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형제와 사형제
이벽과 혁대웅은 나란히 산을 타고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나무가 적당히 우거진 장소를 발견했다.
후웅, 콰악!
도끼가 나무줄기를 파고들었다.
후웅, 콰악!
혁대웅의 도끼질은 능숙했다.
두어 번의 도끼질만으로 나무 한 그루가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콰악, 쿠웅!
이내 나무가 쓰러졌다.
그러나 혁대웅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근처의 나무를 향해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이벽은 혁대웅이 쓰러뜨린 나무를 운반하기 좋은 크기로 토막 내며 잠자코 말을 기다렸다.
“고맙다. 벽아.”
한참을 도끼질에 열중하던 혁대웅이 이내 입을 열었다. 퍽 진중한 목소리였다.
“무슨 말이지?”
“내가 없을 때 사저를 지켜줘서.”
“…….”
후웅, 콰악!
“네가 있었으니 그나마 그 정도의 일로 끝날 수 있었던 거겠지. 그치?”
“…아니, 애초에 나 때문이었다.”
제갈소미는 말했다.
청성의 제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대수롭지 않게 끝났을 일이었다고.
“아니,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러나 혁대웅은 단호했다.
“상대가 어느 누구든 간에 희롱당하는 사저를 놔두고 순순히 물러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선택지야. 절대로.”
콰악, 쿠웅!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다.
상의를 벗어 던진 혁대웅의 등에는 붕대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단련된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린다.
“후우.”
그제야 혁대웅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이벽을 돌아보았다.
입가에 난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이깟 나무, 내공이 있었으면 맨손으로도 잡아 뜯는 건데. 힘을 잃었다는 건 정말 분하다. 그치?”
“…….”
“청성파라고 했지?”
혁대웅이 다시 돌아섰다.
콰악! 도끼가 나무를 파고들었다.
“좌우간 그 자리에 설령 너 대신 내가 있었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후웅, 콰악!
청성의 제자와 맞서 제갈소미를 구하고자 했을 때, 이벽은 또다시 불완전하게나마 내공을 사용했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간절히 원했던 순간, 그곳에 딱 한 줌의 내공이 있었다.
그저 그 정도의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만일 사저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더라면, 나도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겠지.”
후욱, 콰앙!
후욱, 콰앙!
“그러니까 그 말을 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사저를 지켜준 건 나를 지켜준 거야.”
“…….”
“벽아. 얼마 전, 네가 나한테 물어봤던 말 있잖아? 나에게 있어 사형제가 무엇이냐고.”
물론 기억하고 있다.
범을 상대로, 혁대웅은 이벽을 뒤로 하고 목숨을 걸었다.
그럼에도 혁대웅은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드러누워 있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어.”
턱, 혁대웅이 도끼를 내려놨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형제란, 사 자 붙은 형제야.”
이벽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아하하, 너무 말장난 같나? 하기는 이렇게 말해도 나는 친형제 같은 건 가져본 적이 없지만.”
“…….”
머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콰악! 그리고 혁대웅은 다시 도끼질을 이었다.
이벽은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손발이 차가워졌다.
“좌우간 네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어. 누구에게나 과거 같은 건 있으니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지금 사형제가 되었고, 얼추 목숨도 주고 받았지.”
혁대웅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우리를 지켰듯, 앞으로도 나는 너를 지킬 거야. 왜냐하면, 형제가 서로를 지키는 건 당연하니까.”
너를 지킬 거야.
이벽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텅 빈 몸 안쪽으로 물결이 퍼져나간다. 앞서 제갈소미 역시 이벽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함부로 목숨을 걸고 함부로 서로를 지킨다. 사형제의 의란 친형제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
불현듯 떠올랐다.
범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도.
청성의 제자와 맞섰을 때도.
다른 모든 걸 잊고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찼을 때, 이벽의 몸은 내공을 찾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빌었을 때, 자신의 몸은 거짓말처럼 딱 한 줌의 힘을 허락해주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내공.
단전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힘.
하지만… 지킨다는 건 무엇이지?
—저는 온 힘을 다해 형님의 등 뒤를 지킬 터이니, 형님은 이 세가를 지켜주십시오. 아시겠지요?
쿨럭, 이벽은 기침을 했다.
거짓말처럼 목구멍을 타고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급격히 몸이 무거워졌고, 호흡이 가빠졌다.
이벽은 뒷걸음질 쳤다.
철퍽!
그리고 뒤로 물러선 이벽의 발이 질척한 진흙땅을 디뎠다.
대기에 습한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가을의 초입에 다다른 쾌청한 날씨는 온데간데없다.
찌는 듯한 습기 속에서, 희멀건 안개가 이벽을 둘러쌌다.
이벽은 몽롱해졌다.
“…….”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익은 지형. 눅진한 냄새.
무엇보다도 나무를 패는 혁대웅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벽은 깨달았다. 이곳은 더 이상 화정촌이 자리한 곡정의 산악지대가 아니다.
곤명성, 서산.
선우세가 인근.
물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리 없다. 이 모든 건 그의 마음이 보여주는 환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악몽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것을 보여준다.
모종의 예감이 스친 순간, 바르르, 이벽의 몸이 떨렸다.
퍼억!
그리고 고통이 일었다.
칼날이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형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협아.”
—면목없습니다만, 죽어주십시오.
휘청
이벽의 몸이 흔들렸다.
털썩, 주저앉은 몸이 이내 소리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혁대웅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연신 도끼를 휘두르는 것에 열중했다.
“하핫, 어째 머쓱하네. 좀 쑥스러운 얘기를 했지? 뭐, 이 정도면 슬슬… 벽아?!”
* * *
어린 시절, 선우벽은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고통은 허상에 불과하다. 선우벽은 언제나처럼 검을 휘둘렀다.
가진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형체가 있는 물건이건, 혹은 형체가 없는 고통이건, 세상에 검으로 베어낼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선우벽은 매일 아침 연무장 위에 가장 먼저 자리하는 이였고, 가장 마지막까지 서 있는 이이기도 했다.
당시 공동생활을 하던 세가의 어린 혈족들 사이에서 그러한 선우벽의 기행은 으레 비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동생, 선우협은 그런 선우벽에게 성큼 다가왔다.
“저어… 형님…?”
“…….”
대뜸 형님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적자와 사생아는 결코 형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동정, 혹은 그 이외의 어떤 마음이었을까.
선우협은 본인이 꾀병을 부려 얻어낸 약을 숨겨 두었다 몰래 선우벽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선우벽은 빚을 느꼈다.
검은 나날이 날카로워졌다.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의 지위가 소가주와 소가주가 되지 못한 자로 뒤바뀐 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코 달라질 리 없는 것.
선우벽은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죽음에 이유가 있다면, 가장 가까운 이의 변화를 알지 못한 것이겠지. 협아, 그래도.
‘나는 너를 지키고자 했다.’
베어지고 짓이겨진 채, 선우벽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손과 발이 낡은 천처럼 너울거렸다.
부유감 속에서 선우벽은 마침내 검으로도 베어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편해지고 싶었다.
어서 바닥에 닿아 으깨어지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선우벽이 바닥에 닿는 일은 없었다.
절벽의 깊이는 무한했고, 하늘의 빛은 점점 더 멀어졌다.
시간만이 하릴없이 흘렀다.
—…벽아. 이러면 내가 뭐가 되니.
—에효효, 큰놈, 작은놈 번갈아 가며 골골대니 아주 내가 먼저 죽을 맛이네.
간혹 몇 개인가의 목소리들이 절벽 사이에서 메아리처럼 스치기도 했다.
선우벽은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릴 때 생각은 저절로 움직이곤 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깨달았다.
모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
이벽은 눈을 떴다.
초점은 쉬이 잡히지 않았다.
부연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자 눈에 익은 낙검문의 처소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벽은 상체를 일으켰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다.
다리는 거짓말처럼 앙상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다.
이벽은 창가로 다가갔다.
끼익.
굳게 닫힌 창틀을 열자 날카로운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어둑어둑한 바깥은 새벽인지, 저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눈.”
이벽은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 굵은 눈발은 아니었지만, 계절은 겨울인 모양이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덜컥, 이벽은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두 발로 서있음에도 자신의 몸이 제대로 땅에 붙어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고통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비현실감이었다.
나는 이벽이다.
그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철컥, 이벽은 문을 나섰다.
얕은 눈발 속에서 앙상한 몸이 생각하는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 * *
빼꼼.
왕수련은 대문 안쪽을 조심스레 기웃거렸다.
어째서인지 퍽 이른 시간임에도 낙검문의 대문은 열려있었다.
그러나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라면, 찾아오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된다.
드륵.
“흐아암.”
그때, 저만치에서 방문이 열렸다.
기지개를 켜며 제갈소미가 마당 겸 연무장으로 걸어 나왔다.
“소미 언니!”
“응? 수련아.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웬일?”
현재, 낙검문은 일시 휴업상태였다. 마을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방학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이거, 문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왕수련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약초꾼인 왕씨는 본래 약장수 이진천과 종종 거래하는 사이였다.
피식, 제갈소미가 웃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왔어? 심부름 덕분에 꼬맹이 한 번 보고 가려고?”
“아, 아, 아뇨! …사실 맞지만요.”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그런 게으른 잠탱이 녀석, 대체 어디가 좋다는 거야?”
“아, 아하하…….”
왕수련이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가서 들어가 봐.”
“저 혼자요? 그래도 되나요?”
“뭘, 어차피 혼자 가든 둘이 가든 정작 본인은 계속해서 잠만 퍼자고 있는데 뭔 상관이겠니?”
“그, 그건 그렇네요…….”
왕수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벽이 쓰러졌다. 그리고 벌써 두어 달을 넘게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이렇다 할 상처조차 없었다.
아주 간혹가다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열이 올랐다가 저절로 내려가곤 했다.
그 외에는 그저 일어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이벽은 평온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진천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언젠가는 겪었어야 할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기다리면 된다고.
“뭐, 너무 걱정 마. 문주 그 인간, 인간으로서는 전혀 못 믿을 인간이지만, 무인이나 의원으로서는 꽤 믿음직하니까.”
“아하하… 그럼 다녀올게요!”
타닷, 왕수련이 걸음을 옮겼다.
제갈소미는 조금 복잡한 미소로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마냥 어린애 같던 왕수련도 조금씩 태가 나기 시작했다.
“에휴, 못된 놈 같으니.”
제갈소미는 작은 한숨과 함께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얕은 눈이지만 본격적으로 쌓이기 전에 쓸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후다닥, 쿵쾅!
“어, 언니! 소미 언니!!”
“응?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왕수련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크, 크크, 큰일이에요! 바, 방 안에 오빠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