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2)
208화. 구배지례
보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일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장석두는 매일같이 찾아와 묵묵히 검을 휘둘렀으며, 왕수련과는 조금 어색하면서도 살가운 관계를 되찾았다.
이벽은 검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마을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동을 제공하고 품삯을 벌었다.
그렇게.
이벽이 떠나있던 육 개월간의 공백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낙검문도들과 화정촌민들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희미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고질병처럼 이벽의 마음에 뿌리 깊이 박힌 채 간간이 밑도 끝도 없이 차오르곤 했다.
훙, 후웅.
허나 이벽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로.
더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으레 그래왔듯 감정을 원동력 삼아 검을 휘둘렀으며, 스스로를 쥐어짜듯 마음을 가라앉혔다.
때로는 제갈소미의 눈을 피해 혁대웅과 비무를 치루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물론.
궁여지책에 불과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강해지자.
혁대웅은 말했다.
그리고 이벽은 생각했다.
강함과 약함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문제이기에, 제아무리 수련을 거듭한다 한들 불안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동시에.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 ‘한없이 그에 가까워지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이벽은 자신이 무림에서 목격했던 ‘절대적인 강함’들을 떠올렸다.
패왕 혁군악, 북두천존 혜능선사와 취풍신개, 권왕 황보혁, 독왕 당평세를 떠올렸다.
하늘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무.
단신으로 천하를 아우르는 힘.
세상은 그런 예외적인 존재들을 일컬어 ‘천하십대고수’라 불렀다. 또한.
—천하에는 참으로 기인이 많아. 헐헐! 아마 그 가르침을 창안하신 일대종사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 거지로서도 감히 승부를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네.
일전의 취풍신개는 이벽의 낙검진천신공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런 말을 남겼었다.
즉.
낙검진천신공의 창시자인 이진천은… 이미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
문득 취풍신개의 추레한 모습을 떠올리자 이벽의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허나 이벽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쏴아아.
이벽은 낙룡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류의 계곡으로 향했다.
허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으나.
비로소 사흘째에 이벽은 찾고자 하던 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응? 막내야?”
“…….”
낙검문주 이진천이 말했다.
늘 그렇듯 문파와 약방을 비우고 멋대로 사라지곤 하는 이진천이지만, 그가 종종 계곡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을 이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 아직도 네가 여기 있느냐?”
“…검을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벽은 ‘낙천’을 내밀었다.
마을을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이벽은 검을 물려받았다. 고로 떠나지 않을 거라면, 다시 돌려주는 것이 맞다.
“…그러냐?”
훗, 이진천이 웃었다.
“다행이구나.”
“…그렇습니까.”
“그러니 내 말하지 않았더냐?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면 선택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네가 스스로 ‘떠나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었을 뿐이지.”
하암, 이진천이 하품을 했다.
휙, 물가를 바라보지도 않고 낚싯대를 들어 올리자 바구니에 물고기 한 마리가 늘어났다.
“헌데 말이다.”
그리고 이진천이 말했다.
“내 눈이 맛이 간 게 아니라면… 검을 돌려주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어보이는구나.”
“…….”
이벽은 주저앉았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에엥… 잠깐, 막내야?”
이벽은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려 했다. 허나 채 아홉 번을 채우기도 전, 이진천의 낚싯대가 뻗어졌다.
마지막 한 번을 저지당했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냐 이게?”
드물게도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물론, 구배지례가 뜻하는 바를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주님, 저를… ‘다시 한번’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이내 이벽이 말했다.
* * *
“…….”
이진천이 침묵했다.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있었다.
구배지례란, 사제관계의 연을 맺는 예(禮)의 의식에 해당한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낙검문의 문주와 그 제자였으며, 앞서 이진천은 검을 내어주며 ‘후계자’라는 말까지 입에 담았다.
허나.
이벽은 그 이상을 원했다.
단순히 ‘낙검문주’와 ‘낙검문도’가 아닌, 그 무엇도 사이에 두지 않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스승과 제자’로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그것은 물론.
배울 게 남아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단순히, 이진천이 천하십대고수에 필적하는 절대강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벽이 심부름을 떠나기 전.
이진천은 이벽에게 자신의 검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선우세가의 숙원, ‘창공비검’이었으며.
차후 이벽은 독왕 당평세의 만천화우 속에서 다시 한번 그 모습을 읽어냄으로써 이벽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즉.
이진천의 심(心)은 낙검진천심공이되 동시에 청강유엽공이며, 그 기(技)는 청강유엽검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벽이 서 있는 길과 완전히 ‘같은 길’이었다.
선우세가의 무공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이진천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핫.”
이내 이진천이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다시 계곡을 향했다.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물론 계곡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막내야, 너는 이미 한 성의 패자였던 흑천방주 맹철극을 쓰러뜨렸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이미 ‘괴물’로 만들어진 후의 몸뚱아리에 칼을 박아넣었으니 그 이상이지.”
“…….”
“이미 촌민으로 살아가기에는 쓸데없이 강한 주제에… 거기서 더 강해져서 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느냐?”
목소리는 추궁하듯 날카로웠다.
“머무르기로 결심을 내렸으면 그냥 잘 먹고 잘살면 될 일이지, 어떻게든 검의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
이벽은 침묵했다.
물론, 강해진다고 해서 ‘뭘 어찌할’ 생각은 없었다. 잠깐의 생각 끝에 마음을 말로 정리했다.
“…아니요. 되고 싶지 않습니다.”
“……!”
“문주님의 말씀대로… 마을에 남아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가능하다면 검을 버려도 좋습니다. 허나… 손에 묻힌 피를, 은원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첨벙.
낚싯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계곡 위로 파문이 퍼져나갔다.
“마음이 어지럽고 두렵습니다. 최소한 천하의 어느 누굴 상대하더라도 ‘지지는 않을 정도의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이 평범함을 지키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하아.”
이진천이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네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허나… 그 길은 아니다, 막내야. 이유야 어쨌건 집착을 끊지 못한다면… 너는 결국 또 한 명의 ‘검치’가 될 뿐이다.”
“……!”
검에 미친 자. 그것은.
선우세가의 시조이자 청강유엽공의 창시자인 선우명의 잊혀진 이름이었다.
“막내야. 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렵더냐? 이 내가 있고, 또한 네 사형제들이 있다. 너 혼자 모든 걸 지키겠다고 나설 이유도 없으며 또한 가능하지도 않다.”
“…….”
“가거라. 네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 이제부터라도 네 나이에 맞는 즐거움을 찾아보거라.”
마침내 이진천의 말이 멎었다.
그리고 완고한 침묵이 흘렀다.
그 시선은 여전히 계곡을 향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바구니 속의 물고기는 늘어나지 않았다.
“…….”
‘할 일’이 끝났다.
그것은 즉, ‘심부름’을 뜻한다.
이벽은 새삼 이진천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허나 한 가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문주님.”
이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낚싯대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물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였습니까?”
“……!”
흠칫.
이진천의 어깨가 흔들렸다.
마침내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이벽, 너…….”
“…….”
그것은.
지난 일들의 정황을 생각한 끝에 이벽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하오문 수호대는 혈교의 뒤를 쫓았으나, 혈마는 온갖 사술과 모략을 통해 꼬리를 자르고 추적을 피했다. 때문에.
이진천은 미끼를 내던졌고.
그 미끼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흑천방과 녹림에 숨어 힘을 키우던 혈마는 그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그렇게 결국.
이진천에게 목을 내주었다.
“…하긴,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지. 뭐, 아니라곤 못 하겠구나.”
마침내 이진천이 답했다.
이로써 이벽은 ‘줄곧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듯하던’ 감각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아마도.
자신이 무림을 종횡하는 여정 내내… 이진천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더냐?”
그때 다시 이진천이 말했다.
“네가 나를 원망이라도 한단 말이냐? 다 죽어가던 너를 공연히 되살려놔서? 무림에 내보내고 손에 피를 묻히게 해서?”
“……!”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작은 ‘심부름’이었다. 허나.
판단과 행동은 모두 자신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맺은 관계 또한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악연이건, 인연이건.
책임은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저를 살려주신 것, 새 삶을 주신 것, 힘을 주신 것, 모두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
“무림과 무림 바깥을 막론하고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단을 떠나 혈마를 베는 것은… 역시 천하를 위해 옳은 일이었습니다.”
이벽은 웃었다. 그리고.
이진천의 눈이 흔들렸다.
구명지은을 떠나, 또한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이진천은 스승으로 모실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었다.
“허나 그러한 일들을 두 눈으로 봐버린 이상, 천하를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주변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싶습니다.”
“…….”
“부디 도와주십시오, 문주님.”
이벽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 * *
“하아… 하하.”
이진천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것은 웃음으로 이어졌다.
“검을 돌려주는 대가로 깨달음을 내어놓으라니…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구나.”
“…….”
저무는 해가 이진천의 미소를 비추었다. 그 순간, 이벽은 이진천의 얼굴에 녹아든 세월을 엿보았다.
그 외모는 여전히 서른 전후에 불과했으되, 절대고수의 실제 나이는 외모로는 짐작할 수 없다.
“어렵구나, 어려워. 막내야, 난처하기 짝이 없구나. 뭣보다 깨달음이란 게 그리도 쉽게 전해지는 거였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
또한 할 말은 없었다.
무학이란, 위로 향할수록 가르침을 통해 전해질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결국 성취는 본인의 몫이었다.
하물며.
‘하늘’에 이르는 무공이다.
과거 낙검진천신공의 전수가 그러했듯,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으리란 것은 물론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벽은 실마리를 원했다.
또한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이진천 역시 알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입을 열어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이진천의 눈에 회한이 스쳤다.
“…스승님께 새삼 죄송해지는군. 제자를 받아 키운다는 것도… 참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로구나.”
“……!”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허나 이진천에게 스승이 있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강자가 혼자서 자라났을 리는 없는 것이다.
스윽.
그때 마침내 이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곡에서 낚싯바늘을 거둔 뒤 낚싯대를 어깨에 얹었다.
“일어나라 막내야. 네가 이겼다.”
훗, 웃었다.
“구배지례 따윈 집어치우거라. 제자랍시고 데려다가 미끼로 이용해 먹는 인간 말종한테 격식이며 예의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더냐?”
“…….”
그제서야 이벽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이진천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마침내 평소에 가까운 표정이 맴돌고 있었다.
“그래, 한 번의 기회를 주마. 우선은 우리 막내, 어디 할 수 있는 거 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문주님.”
슥.
그리고 이벽은 일어섰다.
정면으로 이진천을 마주했다.
검수에게 있어 ‘한 번의 기회’란, 물론 ‘일검’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철컥, 이벽은 손잡이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진천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빈틈투성이였기에 오히려 틈을 잡을 수 없었다.
우우웅.
이벽은 선천의 힘을 일으켰다.
이내 목천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과거 내력을 회복했었던 그때, 이벽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진천과 검을 나누었었다.
요식행위와 같은 몇 번의 합이 오고갔으며, 결국은 이진천의 단 일검에 의해 이벽의 검이 품은 묘리들은 모두 파훼되었다.
패배하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그 검은… ‘보이지조차’ 않았다.
‘…지금이라면.’
꿀꺽, 이벽은 침을 삼켰다.
단 일검의 기회라면 물론.
펼쳐야 할 초식은 정해져 있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창공비검(蒼空飛劍).
후욱.
이벽의 몸이 가볍게 떠올렸다.
검과 몸과 발을 타고 여섯 개의 묘리가 통과했으며, 이내 뽑아 든 검이 바람처럼 이진천을 향해 쏘아졌다.
“하핫.”
그 순간 이진천이 웃었다.
스윽, 낚싯대가 가볍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