
“……!”
이벽은 취풍신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취풍신개가 씩 웃었다. 그 역시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오문과 함께 천하의 정보 세력으로써 쌍벽을 이루는 개방이다. 의혈맹주가 아는 사실을 그가 모를 이유는 없다.
“거지, 입 닥치고 있어라.”
황보혁이 취풍신개를 향했다.
“이것은 의혈맹 ‘내부’의 일이다.”
“푸헐! 미친개가 거듭 개소릴 하는군. 비룡대주 이벽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과거야 어떻건, 누군가 내다 버린 것을 주워다 물 주고 밥 주면서 재능을 꽃피웠으면 옮긴 이의 것이지 어찌 이제 와서 네 거라고 우겨대나?”
취풍신개가 쏘아붙였다. 허나.
“재능이라.”
핫, 황보혁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그렇다면 묻지, 네놈은 그 잘난 재능이 어디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나?”
“…뭐라?”
취풍신개의 말문이 막혔다.
황보혁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선우벽.”
그리고 이벽을 향했다.
아니, 그러나 황보혁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며, 심지어는 ‘선우벽’조차 아니었다.
이벽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림세가란 뭐라고 생각하나?”
“…….”
뜻밖의 질문이었으므로 대답할 말을 찾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핏줄과 가전무공을 중심으로 뭉친 ‘일개 무림세력’이오.”
그리고 이벽은 말했다.
그것이 한때는 속해있었고, 동시에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이었던 세가에 대해 이벽이 내린 결론이었다.
세가의 틀을 벗어난 이후 바깥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핏줄 간의 유대나 명성에 대한 집착 따윈 참으로 허망했다.
“정확하군.”
“…….”
“헌데 그렇다면, 무력에 바탕을 둔 무림세력이 애당초 왜 핏줄 따위를 중요시하는 줄 아나?”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답할 수 없었다.
“답은 간단하다. 핏줄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곧 무력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보혁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천하 어디에서건, 어느 시골 촌구석이건, 천재 한 명이 태어날 수는 있다. 운이 좋아 좋은 스승과 사문을 만났다면 당대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칠 수도 있겠지.”
“…….”
“허나 그 또한 늙고 노쇠하여 스러지고 나면, 결국은 아무 의미도 없다. 장강의 앞물은 뒷물에 밀려나고 만다. 그것이 이치다.”
황보혁의 눈이 빛났다.
“허나 핏줄은 대를 잇는다.”
쪼르륵, 황보혁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 여유로운 동작으로 목을 축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의 핏줄에서 대를 이어가며 두 명 이상의 천재가 태어나고, 세대가 흘러도 계속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능이 유지될 때.”
탕, 술잔을 내리쳤다.
“그것을 ‘검증된’ 핏줄이라 한다.”
“…….”
핏줄의 옥석을 분별한다.
그것이 의혈맹주가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허나 황보혁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당금의 천하에 무림세가를 형성한 핏줄들은 모두 적어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를 시조로 삼는 이들이지.”
“…….”
“그러나 개중에서는 시조의 재능을 이어받아 순조롭게 세를 불리는 이들이 있는 반면, 네놈의 집안처럼 쭉정이만 남아 도태되는 핏줄 또한 존재한다.”
쪼르륵, 술잔이 다시 채워졌다.
탕, 그리고 황보혁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술잔이 이벽의 바로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그래, 선우벽. 너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 나로서는 제법 아쉬운 일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요?”
“검치(劍痴) 선우명.”
“……!”
또 하나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 역시 이벽이 아는 이름이었다.
검치라는 별호는 들어보지 못했으나… 선우명이란 즉, 선우세가의 시조이자 초대가주이며 청강유엽공의 창시자이기도 한 이의 이름이었다.
또한 현 선우세가주 선우각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따지고 보면 이벽의 친조부라고 할 수도 있었다.
“정말로 닮았네. 놀라울 만큼.”
그때, 당평세가 말했다. 잠자코 있던 독왕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그래, 소협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소협께선 소협의 조부가 되는 분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을 테지?”
“…….”
“허나… 얼굴이며 몸짓, 말투, 그리고 기세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났던 ‘그분’의 나이가 이십 년 정도만 젊었더라면… 분명 자네와 꼭 같은 모습이셨을 것이네.”
당평세의 눈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벽은 이해했다. 당평세가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핏줄’이었다.
또한, 황보혁이 자신에게서 보고 있는 것 역시 자신도, 선우벽도 아닌 ‘선우명의 그림자’였다.
“선우명. 무당의 속가 출신.”
다시 황보혁이 말했다.
“허나 스스로 탈속을 선언한 뒤, 신분을 속이고 천하 각지 도문의 제자가 되고 탈속하기를 반복하며 기본검공들을 긁어모으던 미친놈.”
“…….”
검치.
‘검에 미친 바보’라는 별호 역시 그즈음 붙여졌으며, 당시 무림맹에선 그의 존재를 공적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허나 그즈음 마교의 침공으로 인해 천하가 환란에 휩싸이면서 수배는 흐지부지되었다.
전 무림의 위기 앞에 그런 자잘한 기인의 행적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차후에는 오히려 마교와의 일전에서 나름의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공적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난이 끝난 이후.
선우명은 운남으로 향했다.
그것이 선우세가의 시작이었다.
“허나 아무도 모르더군. 마교의 침공이 한창 절정에 이르렀던 때, 선봉에 선 우호법의 목을 베고 놈들의 기세를 꺾어놓은 게 바로 검치라는 것을.”
“뭐, 뭐라……?!”
취풍신개가 즉각 반응했다.
“그, 그게 무슨… 미친개,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나? 책임질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것은 개방조차 알지 못하던 비사인 듯했다. 물론, 이벽 역시 그러한 얘길 들어본 적은 없었다.
“증명은 못 하오, 걸개. 알다시피 오십 년이나 지난 일이 아니오? 허나 이 말만은 할 수 있소. 내가 직접, 이 눈으로 보았소.”
그때, 당평세가 말했다.
“…….”
취풍신개가 침묵에 빠졌다.
무엇보다 독왕은 줄곧 선우명을 가리켜 ‘그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곧 하나의 증거였다.
허나…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 또한 아니었다.
우호법이란 마교주 천마의 오른편에 서는 존재로서, 예나 지금이나 무림의 정상에 선 이들조차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 껍데기뿐인 미친놈이라 할지라도 천하제일의 껍데기쯤 되면 마교의 호법 정도는 벨 수 있는 모양이지.”
핫, 황보혁이 다시 웃었다.
“정말 맘에 드는군.”
쩌저적.
그의 손에 쥐어진 술잔에 금이 갔다. 권태로운 표정 속에서 다시 욕망이 움틀 거렸다.
“알겠나, 선우벽? 내가 원하는 것은 네놈의 몸뚱아리가 아니라 네놈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검치의 핏줄이다.”
“…….”
“선우벽, 선택해라. 네 앞에 놓인 그 잔을 마시면 승낙으로 알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로 알겠다.”
그리고.
길었던 이야기를 지나 마침내 황보혁이 선언했다.
“내 딸과 혼인하거나, 죽어라.”
* * *
앞서 제갈성은 말했다.
의혈맹주의 막내딸이 혼기가 찼고, 동시에 의혈맹주는 비룡대주에 대한 추포령을 내렸다.
이에 황보세가와의 핏줄을 엮을 기회를 얻기 위해 수많은 세가의 무인들이 앞다투어 비룡대주의 뒤를 쫓았다.
허나.
정작 그 막내딸을 위해 황보혁이 생각하고 있던 사내는 공을 세운 이가 아니라 ‘표적’이었다.
“…….”
“내가 필요한 것은 네 핏줄이다. 허나 너에게도 나쁜 얘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벽은 할 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허나 황보혁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힘과 재능이 있는 자는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원한다면 네게 황보의 성씨를 하사해주도록 하지.”
“…….”
성을 하사한다.
성씨란 곧 핏줄의 증명이다.
그 의미는 물론 적지 않았다.
“푸헐!”
허나 그때였다.
“점입가경이로군 그래.”
마침내 취풍신개가 다시 나섰다.
“이야기가 퍽 흥미로워서 계속 들어주고 있자니 뒤로 갈수록 점점 걷잡을 수가 없구먼.”
“…….”
“성씨를 하사한다고? 주변에서 권왕 권왕 하니 네놈이 진짜 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관과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가?”
덥석, 벌컥.
취풍신개가 손을 뻗었다. 이벽의 앞에 놓인 술잔을 낼름 집어서 대신 마셔버렸다.
“크으……!”
“…….”
“알겠냐 미친개? 나는 여기에 협상을 하러 왔네. 비룡대주가 아닌 내가 말이네. 남궁세가 건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네만, 아무튼 피가 흐르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
툭, 이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 녀석은 협상의 패가 아니야. 만에 하나 어떤 오해가 있었다면야 함께 풀어볼 생각으로 데려오긴 했다만.”
슥, 더러운 소매로 입을 훔쳤다.
“헌데 오해는 지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네놈의 추악한 욕심이었지 않느냐?”
“맞다. 내 욕심이지.”
황보혁이 답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뻔뻔하기 짝이 없군 그래. 그래도 네놈 역시 나이를 좀 먹었으니 어떻게든 말이 통하리라 기대했던 내가 등신이다.”
그리고.
다시 침묵과 긴장이 내려앉았다.
“…….”
이벽은 생각했다.
시조 선우명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으며, 선우세가에 대한 이야기 역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허나.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다.
황보혁은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내어놓았고, 이다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상황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맹주, 처음부터 내 핏줄을 원하는 거였다면… 왜 그리도 많은 이들을 동원하여 나를 몰아붙였소?”
이벽이 물었다.
“그야 그 정도의 추격도 뚫지 못하고 죽거나 붙잡힌다면 어차피 너 역시 쭉정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
“만에 하나 개중 누구에게라도 붙들려 끌려왔다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허나 결국은 모두 뿌리쳤고, 이 늙은 거지가 나서게까지 만들었으니, 검치의 피가 제대로 남아 있음이 입증된 셈이지.”
“…그렇군.”
마지막 의혹마저 해결되었다.
이제는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허나 사실상 선택지는 없었다.
이벽은 생각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자신이 달아날 수 있을지, 취풍신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짝바짝, 목 안이 말라갔다.
“뭘 또 쫄고 있나, 비룡대주?”
그때 취풍신개가 말했다.
“도사도 땡중도 거지도 되기 싫다더니… 왜, 저놈이 딸을 내어준다니까 이제 와서 맘이 혹 하드나?”
취풍신개가 황보혁을 턱짓했다.
“헌데 막상 만나봤더니 머리만 묶었지, 저거랑 똑같이 생겼으면 어떻게 하려고?”
“…….”
머리 긴 황보혁.
피식, 이벽은 웃었다.
아주 조금 긴장감이 사라졌다.
무림의 이치 속에서는 완벽히 안전한 선택지 따윈 없다. 그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고로 믿는 수밖에 없다.
“거절하겠소.”
이벽이 답했다.
“…….”
스스스, 그리고 이벽은 마치 몸의 무게가 몇 배로 늘어난 듯한 압박감에 휩싸였다.
황보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죽어야겠군. 허나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생각해 이유 정도는 묻지. 어째서 거절하지?”
“여러 이유가 있소만… 일단 황보벽이란 이름은 어감이 너무 구린 것 같소.”
“…뭐라?”
타앙!
“구리다잖어, 이 미친개야—!!”
그때, 취풍신개가 상을 엎었다. 그리고 그 즉시 황보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우웅.
두 인영이 부딪힌 순간.
산 전체가 지진처럼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