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87)
192화. 길동무
귀혼파 장문인 종인명이 죽었다.
진법의 핵심에 해당하는 술사가 숨을 거두자 이내 안개가 사라지고 참상이 다시 드러났다.
무턱대고 이벽에게 달려들던 적들은 어느새 절반 이상이 무참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털썩, 털썩.
“으… 으으.”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내 적들은 하나둘 주저앉았다.
비룡대주의 검에 짓이겨진 이들의 몰골은 인간의 시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도살장에 널브러진 가축의 모습에 가까웠다.
사파의 무인이라고 한들.
불과 조금 전까지 함께 적과 맞서던 이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귀혼파의 장문인과 제자들이 펼친 그 잘난 ‘대법’이 깨지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그 꼴이 될 수도 있었음을 직감했다.
살아남은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타닷.
“씨이… 발……!”
“모, 모두 물러서라—!!”
이내 남은 이들 중 대다수가 등을 돌렸다. 살아남은 자파의 제자들을 챙겨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했다.
“…….”
허나.
적들이 도망치건 그렇지 않건, 더는 이벽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이벽의 눈에 비치는 것은.
눈앞에 서 있는 인영의 존재였다.
“…언 소저.”
“네, 공자.”
언미희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태연했다.
“소저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거요?”
“그냥요. 일이 그렇게 되었어요.”
“…….”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하니 어서 돌아가시오. 지금 이 곳은—”
타앗.
“크… 으아아아아!!”
허나 그때였다.
도망치지 않은 적 하나가 이벽을 향해 쇄도했다. 중년 사내의 주먹에는 시퍼런 강기가 서려 있었다.
“비룡대주 이노오옴!! 제자들의 원수,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을 길동무로 삼아주마—!!”
“…….”
사내의 몰골은 악귀와 같았다.
진법이 깨졌음에도 사내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인 모양이었다. 이벽은 검을 쥐었다. 허나.
탓, 후욱.
언미희가 한발 먼저 튀어 올랐다.
움직임은 새처럼 날렵했으며, 이내 언미희의 권갑에서 희미한 강기가 일었다. 그리고.
“……!”
콰아아앙. 퍼어억.
권과 권이 맞부딪혔다.
“커, 커허헉……?!”
사내의 오른손이 터져나갔다.
아니, 그러나 시작에 불과했다.
우득, 콰드득, 퍼어억.
팔뚝에서 어깨에 이르기까지, 오른팔이 통째로 짓이겨졌다. 일평생 갈고닦은 팔을 잃은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허나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퍼어억.
곧이어 언미희의 무릎이 사내의 옆구리를 차올렸다.
“커…억.”
울컥, 사내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저만치로 날아간 사내의 신형이 땅에 널브러졌다.
움찔움찔.
허리가 기형적으로 꺾인 사내가 잠시 경련했다. 허나 이내 곧 혀를 빼물고 축 늘어졌다.
탓.
그리고 언미희가 다시 착지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이벽의 앞에 섰다.
“싫어요. 안 갈 거예요. 어차피 이제는 돌아갈 곳도 없구요.”
“…….”
“뭣보다… 공자는 멋대로 남궁세가까지 와서 사람을 끌어내 놓고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이벽은 할 말을 찾으려 했다.
허나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언미희가 나타날 이유는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지금의 언미희에게선… 묘한 위화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로 언 소저가 맞소?”
“그럼요 공자. 박치기해줄까요?”
“…괜찮소.”
이벽은 반사적으로 이마를 가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풋, 언미희가 실소했다.
“…핫.”
문득 이벽도 웃음이 나왔다.
“하핫.”
“아하하.”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널브러진 시산혈해의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피를 듬뿍 뒤집어썼고 혈향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허나.
두 사람은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서로의 몰골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최소한 웃음소리는 맑았다.
“공자, 피를 많이 묻혔군요.”
“…그렇게 되었소.”
“보시다시피 저도 많이 묻혔어요. 오는 길에 산적들도 만났고… 나름대로 우여곡절도 겪었구요.”
일찍이 언미희는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이라면 오히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고작 반년 전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면 예전보다는 도움이 될까 해서요. 어쨌건 혼자보다는 둘이 낫잖아요?”
아하하, 언미희가 다시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벽은 위화감의 정체를 이해했다.
마침내 언미희는 ‘마음의 돌’이 박힌 자리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치워냄으로써 자신만의 흐름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길은 있다.
“…….”
그것은 물론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언미희가 있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나.
“그리고 저도 원한이 있잖아요?”
언미희가 얼른 말을 이었다.
“어차피 공자가 아니더라도 혈교와는 불구대천인 입장이라… 제 나름의 전쟁을 치르러 왔어요.”
불구대천(不俱戴天).
그것은 아버지나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
이벽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었다.
“힘이 모자라다고 해서 돌아설 수는 없으니,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제 운명이지요.”
“…그렇군.”
이벽은 설득할 수 없음을 이해했다.
하물며 그녀는 비룡대원으로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므로, 자신에게는 명령권 따윈 없다. 그렇다면.
“그럼 같이 가지.”
“네, 그렇게 해요.”
최소한 함께 걸을 수는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발을 떼었다.
사패련을 향해 나란히 나아갔다.
쩌억, 쩍.
걸음걸음마다 밑창이 땅에 달라붙었고 발자국은 피 얼룩이 되어 지면 위에 새겨졌다.
“공자, 이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언미희가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소.”
“아하하. 뭐, 너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만약에 공자가 맹철극을 베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그다음 도전하는 건 제 차례거든요.”
“…….”
이벽의 미간이 흔들렸다.
“그럼 소저는 죽소.”
“그러니까 공자가 이기면 되죠. 공자가 죽으면 저도 죽어요. 그래도 최소한 저세상이란 게 있다면 지금처럼 길동무는 할 수 있잖아요?”
“…….”
“죽지 말라고 부담 주는 거예요.”
아하하, 언미희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또 모르잖아요. 만에 하나 공자가 지더라도 힘을 많이 빼놓으면… 막타 정도는 칠 수 있을지도?”
훅훅.
언미희가 주먹을 휘둘렀다.
피식, 이벽은 헛웃음을 흘렸다.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에 머릿속을 괴롭히던 잡념들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많이도 죽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언미희가 술사들을 처리한 덕분에 얼추 절반 정도는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큰 의미는 없었음에도.
희한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저벅.
“…….”
문득 이벽은 발밑을 향했다.
피로 물든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즉, 아직도 수라의 길 위에 서 있다는 뜻이었으나, 어쩌면 그 끝은 패왕의 길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퍽 외로운 길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기에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음의 힘’이 되는 듯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이벽은 다시 각오를 다졌다.
저벅저벅.
그리고 두 사람은 계속 나아갔다.
한 시진을 넘게 사패련으로 향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더는 두 사람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사패련에 도달했다.
“…….”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벽은 정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걸려있는 ‘목’을 확인했다. 죽은 지는 퍽 시간이 지나 이목구비를 식별하기는 어려웠다.
허나.
일찍이 당평세는 말했었다.
흑천방주 맹철극은 패왕가주 혁군악을 죽인 후, 그 목을 베어 사패련 정문에 내걸었다고 하였다.
그는 혁대웅의 아버지였고.
또한 사파의 질서를 수호하던 패왕이었다. 그 끝은 허무했으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꾸욱, 이벽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공자.”
그때 언미희가 말했다.
“제가… 모셔올까요?”
“…아니, 아직은 아니오.”
이벽은 고개를 저었다.
혁군악의 유해를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사패련을 탈환한 후 모든 사파인들이 보는 앞에서 치러져야 할 일이었다.
끼익.
그때였다.
별안간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서 오시오, 비룡대주.”
퍽 낯익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 * *
그는 흑천방의 무인 맹상태였다.
일찍이 호남무림에서의 정사 간 협상장에서 사패련 측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얼굴을 마주친 바 있으며.
또한.
비무가 일단락된 뒤 호남을 떠나던 비룡대 일행을 추격하여 갈등을 빚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우르르.
그리고 흑천방의 무복을 입은 스물 가량의 무인들이 뒤를 따라 나왔다.
맹상태를 지키듯 진을 치고 섰다.
“신 사패련의 개파식을 빛내고자 이렇게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하오. 이제부터는 이 맹 모가 안내해드리겠소.”
꾸벅, 맹상태가 고개를 숙였다.
“…퍽 뻔뻔하시군.”
이벽은 검을 잡았다. 그리고.
훅, 검이 휘둘러졌다. 청강검식 쾌의 묘리가 예고도 없이 펼쳐진 것이다.
서걱, 툭.
맹상태의 오른팔이 땅을 굴렀다.
“……!”
채앵, 챙.
“흐, 흑운대! 외당주님을—!”
그 순간, 맹상태의 배후에 있던 흑천방의 무인들이 일제히 도를 꺼내 들었다. 허나.
“멈춰라—!!”
맹상태가 일갈했다.
“누가 멋대로 나서라고 했나!!”
흠칫, 무인들이 동요했다.
허나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
그리고.
맹상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왼손으로 잘려 나간 어깨를 지혈한다. 허나 신음을 흘리진 않았다. 팔이 잘렸음에도 고통을 내색하지 않는다.
“왜 피하지 않았소?”
이벽이 물었다.
이벽은 일전에 느꼈던 상대의 기세를 떠올렸다. 최소한 이리도 쉽게 팔을 내어줄 만한 이는 아니었다.
“…피하려고 한들 비룡대주께서 하고자 한다면 결국 달라질 게 없음을 알기 때문이오.”
“…….”
“또한… 대주께 끼친 이전의 무례에 대한 대가로 팔 하나라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지.”
목소리는 짐짓 태연했다.
도객으로서 오른팔을 잃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것을 잃는다는 뜻이었다.
이벽은 상대의 독심을 느꼈다.
“…그렇군.”
이벽은 일단 검을 회수했다.
“얘기 정도는 듣도록 하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과 당신네 무인들의 목을 마저 베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해보시오.”
이벽은 생각했다.
조금 전 귀혼파의 종인명을 비롯한 무인들로 하여금 이벽 습격하도록 종용한 것은 아마도 이 자였을 테다.
“솔직히… 그럴 이유는 없소.”
그리고 맹상태가 말했다.
“다만 이쪽의 입장을 한 번만 헤아려주시오. 그 짧은 사이 대주께서는 어엿한 괴물로 자라나셨고, 이제는 독도, 암습도, 진법도, 하다못해 머릿수조차 통하지 않음을 잘 알았으니… 이제는 ‘손님’으로 모시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남아있겠소?”
훗, 맹상태가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흘 뒤, 개파식에서 치러질 여흥의 일환으로 우리 련주께서 직접 대주의 목을 칠 것이라 천명하셨소.”
“…….”
그것은 역시.
당평세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더 이상 목숨을 낭비하는 건 이로울 게 없으니… 부탁드리오. 부디 사흘간만 ‘손님’으로 계셔주시길 부탁하오.”
그리고 맹상태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역시 팔 하나를 잘리고도 퍽 공손한 모양새였다.
“…….”
이벽은 침묵했다.
얼추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다.
당가의 도움을 빌려 신 사패련에 ‘전쟁’을 선포했고, ‘수라의 길’을 거쳐 마침내 맹철극과 맞설 자격을 증명했다.
허나.
“…공에 눈이 먼 타 문파의 목숨들을 ‘검증’에 쓰고 나니 정작 자신들의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군.”
“…….”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벽은 맹상태의 배후에 자리한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흠칫, 이벽과 눈을 마주친 무인들이 동요했다.
흑천방의 무인들이라면.
늦건 빠르건 어차피 베어야 할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스윽.
“공자.”
허나 그때였다.
이벽의 소매가 잡아당겨졌다.
“우선은 씻어요, 우리. 여기서 또 피를 묻히면… 두고두고 몸에서 냄새가 안 사라질지도 몰라요.”
“…….”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아하하, 언미희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군.”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언미희는 여전히 언미희였다.
이미 많은 목숨을 죽였다고 해서 그에 비례하여 살인이 가벼워져선 안 된다.
철컥, 이벽은 검을 거두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리오.”
맹상태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처소를 안내해드릴 테니—”
“맹 대협.”
허나 언미희가 말을 끊었다.
“누가 누굴 안내한단 거예요? 비룡대는 사패련의 무력대예요. 깝치지 말고 가서 지혈이나 하세요.”
“…….”
이벽은 언미희를 돌아보았다.
“응? 왜요, 공자?”
“…아무것도 아니오.”
좌우간.
두 사람은 맹상태를 지나쳤다.
딱딱하게 굳은 흑천방의 무인들을 지나친 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귀주, 사패련.
사파무림의 총본산.
대략 반년만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