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1)
21화. 깨달음
휘오오!
살을 에는 칼바람이 일었다.
쇠약해진 몸은 고작해야 몇 걸음을 뗀 것만으로 삐걱거리고 숨결이 거칠어진다.
허연 입김이 이벽의 입 바깥으로 새어나갔다. 하지만 그조차도 현실감은 없었다.
점점 거세어지는 눈발을 맞으며 이벽은 산길을 타고 올랐다.
마음은 절박했고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쏴아아아!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이벽이 도달한 곳은 계곡이었다.
앞서 몇 번이고 와 보았던 곳이지만, 그러나 깊은 산속 겨울의 계곡은 본래 알고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가 된다.
군데군데 살얼음이 낀 물살 위로 칼날처럼 부서지는 포말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간담을 서늘케 한다.
첨벙!
이벽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일시에 온몸이 젖어 들었고 날이 시퍼런 냉기가 와락 달려들었다.
바르르, 몸이 경련했다.
이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헤엄을 쳤다.
사지는 젖은 종이처럼 물살에 흔들렸고 이벽은 몇 번이고 급류에 휩쓸릴 뻔했지만, 용케 빨려들지는 않았다.
계곡을 가로지른 이벽이 마침내 폭포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지척까지 다가가자 그 기세가 피부 위로 와닿는다.
폭포가 떨어지는 중턱에는 너른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수한 세월과 폭포에 깎여 마침내 평평해진 바위.
이벽은 그 위로 올라섰다.
폭포 속으로 온몸을 밀어 넣었다.
콰콰콰콰!
그 즉시 수압이 온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물살은 무자비했고 소음은 귀를 찢어놓는 듯했다.
이벽은 쓰러지듯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뼈를 스미는 냉기 속에서 가까스로 정좌를 틀었다.
다닥다닥!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윗니와 아랫니가 맞부딪히기 시작했고,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러나 이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죽기로 결심한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살기 위한 몸부림.
그 어떤 감각도, 심지어는 고통마저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 지독한 비현실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콰콰콰콰!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이벽은 비로소 아주 약간의 편안함을 느꼈다.
희미하지만 이곳에 내가 있다는 감각.
몸 안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혈관을 타고 흐른다.
식어가는 몸을 어떻게든 덥히려는 듯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야위고 허약해진 이벽의 몸은 계속해서 차갑게 굳어갔고, 서서히 목숨의 기로로 다가서고 있었다.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다.
이내 조금씩 시야가 흐려졌고, 몸을 덥히는 기운마저 가라앉는다.
이벽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추위가 더욱 편안해졌다.
그리고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누워있고도.
“으아악! 오, 오빠!! 벽이 오빠!!”
그때였다.
날 선 목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가라앉던 이벽의 의식을 깨웠다.
이벽의 눈이 힘겹게 뜨였다.
시야를 뒤덮는 물살 너머로 저만치에 서 있는 인영을 본다. 인영이 가쁜 숨을 내쉰다.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였지?
“뭐—”
이벽을 발견한 소녀가 입을 열다가 말문이 막힌 듯 큭, 숨을 들이켰다. 질끈 눈을 감는다.
“뭐 하는 짓이야 이 미친놈아—!!”
첨벙!
소녀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얼음장 같은 계곡을 헤치며 이벽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살에 치이는 모습은 위태롭다.
‘오지 마라.’
갑자기 이벽은 두려워졌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마음만이 한껏 옥죄어진다.
다행히 이리저리 떠밀리면서도 소녀는 어떻게든 이벽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촤앗, 바위 위로 올라섰다.
“주주,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모, 못 죽어요!! 누구 맘대로! 내가 그렇게 놔둘 줄 알아?!”
뚝뚝, 젖은 생쥐 꼴이 된 소녀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표정만은 분기에 차 있다.
“흑, 씨! 내, 내가 그러라고 여기 가르쳐 줬냐고?! 흐읍, 다 이를 거야! 언니한테 뚜들겨 맞고 다리 몽댕이 부러져야 해! 흐어엉!”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성큼성큼 이벽에게 다가왔다.
“그니까 일단 집에 가!”
소녀가 대뜸 두 손을 뻗었다.
억센 동작으로 폭포 안쪽에서 이벽의 몸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여린 어깨가 자기 몸보다도 큰 이벽을 부축했다.
첨벙!
소녀가 망설임 없이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벽을 붙든 채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의 몸을 지탱한 소녀는 다가올 때와 달리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치잇!”
소녀는 필사적으로 팔을 저었다.
그러나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두 사람은 조금씩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폭포와 수면이 부딪히는 지점.
급류의 진원지에서 소용돌이가 형성되고 있다.
이대로 계속해서 빨려들다간 계곡의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퍼뜩, 이벽은 정신을 차렸다.
그토록 갈구하던 현실감이 단 한 순간 거짓말처럼 스며들었다. 위험하다. 이대로는 어느 쪽도 살 수 없다.
“…날 놔라, 수련.”
이벽은 목소리를 짜냈다.
“닥쳐요!! 절대 안 놔!!”
왕수련은 오히려 이벽을 더 강하게 붙들었다.
그러나 왕수련이 무슨 짓을 한들 이 상황에서 물살을 이겨내는 것은 요원하다.
이벽이 스스로 떨어져야 한다.
판단을 마친 이벽은 팔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마비된 몸은 감각조차 없다. 고작해야 손가락 끝이 까닥였을 뿐이다.
콰콰콰콰!
그리고 다음 순간, 거센 물살이 두 사람을 머리끝까지 삼켜버리고 말았다.
회전 속에서 두 사람이 맥없이 가라앉았다.
부그르르.
물결 속에서 이벽은 눈을 떴다.
삽시간에 물을 먹어버린 듯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왕수련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를 구하려 했다.
무공은커녕 완력조차 대단치 않은 그녀가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녀의 삶이 이런 식으로 자신과 함께 끝나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벽은 몸 안에서 내공을 느꼈다.
지켜야 한다고 간절히 생각했을 때, 몸 안에는 당연하다는 듯한 줌의 기운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을 담보로 쥐어 짜낸 힘.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지.
범을 상대할 때에도, 청성의 무인을 상대할 때에도 그랬다. 고작 한 줌의 힘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보다 확고한 힘이 필요하다.
꿈틀.
그때, 이벽은 느꼈다.
내력이… ‘스스로’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으나 이벽은 확신했다. 그것은 마치 이벽의 마음에 화답을 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
불현듯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 어쩌면 알 것 같다.
이 기운의 정체는… 단순히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소모될 뿐인 평범한 내력 따위가 아니다.
후욱!
이벽은 통제를 거두었다.
그리고 기운의 존재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것에게 스스로 움직일 자유를 줬다.
우우웅!
그러자 그 순간, 내력이 가볍게 진동했다. 마치 이제야 이벽이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을 기뻐하는 듯했다.
다음 순간,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청강유엽공의 경로를 따라 흘렀다.
아니, 흐름이라기보단 오히려 실타래에 가까웠다.
스스로를 풀어내듯, 그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토해내고 길어졌다. 고작해야 한 줌에 불과하던 것이 끝도 없이 불어났다.
“……!”
단단한 실이 이벽의 혈도를 감싸며 계속 전진했다. 마치 내공심법이 ‘저절로’ 운용되는 듯했다.
이내 한 바퀴를 돌아 앞과 뒤가 만났다.
꽈악, 매듭이 묶어졌다.
순환하는 고리가 완성되었다.
우우웅!
몸 안이 충만해졌다.
퍽 황홀한 기분이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내력.
그것은… 앞서 무리하게 내력을 짜냈던 두 번의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몸 안에 흐르는 순환의 확고한 존재감을 붙잡는다.
마침내 이벽은 그토록 갈구하던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깨달았다.
그 힘의 본질은 내력이 아니었으되, 내력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내력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이미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한 자신의 몸으로 이 급류를 벗어나는 건 무리일 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스운 결말이 되어버렸군.
그렇지만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다. 우웅, 이벽의 혈도를 감싼 힘이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정체불명의 내력이 두 팔을 감쌌고, 손끝에 힘이 어렸다.
마침내 충분한 기운을 축적한 순간.
터엉!
내력이 한꺼번에 발산되었다.
밀쳐 난 물결이 위로 솟구치고, 그에 휩쓸린 왕수련의 몸도 함께 위쪽으로 솟구쳐 올랐다.
일순 시선이 마주쳤다.
멀어지는 왕수련의 눈빛이 다급하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이벽은 작게 웃었다.
촤앗!
이내 왕수련의 몸이 수면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인해 이벽의 몸은 더욱 깊이 가라앉는다.
호흡이 가빠졌다.
이벽은 최후를 직감했다.
허탈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물론 죽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까지 나쁜 결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엉!
마침내 이벽의 등이 계곡의 땅에 닿았다. 이제야, 그렇게나 닿고 싶었던 지면에 닿았다.
추락은 끝났다.
이벽은 온몸을 이완시켰다.
—형님, 죽어주십시오.
한발 늦은 최후를 받아들인—
촤아악!
허나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이벽의 몸이 수면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세찬 물살이 이벽의 온몸을 스쳤다.
이건 자신의 힘이 아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이벽을 끄집어올리고 있다.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촤악!
삽시간에 수면 바깥으로 건져 올려진 이벽의 몸이 물가에 내려앉았다.
“허억! 헉.”
땅에 내려앉은 순간, 이벽의 몸이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저만치에 왕수련이 엎드린 채 켁켁거리며 물을 토해내고 있다.
어느 쪽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
눈앞에 누군가의 발치가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낚싯대를 어깨에 기댄 사내가 송곳 같은 시선으로 이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끌끌끌, 월척이네, 월척이야.”
“…….”
이벽은 자신의 옷덜미에 낚싯바늘이 틀어 박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벽의 목숨은 또 한 번 같은 사내에 의해 낚아 올려졌다.
“아주 그냥, 잠깐이라도 한 눈 팔면 기를 쓰고 픽픽 죽어간다니까? 막내야. 네가 무슨 병든 닭이더냐?”
“…죄송합니다.”
씨익, 이진천이 웃었다.
“뭐, 그래도 잘했다. 이제는 자기 목숨 귀한 줄을 알았을 테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구만.”
* * *
탈진에 빠진 이벽은 또다시 선우세가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더 이상 현실과 혼동하는 일은 없다.
선우벽은 죽었다.
이벽이 있을 뿐이다.
세가의 텅 빈 연무장에서 이벽은 검을 뽑았다. 청강검식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일식(回劍第一式).
곡검(曲劍).
낭창하게 휘어진 검이 허공을 한 번 베어낸 뒤 다시 이벽의 검집 안으로 수납되었다.
새로운 길의 초입에 섰다.
문득, 이벽은 등 뒤에서 누군가의 존재감을 느꼈다. 이벽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벽에게 검이 있는 한, 존재는 어디까지나 그저 형체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형님, 죽어주십시오.
그림자가 말했다.
“그럴 순 없다.”
—어째서입니까?
“다시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훅, 그림자가 이벽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지킬 것이 생겼다는 것은 지키지 못하거나, 배신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허나 그렇다 한들 검에는 검집이 필요하다. 인간은 관계 속에 머무르고 관계 속에서 흐른다.
두려움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
마음을 가로막은 돌을 치웠다. 그러자 한 줌의 힘이 물줄기처럼 그 틈에서 새어 나왔다.
우웅!
호흡과 함께 물은 몸 안을 순환했다.
육신의 그릇을 잃고도 남은 한 줌의 힘은 마음을 투영하는 힘.
이를 ‘선천(先天)’이라 한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어째서 자신의 머릿속에 그러한 목소리가 담겨있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마음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검은 그러한 생명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훅, 그림자는 사라졌다.
이벽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악몽은 때때로 찾아오겠지.
가슴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튼 채 숨어있다가 언제고 약해진 틈을 타 이벽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이벽은 눈을 떴다.
짹, 짹짹!
창틀 바깥에서 새가 울었다.
씻은 듯이 상쾌한 아침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있었던 기분이 든다.
비척비척, 이벽은 야위어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고, 갈 길도 멀다.
끼익!
방문을 열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