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6)
212화. 양자택일
끼익, 끽.
우마에 매어진 수레들이 산길을 따라 길게 줄을 이었다. 장시에 내다 팔 물건을 실은 화정촌민들의 행렬이었다.
그 사이에는 이벽, 제갈소미와 혁대웅, 그리고 낙검문의 속가제자에 해당하는 마을 아이들 또한 끼어있었다.
끼익, 끽.
“헉, 허억……!”
“…….”
그리고.
앞뒤로 이어진 우마들 사이에서 오직 혁대웅만이 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인력으로 수레를 끌고 있었다.
심지어 양손에 하나씩.
무려 두 대의 수레였다.
“…괜찮나, 혁대웅?”
이벽이 물었다.
“허억, 후…! 그야 물론이지! 하핫! 이 정도쯤은 해야 근육에 자극이… 온다니까?!”
허나 혁대웅 본인은 딱히 불만이 없는 듯했다. 외려 이벽이 도와주려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 장하다 우리 곰탱이~”
“하핫! 그러니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허억! 이런 건… 벽이한테 안 진다니까?! 파하핫!”
제갈소미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혁대웅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
이벽은 불현듯 ‘장성한 아들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던 사패련주 혁군악을 떠올렸다.
이벽은 고개를 외면했다.
그리고 마침내 정오 무렵.
일행은 회택의 장시에 도착했다.
“알지? 왕수련, 장석두, 그리고… 왕일상, 왕이강. 너희 둘도 다 컸으니 올해부턴 알아서들 놀아. 괜히 말썽 피우지 말고.”
“저… 정말요, 누나?!”
“아, 아싸!”
제갈소미의 눈이 왕수련과 두 명의 왕씨 형제들, 그리고 장석두를 한 번씩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만에 하나, 혹시라도 무림인같이 생긴 거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잽싸게 도망치고.”
“…….”
이벽은 문득 지난 일을 생각했다.
작년, 이곳 회택의 거리에서 사패련을 향하던 청성파의 무인들과 충돌을 빚었던 일이 있었다.
물론, 저잣거리에서 그런 ‘진짜 무림인’들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몹시 드문 일이었다.
허나.
당시 내력조차 되찾지 못했던 이벽은 상대 후기지수에게 엉망으로 당해 쓰러졌고, 제갈소미 역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툭, 툭.
“재밌게 놀다 와, 벽아.”
허나 그때였다. 혁대웅이 이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 편안한 웃음을 보였다.
“…….”
혁대웅은 강하다.
따라서 걱정할 것은 없다.
이벽은 내심 불안을 추슬렀다.
“이벽, 손이나 내밀어.”
그때 제갈소미가 말했다.
짤그랑.
그리고 이벽의 손바닥 위로 동전 몇 개가 놓였다. 또다시 용돈을 받았다.
“…굳이 돈은 필요 없다만.”
“시끄러, 꼬맹아. 너… 내가 저번에도 수련이랑 놀다 오라고 몇 푼 줬더니 아주 개무시했더라?”
“…….”
“네 몰골을 좀 봐라. 하도 삐쩍 말라서 무덤 속 뼈다귀가 친구 먹자고 저절로 굴러오겠다. 가서 뭐라도 좀 사 먹어라. 응?”
“아, 걱정 마세요, 언니. 오늘은 제가 책임지고 붙어있을 거니까요!”
불끈, 왕수련이 주먹을 쥐었다.
“…그래, 수련아. 너만 믿을게.”
피식, 제갈소미가 작게 웃었다.
슥슥, 왕수련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혁대웅과 함께 남은 아이들을 이끌고서 저만치로 사라졌다.
“저기… 형님.”
그리고 그때, 장석두가 말했다.
“그게… 죄송한데요. 사실 저도 오늘은 따로 다녀야 할 것 같슴다. 그… 아버지한테 받은 심부름도 있고요. 에헤헤!”
장석두가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괜찮겠나?”
“그, 그럼요. 걱정 마세요! 저도 이래 봬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으니까요!”
“…….”
다시 불안감이 스쳤다. 허나.
장석두의 말마따나 상식적으로 내기까지 다루게 된 지금의 장석두가 고작 저잣거리에서 해를 입을 리는 없었다.
이벽은 새삼 과민함을 실감했다.
“자 가자! 얼른 따라와!”
“에, 에엑? 우리도요?”
“당연하지 이 쉐키들아—!”
그리고 장석두는 왕수련의 동생인 왕씨 형제들을 데리고서 순식간에 길 어귀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낙검문의 일행들로 북적거리던 공터는 삽시간에 이벽과 왕수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오빠, 혹시 석두랑 싸웠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다.”
“하긴, 만일 그랬다면 석두는 지금쯤 두 발로 서있기도 어려웠겠지만요.”
“…….”
이벽은 장석두가 향한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에 대한 뜻을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덥석.
“자, 어서 가요, 오빠.”
그때 왕수련이 대뜸 이벽의 팔을 붙들었다. 이벽은 상념을 깨고 왕수련을 바라보았다.
“…정해 둔 갈 데라도 있나? 네가 원한다면 서점을—”
“아뇨, 그건 됐어요.”
허나 왕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늘 계획이 다 있거든요.”
“계획?”
“네.”
왕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내가 좋아하는 거지, 오빠가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야겠어요!”
불끈, 왕수련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아 됐으니깐 그냥 따라와요!”
* * *
탓탓탓.
이벽의 팔을 붙든 왕수련이 보무도 당당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회택의 거리를 헤집는다.
북적북적.
장시 내에는 인근의 마을에서 모여든 인파들이 들끓었으며, 사방에서 좌판을 펼친 채 가지각색의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꽉 잡아요. 미아 되면 안 되니까.”
“…….”
“이렇게나 뭐가 많은데… 설마 이 중에 오빠가 좋아하는 게 뭐 하나는 있겠죠?”
“…잘 모르겠군.”
“혹시라도 구경하다 눈에 띄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알았죠?”
왕수련이 활짝 웃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벽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며, 반드시 알아내겠노라 선언했다.
허나 그것은.
이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따른 선호 정도는 있으되 음식이나 물건을 ‘좋아한다’는 개념은 퍽 낯설게 느껴졌다.
“앗, 전병 맛있겠다!”
그때 왕수련이 잽싸게 움직였다.
저만치의 좌판에서 전병 두 개를 냉큼 집어 들었으며, 물론 값은 이벽이 치렀다.
허나.
왕수련은 전병을 먹지 않았다. 양손에 한 개씩 쥔 채 비장한 눈빛으로 이벽을 바라보았다.
“자, 아 해요.”
“……?”
“빨리요. 아 하라니깐요.”
이벽이 입을 열자 그 즉시 전병이 밀고 들어왔다. 이벽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요?”
꿀꺽, 삼켰다.
“…짜고 기름지다.”
기름으로 범벅된 밀가루 안에는 다진 고기와 야채 따위가 채워져 있었다.
“그래요? 그럼 이건요?”
푹.
“컥.”
채 삼키기 무섭게 이번엔 반대쪽 전병이 입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녹은 설탕이 범벅되어 들어있었다.
“…달고 기름지다.”
“그럼 둘 중 뭐가 좋아요?”
“…….”
이벽은 왕수련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았다.
“둘 다 나쁘지 않다.”
“카악! 그건 반칙이에요. 나쁘지 않다는 건 결국 진짜로 좋아하는 게 없단 뜻이잖아요?!”
훅, 두 개의 전병이 내밀어졌다.
“딱 골라요. 단 것과 짠 것, 평생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요?!”
“…….”
“괜히 어물쩡 넘어가려 하지 말지 말아요. 인생은 원래 선택의 연속이라구요!”
왕수련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허나 이벽은 그것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고기가 든 쪽을 택했다.
“…흥, 그렇단 말이죠?”
허나 그러한 이벽의 내심을 전부 꿰뚫어 본 듯, 왕수련은 탐탁잖은 목소리를 내었다.
타다닷.
남은 전병을 게눈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운 왕수련이 다시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자 이번엔 어느 쪽?!”
어느새 왕수련의 양손에는 각각 꼬챙이에 꿰어진 구운 감자와 고구마가 들려있었다.
“…컥.”
그렇게.
비슷한 양자택일의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으며, 이벽은 결국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허나 왕수련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내 불과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이벽은 뱃속이 더부룩해졌고, 제갈소미에게 받은 동전 또한 거의 바닥이 났다.
“…에이, 쉽지 않네요, 정말.”
“…할 말이 없군.”
왕수련이 툴툴거렸다.
“오빠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취향이란 게 없어요? 무슨 할아방탱이도 아니고.”
“…….”
멈칫.
허나 그 순간, 이벽의 걸음이 멈추었다. 시선이 가볍게 흔들렸다. 퍽 눈에 익은 장소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천향루天香樓]이벽은 전각을 바라보았다.
물론, 회택에 천향루가 있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나 퍽 복잡한 기분이 스쳤다.
그곳은 하오문의 비밀지부이며, 과거 화정촌을 나섰던 이벽이 처음으로 찾아온 장소이기도 했다.
이 문 너머에서.
이벽은 언미희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지소약, 고 노야를 만나 함께 사패련으로 향하게 되었다.
즉, 이벽에게 있어서는.
‘무림행의 시발점’이었다.
덥석.
“뭐, 뭘 보고 있는 거예요!”
허나 그때였다.
왕수련이 팔을 잡아끌었다.
“끄, 끌리는 게 보이면 뭐든 말하라니까 하필 주색잡기를……?!”
“…오해다.”
“…아, 안 되겠다. 후퇴!”
질질질.
왕수련이 이벽을 거칠게 잡아끌기 시작했다. 이벽은 저항하지 않고 끌려갔다.
질질질.
* * *
한참을 끙끙대며 번화가를 벗어난 뒤, 비교적 한적한 외곽에 이르고 나서야 왕수련은 이벽의 팔을 놓았다.
“헉… 허억!”
그리고 허리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나?”
“그, 그럼요! 우리 얼른 밥이나 먹어요! 괜히 이상한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요! 아 배고프다~”
왕수련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땀을 훔쳤다.
“…충분히 먹지 않았나?”
“무슨 소리예요? 밥 먹자니까요? 고작해야 간식 같은 것밖에 안 먹었잖아요?”
“…….”
그리고 어느 나무 아래.
이벽은 잠자코 돗자리를 깔았다.
그 사이 왕수련은 어딘가에서 큼지막한 주먹밥 두 개를 사서 돌아왔다.
“아, 역시 바깥에서 돗자리 깔고 먹는 게 맛있네요~ 그쵸?”
“…그렇군.”
두 사람은 주먹밥을 먹었다.
어느덧 겨울에 접어들기 시작한 공기는 서늘했다. 대낮이었기에 춥지는 않았으나, 오래 앉아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천향루를 바라본 순간, 이벽의 마음을 스친 복잡한 기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은.
무림과 비(非) 무림이 너무 가깝게 맞닿아있다는 새삼스런 인식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한.
언미희의 그림자가 스쳤다.
쿡.
허나 그때, 손가락이 이벽의 뺨을 찔렀다.
“밥풀 공격.”
“…….”
밥풀이 이벽의 뺨에 붙었다.
왕수련이 키득키득 웃었다.
“오빠, 혼자 심각해지지 마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이제 오빠는 마을로 돌아왔으니까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흠칫.
이벽은 조금 놀라서 왕수련을 돌아보았다. 허나 먼 산을 바라보는 왕수련의 표정은 퍽 담담했다.
“인생은 언제나 양자택일이에요. 그리고 오빠는 우리 마을을 택했죠. 여기에 남아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
“하지만요… 적어도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줬으면 해요.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한테 은근히 질투 나려고 하거든요.”
앞서 왕수련은.
이벽에게 ‘여기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마을을 떠나려던 이벽의 결심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움찔.
이벽은 문득.
몸 안의 미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