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07)
213화. 악몽과 현실 (1)
‘…뭐지?’
가벼운 열기가 몸을 스쳤다.
허나 말 그대로 스치듯 순간적인 감각이었기에, 이벽은 그 정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왜, 왜 그래요?”
돌연 이벽이 딱딱하게 굳자 왕수련이 물었다.
“혹시 나… 뭔가 말실수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벽은 왕수련을 바라보았다.
“…흠흠!”
왕수련이 헛기침을 했다.
이벽의 시선을 피한 뒤 짐짓 먹는 데에 집중하는 듯했다. 이벽 또한 맛을 알기 어려운 주먹밥을 씹어 삼켰다.
“…….”
일순 무언가 화두가 스치고 지나갔으나, 붙들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허나 이미 놓쳐버린 건 놓쳐버린 것이며, 중요한 화두라면 결국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또한.
왕수련의 말마따나 누군가와 어울리고 있는 와중에 멋대로 딴생각에 빠져버리는 것은 자신의 나쁜 버릇이었다.
문득 이벽은 옛일을 떠올렸다.
왕수련에게 이끌려 처음으로 낙룡폭포에 향했던 무렵, 무공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다가 그녀를 울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피식, 이벽은 웃었다.
“…왜 웃어요?”
“이번에도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왕수련은 퍽 성숙해졌다.
앳된 티를 벗으며 심신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이내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
“자, 그럼!”
분위기를 환기하듯 왕수련이 말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도 먹었으니… 다시 움직여볼까요? 다음은 포목점이에요!”
불끈, 주먹을 쥐어보였다.
“먹는 건 일단 됐다 치고… 오빠의 숨겨진 옷 취향만큼은 확실히 알아내고 말겠어요!”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아직도 더 할 생각인가?”
“그럼요. 이대로는 못 끝내죠. 결국은 오빠의 취향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잖아요?”
왕수련의 목소리에서는 뜨거운 집념마저 느껴졌다. 이내 이벽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날 똑같은 무복만 입고…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얼굴이 아깝지도 않아요?”
“…….”
다소 난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울려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허나 이벽은 새삼 궁금해졌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무슨 소리에요? 당연하죠.”
휙, 왕수련이 이벽을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를 알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외려 이벽의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가벼이 흘려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정직한 말이었다. 훗, 왕수련이 가볍게 웃었다.
“설마… 전혀 몰랐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오빠, 그건 진짜 너무한 건데.”
“…….”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문득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허나 딴생각이 스치기도 전, 덥석, 왕수련이 이벽의 손을 붙들었다.
“괜찮아요. 저도 알아요~ 오빠가 아직은 저를 그런 식으로 생각은 안 한다는 거.”
“…….”
“하지만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고… 누구누구 덕분에 기다리는 데에도 아주 도가 텄거든요.”
소녀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두고 봐요. 일단 마을에 머무르게 하는 건 성공했으니, 다음은 나를 택하게 만들 거니까요.”
“…….”
그리고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이벽은 곤혹스러움을 벗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할 말을 떠올릴 수 없음을 이해했다.
다만.
붙잡은 손은 따뜻했다.
움찔.
그리고 그 순간.
이벽은 다시 몸 안을 스치는 열기를 느꼈다.
“……!”
그리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이벽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왕수련의 말이 생각을 만들었고, 생각이 마음을 움직였고, 마음이 움직이자 열기가 일었다.
그것은 즉.
선천의 힘이었다.
선천의 힘이란, 마음의 힘이다.
과거, 왕수련에 의해 계곡의 폭포에서 끄집어내어진 순간, 관계를 받아들인 순간, 자신의 마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힘’을 내어주었었다.
우우웅.
그리고 지금.
실낱같은 힘이 요동쳤다.
그것은 여전히 예전에 비하면 미약한 흐름이었으나… 어쩌면 아주 조금은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기분탓일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얼어붙은 선천의 힘을.
다시 녹여내는 열쇠는.
타다닷.
“혀, 형님—!!”
“벽이 혀엉—! 누나아—!”
이벽은 생각을 갈무리하려 했다.
허나 그때였다. 저만치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왕일상과 왕이강 형제들이었다.
“…쳇. 눈치 없는 자식들.”
왕수련이 조용히 혀를 찼다.
허나 거리가 가까워지자 왕수련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동생들의 몰골이 엉망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너희들?! 꼴이 왜 그래?! 다쳤어?!”
“흐어엉! 서… 석두 형이……!”
* * *
“우, 우리는 그,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가, 갑자기 와서 뭐라고 하면서……!”
왕씨 형제는 횡설수설하면서도 어떻게든 설명을 이었다.
장석두의 허리에 찬 목검을 발견한 일련의 무리들이 다가와 시비를 걸었고, 일방적인 공격 끝에 장석두를 끌고갔다고 하였다.
“그, 그리고… 혀, 형님을 알고있었어요! ‘비, 비룡대주 이벽’을 찾아왔노라고……!”
“……!”
찌잉.
이벽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듯 차가워졌고, 이내 오한이 일었다. 빠드득, 움켜쥐어진 주먹이 경련했다.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을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악몽이 뒤를 쫓아왔다.
“…석두는 내가 데려올 테니 아무 걱정 말아라. 너희들은 객잔으로 가서 사저와 사형에게 얘기를 전해라.”
그리고 이벽은 즉시 자리를 박차려 했다. 허나 그때 왕수련이 소매를 붙들었다.
“오, 오빠… 하, 하지만 오빠, 지금 몸이 안 좋잖아요? 어, 언니들이랑 같이가는 게……!”
말마따나.
이벽은 ‘약해졌다’. 허나.
머뭇거리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문제없다. 다녀오마.”
“제, 제발 조심—!”
타앗.
왕수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벽은 이미 땅을 박찼다. 왕씨 형제들이 가리킨 서쪽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후웅.
“허, 허억!”
“으악, 뭐야?!”
미약한 열기가 고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청강유엽신법, 쾌의 묘리가 펼쳐지며 이벽의 신형이 쏜살처럼 길을 내달렸다.
날카로운 바람이 인파들의 사이사이를 누볐고 옷깃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질겁을 했다.
타앗.
“…으득.”
내달리는 한편, 이벽은 이를 갈았다. 분노, 불안, 공포 따위의 감정들이 마구 소용돌이쳤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또한 짚히는 원한은 한두 개가 아니므로, 적의 정체조차 특정할 수 없었다.
이벽은 자책했다.
스스로의 지긋지긋한 안일함에 대해 분노했고, 감히 장석두에게 손을 댄 적들에게 분노했다.
전투에 앞서 흥분은 이로울 게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타앗.
이벽은 목책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끄윽, 끄으으으……!”
어딘가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타앙.
이벽은 그 즉시 소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저만치 나무 사이로 쓰러져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장석두였다.
“장석두, 괜찮나?!”
“혀… 형님……!”
스윽, 장석두가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 된 얼굴이 이벽을 향했다.
“오… 오지 마십쇼!! 크윽—”
패앵! 슈슈슉.
그 순간.
활시위가 튕겨지는 소리와 함께 이벽의 양측에서 대여섯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허나 물론 그 정도쯤의 암습은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타앙, 채앵!
청강유엽신법이 춤을 추는 한편, 마침내 이벽이 발검했다. 이내 모든 화살들이 쳐내어지거나 빗나갔다.
“…크.”
허나 이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해야 잠깐의 신법에 청강검식을 펼친 것만으로, 실개울같은 내력이 뻐근함을 호소했다.
타다닷.
“핫! 역시 안 먹히는군!”
허나 다음 순간.
두 명이 인영이 장석두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석두의 양팔을 낚아챈 뒤 훅 물러섰다.
물론 이벽은 뒤쫓으려 했다.
탓, 후욱.
“갈, 어림없다—!!”
허나 그 순간, 이벽의 좌우에서 또 다른 두 명의 인영이 튀어나오며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챙, 채앵.
“……!”
적들의 검은 무거웠다.
허나 쳐내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검로는 눈에 보일만큼 뻔했으며, 적은 내력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허나 그 순간.
섬찟함이 등줄기를 스쳤다.
적의 검로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허, 허헛! 이거야 원, 정말로 네놈이 맞군, 그래! 정말로 살아있었어!”
“……!”
또한.
상대방 역시 이벽의 청강검식이 아주 익숙한 듯했다. 타앙, 이벽은 두 자루의 검을 쳐내었다.
그리고 경신법으로 곡의 묘리를 펼치며 황급히 물러섰다.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짝짝짝!
“후훗… 하하핫!”
그리고 그때였다.
저만치 장석두를 끌고간 방향에서 손뼉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접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하… 으하하! 하핫, 크하하하—!!”
웃음은 괴소로 번져갔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이벽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정말로… 정말로 살아계셨군요!”
그것은.
악몽 속에서 몇 번이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꼭 닮아 있었다. 훅, 이벽의 고개가 움직였다.
* *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말문이 틀어막혔고, 피를 보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려 했던 분노마저 한 순간 갈피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분노에 가려져 있던 적의 면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얼굴이었으며, 또한 이벽에게 있어 모든 은원들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깊은 이들이기도 했다.
한때는 문중의 어른으로 모시던.
운남 선우세가의 장로들, 그리고.
“정말로… 형님이 맞군요.”
이벽의 호흡이 흔들렸다.
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헌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형님? 거진 이 년 만에 만나는 이 아우가 반갑지 않으신가요?”
“…선우협.”
마침내 이벽이 말했다.
“하핫… ‘선우협’이라?”
그리고 선우협이 답했다.
“오늘따라 제 이름이 퍽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더는 이 아우를 ‘협’이라 다정하게 불러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선우협은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은 태연했으며 언제나 자신의 뒤를 쫓던 그 아이를 꼭 닮아있었다.
때문에.
이벽은 할 말을 찾기까지 퍽 기나긴 침묵을 필요로 했다.
“…나는 선우벽이 아니다.”
마침내 이벽이 말했다.
“암요, 이를 말입니까? 사패련의 초신성이자 천하제일 후기지수이신 비룡대주 이벽이시죠.”
그러자 선우협이 즉답했다. 태연한 미소 위로 짐짓 안타까운 듯한 표정이 겹쳐졌다.
“과연, 역시 나의 형님이십니다. 화살을 맞고 절벽으로 떨어져도 되살아난 것뿐 아니라… 무려 사파의 영웅으로 거듭나시다니요.”
선우협이 뒷짐을 졌다. 저벅, 흡사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연하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형님을 보고싶어 했는지?”
“…….”
“저는 처음부터 살아계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산 전체를 샅샅이 뒤져도 뼛조각 하나 나오질 않으니, 내가 아는 형님이라면 당연히 어떻게든 살아남으셨겠죠.”
저벅저벅.
선우협이 장석두의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뵙기까지가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우연찮게도… 이 촌동네에 형님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툭툭, 장석두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래서 찾아왔다가… 칼을 찬 녀석이 있길래 궁금해서 찔러본 것뿐인데 웬걸, 자세히 살펴보니 촌놈한테서 본가의 수련검이 튀어나오지 않겠습니까?”
“……!”
“하하!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대 선우세가의 ‘소가주’를 향해 청강수련검식을 펼치다니요, 정말 어리석은—”
“…선우협.”
이벽은 다시 입을 열었다.
끝끝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허나.
이벽은 선우협과 장석두를 바라보았다. 장석두의 상처를 살펴야 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대화에 이 이상의 시간을 쏟을 수 없었다.
“내 ‘동생’에게 손대지 마라.”
“……!”
움찔.
선우협의 눈썹이 흔들렸다.
“…형님, 지금 뭐라—”
“지금 당장 그 애를 놔라. 그리고 이 근방을 속히 떠나라. 지금이라면 해치지 않고 살려서 보내주마.”
“…….”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벽이 말했다. 그리고.
선우협의 미소가 흔들렸다.
“크… 크핫.”
그리고 뒤틀린 웃음이 피어났다.
또한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크하하, 으하하하하!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