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11)
217화. 청강유엽
네 사람은 시내로 돌아왔다.
낙검문의 아이들을 비롯한 화정촌민들이 머무르고 있을 객잔에 들어서자 왕수련이 제일 먼저 달려 나왔다.
“서… 석두야! 괜찮아?! 응?!”
“어… 응.”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얼굴이 두 배가 됐잖아! 그러니까 칼 찬 인간들 보면 무조건 숙이고 튀라니까 왜 시비를 받아주냐고!”
“아, 아니 그게…….”
퍽퍽, 울상을 한 왕수련의 손바닥이 장석두의 등을 연신 두드렸다. 장석두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 사저 그게 아니라… 나는 진짜 사저를 생각해서… 왜, 사저는 사저만의 방식이 있는 거잖아……?”
“아유~ 그럼요. 절정고수님께서 어련히 깊은 뜻이 있으셨겠죠? 다 이 사저가 재능도 없는 주제에 속까지 좁은 탓이지요~”
“아아아…….”
한편, 돌아오는 내내 혁대웅은 내력의 존재를 숨긴 죄로 여전히 제갈소미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
장석두와 왕수련.
혁대웅과 제갈소미.
이벽은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득 웃음이 스쳤고, 동시에 가슴 한켠에 다시 한 줄기 온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확신했다.
그것은 분명 이진천에 의해 얼어붙은 선천의 힘이 ‘다시 녹아내리는’ 감각이었다.
과거, 이벽의 낙검진천신공은 왕수련과 함께 얼어붙은 계곡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을 때 처음으로 눈을 떴다.
가까운 이를 지키기 위해.
마음은 필요한 힘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분명 ‘관계’의 힘이었다.
검에는 검집이 필요하듯, 인간은 관계 속에 머무르고 관계 속에서 흐른다.
지키고자 할 때.
마음은 가장 단단해진다.
그리고 현재.
관계에 속해있음을 느낄 때마다 얼음이 녹아 강물이 되듯, 한 올의 선천의 힘이 다시 이벽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선천의 힘이란 본래부터 그 자체로 마음과 같아 단번에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이벽은 이해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힘’은 없다.
과거의 자신은 그저 마음의 돌을 치우고 길을 내었을 뿐, 본질적으로 ‘이진천의 검을 빌려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나.
이제부터는 오롯이 자신만의 검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오라기로 한땀 한땀 옷감을 짜듯,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일 테다.
어쩌면.
예전과 같은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퍽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핫.”
허나 이벽은 다시 웃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 이상 답답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전에 없이 편안했다.
무엇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이 관계 속에 나 자신으로서 머무르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것은 너무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왜 웃냐, 꼬맹아?”
혁대웅을 탈탈 털던 제갈소미가 말했다.
“그냥 웃겨서 웃었다.”
“…뭐?”
덥석.
그때 왕수련이 이벽의 손을 붙들었다.
“오빠, 진짜 고마워요. 석두 구해줘서. 그리고 오빠도 안 다치고 무사히 돌아와서요.”
“딱히 고마워할 건 아니다.”
“그래도요.”
문득 왕수련이 이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빠 요새는 뭔가 잘 웃네요. 예전에 웃는 얼굴은 진짜 귀신 같았는데.”
“…그렇군.”
말마따나.
언제인가부터 웃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무림에서의 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웃어요.”
왕수련이 웃었다.
“…….”
우수수.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는 낙엽이 흩날렸다. 바람은 불안감을 날려 보내듯 경쾌했다.
가진 은원은 셀 수 없이 많다.
허나 가진 악몽들 중 가장 뿌리 깊은 것을 숲에 두고 왔으므로, 적어도 오늘 밤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은 화정촌으로 돌아왔고.
이벽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쏴아아.
꿈속에서.
이벽은 다시 산어귀에 서 있었다.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올려보았다.
날이 추워지면 나뭇잎은 서서히 빛이 바래고 이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허나 봄이 되면 메마른 가지 위에는 어김없이 새잎이 돋아난다.
저물고 피고 춤을 추며 떨어지는 그 모든 생애의 과정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흐름과 같았다.
청강유엽(淸江流葉).
낙엽이 유수를 타고 흘렀고, 꿈속에서는 이따금씩 정겨운 얼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잔잔한 웃음 속에서.
얼음이 조금씩 녹아갔다.
화아악.
“……!”
허나 그때였다.
나뭇잎들이 불타올랐다.
움찔, 이벽의 동공이 흔들렸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급기야 이글거리는 불길이 산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마(火魔) 속에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자신의 손에 피 묻은 검이 들려있음을 발견했다. 덥석, 누군가가 이벽의 발목을 붙들었다.
벌떡.
이벽은 잠에서 깨어났다.
* * *
어느덧 아침이었다.
당연하게도 낙검문의 처소였으며, 딱히 악몽을 꾼 것 같지는 않았으나 몸은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문득, 이런 식으로 꿈속에서 쫓기듯 깨어나는 것도 퍽 오랜만이란 감각이 스쳤다.
치이이익.
문득 기름진 냄새가 맡아졌다.
마당에서 화전이 구워지는 냄새였다. 그것은 무언가 특별한 날이 있을 때마다 펼쳐지는 낙검문의 행사 같은 것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허나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드륵.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리를 정리한 뒤 문밖으로 나서자 마당 겸 연무장에는 화정촌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치이익.
이벽의 예상대로 한가운데에서는 달궈진 철판 위에서 전이 구워지고 있었다.
“……?”
허나 굽고 있는 이는.
제갈소미가 아닌 혁대웅이었다.
“오, 일어났구나, 벽아.”
이벽을 눈치챈 혁대웅이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그리고 혁대웅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사내가 우렁차게 외쳤다. 사내의 덩치는 혁대웅에 버금갈 정도로 듬직했다.
“……?”
사내의 면모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쪽은 누구시오?”
이벽이 물었다.
“…네? 저요?”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의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저… 석둔데요 형님?”
“…….”
사내는 분명 장석두와 닮았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사내는 장석두가 맞았다. 소년은 어느새 건장한 사내가 되어있었다.
“…벽아?”
그때, 다시 혁대웅이 말했다.
이벽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집게를 장석두에게 넘긴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쿵, 쿵,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 혹시 열 있니? 잠깐 와봐.”
“……!”
그리고 걸음걸음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혁대웅의 덩치가 무섭게 커지기 시작했다.
쿵, 쿵.
그리고 삽시간에 이벽의 코앞까지 다가선 그는 언뜻 보아도 구 척을 넘기는 거한이 되어있었다.
뻐억.
“컥!”
그리고 처마에 이마를 부딪혔다.
“…에이, 이놈의 처마는 왜 이렇게 낮아?”
“…….”
혁대웅이 이마를 문질렀다.
문득, 사패련주 패왕 혁군악이 문틈에 머리를 부딪히던 기억이 이벽의 기억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마가 낮은 게 아니라 네가 너무 큰 거야 이 곰탱아.”
그때 제갈소미가 말했다.
“원, 아무리 곰탱이라도 그렇지 적당히 눈치 보면서 커져야지… 이제 시장통을 뒤집어엎어도 맞는 옷이 없다고, 너.”
“…너무해, 사저.”
이벽은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부엌 쪽 모서리에서 나타난 그녀는 국물이 담긴 통을 들고 있었다.
“사저…가 맞나?”
“…뭐? 저건 또 왜 저래?”
허나.
목소리는 분명 제갈소미였으되, 그녀의 모습 역시 더 이상 이벽이 알고 있던 소녀가 아니었다.
어느덧 여인이 되어있었다.
또한 가볍게 그을린 피부와 더불어 질끈 동여맨 머리칼, 날이 선 이목구비는 단출한 차림으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피어났다.
“하아… 그만해라, 꼬맹아. 주기적으로 잠꼬대하는 거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정말.”
제갈소미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국물통을 내려놓고선 휙휙,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얼른 가서 세수하고 정신이나 차려. 빠져 가지고 혼자 늦잠이나 자고 말야.”
“…알았다.”
이벽은 자리를 떠났다. 애써 감도는 위화감을 삭이며 인근의 물가로 향했다.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다고 꼬집어 말하긴 어려웠으나 물가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조차 퍽 낯설게 느껴졌다.
이벽은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차가운 감각 속에서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그저 하룻밤 잠들었다 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허나…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기억이 제멋대로였다.
이벽은 반복해서 물을 끼얹었다.
“오빠.”
허나 그때 누군가가 다가섰다. 그리고 물가에 비치는 그림자 하나가 늘었음을 확인했다.
“세수를 왜 그렇게 오래 하고 있어요? 하도 안 와서 냇물에 빠진 줄 알았잖아요.”
“…….”
이벽은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다는 듯 왕수련이 서 있었다. 이내 자리에 주저앉으며 이벽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젖살이 빠진 아이는 몰라볼 만큼 선이 고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자요, 애들이 몽땅 먹어 치울까 봐 얼른 챙겨왔어요.”
그녀의 손에는 접시가 들려있었으며, 김이 나는 화전이 담겨있었다.
“…….”
이벽은 화전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엥?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빠? 오늘이잖아요. 오빠가 우리 마을에 처음으로 온 게.”
“……!”
“벌써 오 년이나 됐네요.”
오 년.
이벽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말인즉슨, 이벽이 무림을 종횡하다 다시 낙검문으로 돌아온 것도 어느덧 사 년 전의 일이란 뜻이었다.
시간은 참으로 유수처럼 흘렀다.
“수련, 네가 몇 살이지?”
“열아홉이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
“세월은 원래 그런 거예요. 그리고 오빠는 이제 어엿한 약관의 사내인걸요.”
“…….”
“자, 아 해요.”
왕수련이 젓가락을 집었다.
화전 한 조각을 집어서 내밀었다.
“…그건 좀.”
“빨리해요. 나 팔 떨어져요.”
* * *
“막내야, 막내야?”
흠칫, 이벽의 어깨가 흔들렸다.
“이거야 원, 철새도 아니고 대체 정신머리가 자꾸 어디로 날아갔다 돌아오는 게냐?”
이벽은 옆을 돌아보았다.
낙검문주 이진천이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낙룡폭포 상류의 물가에 나란히 앉아있었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각자의 낚싯대를 쥐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끌끌,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그래서야 어디 밥이나 벌어먹고 살 수 있겠느냐?”
“…….”
이벽은 답하지 못했다.
매해 그래왔듯, 작년 겨울이 끝날 무렵 마을을 떠난 이진천은 올해 여름이 시작될 즈음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고선 이벽에게 대뜸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노라’ 하였다.
물론, 이벽은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나란히 낚싯대를 쥐었다.
허나 한나절이 다 가도록.
이벽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했다.
“…….”
물론, 변명거리는 차고 넘쳤다.
이벽은 낚시를 해본 적이 없었다.
물고기를 잡고자 한다면, 그저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검을 사용하면 손쉬운 일이었다.
하물며.
낚싯대라고는 해도 그저 실끝에 바늘을 매달았을 뿐, 아무런 미끼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물고기가 쉬이 낚일 리 없다.
촤앗.
허나.
그러한 변명이 무색하게끔, 이진천의 바구니 속에는 계속해서 물고기가 늘어가고 있었다.
“…….”
미끼조차 없는 바늘에 물고기는 자꾸 걸려들고 있다. 그 안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지, 이벽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올해로 약관이던가?”
문득 이진천이 물었다.
지나가듯 가벼운 말투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지난 세월은 어떻더냐?”
“…….”
이벽은 잠시 답할 말을 고민했다.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 사이 몇 년이 지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보인다. 끌끌끌.”
이진천이 혀를 차며 웃었다.
“그럼 된 거다.”
“…어떤 말씀이십니까?”
“자고로 허송세월만큼 즐거운 게 없다. 세월이 막힘없이 흘러갔다면 그만큼 네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단 뜻이 아니냐?”
“…….”
답할 말은 마땅치 않았다.
허나 동시에 이벽은 생각했다.
이진천의 말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해야 할 말들이 앞다투어 떠올랐을 것이었다.
낙검문의 제자 이벽은.
즐거운 세월을 보냈다.
“헌데 말이다.”
훅, 이진천이 낚싯대를 당겼다.
또 한 마리의 물고기가 늘었다.
“그래서 네 검은 도로 낚았더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