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26)
232화. 하오문주 (1)
풀썩.
“…큭!”
왼쪽 허벅지를 베인 안겸의 신형이 일순 흔들렸다.
다행히도 치명상은 아니었으므로 황급히 균형을 되찾았다. 허나.
“…….”
이미 접전은 멈추었으며.
장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은 지금, 이벽이 펼쳐낸 한 수가 고 노야와 초연서, 두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린 순간, 이벽은 오히려 본인에게 가장 익숙한 청강유엽공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 노야에게서 비롯한 적파심공의 강기로 고 노야와 맞부딪힘으로써, 무수한 강기의 ‘파편’들을 일으켰다.
곧이어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이번에는 초연서에게서 비롯한 팔절구궁필법의 기예, 잔월을 통해 주변의 파편들을 원 안에 가두고 선으로써 밀어내었다.
거리를 점하여.
고 노야도, 초연서도 아닌 가장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안겸에게 기어코 상처를 입혔다.
그것은 과거, 이벽이 흑천방주 맹철극을 상대했을 때 뇌기를 모아 쏘아낸 것과 같은 원리였다.
허나.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스치는 것만으로 뼈와 살을 베는 강기의 파편 속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초연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핫.”
이내 초연서는 웃었다.
“아하핫, 오호호홋!”
그리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 노야와 이벽, 안겸의 시선을 한 번씩 마주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할까요?”
이내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이벽이 답했다.
“뭐겠어요?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겠단 뜻이죠.”
“…….”
“안 대협이 다리를 다친 이상 속도는 점점 느려질 거고… 결국 공자를 봉쇄한 우리의 진형도 서서히 어긋나겠죠?”
초연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싸워봤자 우리가 패배할 공산이 크다면 굳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잖아요?”
“…거 좋은 생각이시오, 선배.”
터덜터덜, 다친 다리를 끌며 안겸이 다가섰다. 불빛에 비치는 안색은 퍽 초췌했다.
“나 원, 이 안 모가 오늘 한 수 배웠소. 이놈의 발재간이라면 꼭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다칠 일은 없다 자부했는데… 일순 간담이 서늘했지 뭐요?”
안겸이 이벽에게 포권했다.
스윽, 철컥.
그리고 고 노야가 도를 거두었다.
훅,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섰다. 저벅저벅, 이내 처음 나타났던 때처럼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훌륭해요, 공자.”
초연서의 손이 이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가 가르쳐준 힘으로 우리를 제압하다니…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요. 오호홋!”
“…과찬이십니다.”
“그래요. 퍽 복잡한 기분이 드는군요. ‘대주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무림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 공자.”
“…….”
무림으로의 귀환.
일순 이벽의 마음속에서도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허나 곧 생각을 달리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수호대주가 된 겁니까?”
다시 이벽이 물었다.
“…글쎄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건’을 갖추었더라도 그것을 결정하는 건 저희가 아닌 문주님의 뜻이라서요.”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그 뜻을 물을 수 있습니까? 광동에 있다는 하오문의 본단입니까?”
“…호홋.”
이내 초연서의 웃음에 조금 난처한 기색이 서렸다.
“그렇게 먼 길을 직접 가실 필요는 없어요. 아마 며칠이면 소식이 전달될 테니…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
이벽은 침묵했다.
잠자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만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또한.
어차피 하오문주를 만나 정보를 얻는 게 목적이므로, 결국은 직접 찾아가야만 할 것이다.
저벅.
허나 그때였다.
초연서의 등 뒤로, 전각 내부에서 인영 하나가 걸어 나오는 것이 이벽의 눈에 띄었다.
저벅저벅.
인영이 일행들에게로 다가왔다.
불빛에 비치는 정체는 조금 전 천향루주 지소약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났던 호위 역할의 젊은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죠?”
“…루주님께서는 일전이 마무리되었다면 공자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초연서가 물었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이벽은 조금 의아해졌다.
조금 전, ‘수호대의 일은 수호대끼리 알아서 정리하겠다’는 초연서의 말에 따라 지소약은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 와서 자신을 찾을 이유는―
“…그렇군요. 가보세요, 공자.”
허나 그때, 초연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이벽은 초연서의 목소리에서 묘한 기척을 느꼈다. 이내 이벽은 순순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두 사람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한편, 이벽은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향루주 지소약의 제자이자 호위의 역할은… 본래는 언미희의 자리였다.
언미희를 생각하면.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벽은 퍽 복잡한 기분이 들었으며, 그것은 다른 비룡대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멋대로 무림을 떠나버린 자신을 현재의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무림으로 나선다 해도.
혈마의 뒤를 쫓기로 결정한 이상, 위험이 따를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목숨마저 걸어야 한다.
따라서 이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그들과의 재회가 서로에게 좋은 일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
저벅.
그때였다.
앞서가던 여인이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동시에 이벽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왜 그러시오?”
“저는… 저 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공자께서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
정면에는 어느덧 계단이 끝나고 삼 층의 별실로 이어진 문이 나타나 있었다.
또한 기세가 범상치 않은 두 무인들이 그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알겠소.”
이벽은 여인을 지나쳤다.
문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의 안면 좌측을 길게 가로지른 검상을 바라보았다.
“혹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소?”
“…….”
허나 대답은 없었다.
머쓱해진 이벽은 다시 돌아섰다.
드르륵.
문을 지키는 무인들을 지나친 뒤,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이름 모를 꽃 향기와 함께 은은한 등불이 비추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공자~.”
“……!”
그리고.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저만치의 끝자리에 앉아 이벽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소약이 아닌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월향 소저?”
하오문 수호대의 기녀, 월향.
앞서 그녀는 고 노야나 초연서와 마찬가지로 이벽에게 자신의 절기이자 음공인 화영지정의 곡조를 전수해주었던 인물이었다.
“아니, 공자가 아니라 소협이라고 해야 할까요? 매번 뵐 때마다 호칭이 달랐으니 저도 조금 혼란스럽네요, 아하하…….”
월향이 머쓱한 듯 뺨을 긁었다.
오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퍽 천진난만한 웃음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 그간 잘 지내셨소? 헌데… 루주님께서는 어디 계시오?”
퍽 갑작스런 재회에 이벽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목소리를 내었다.
월향 역시 수호대의 일원이므로, 딱히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허나.
“저예요.”
월향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게 무슨?”
“저라니깐요?”
후욱.
그리고 그때였다. 별안간 자리에 앉은 월향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
그것은 마치 수년 가량의 세월이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묘령의 언저리로 보이던 여인은.
순식간에 몸이 자랐고, 팔다리는 길어졌으며, 눈매는 성숙해졌다. 발랄하던 안색에는 어느덧 나른함이 묻어났다.
허나 그것은.
이벽이 알고 있는 천향루주 지소약의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월향은 갑자기 지소약이 되었다.
“…몇 번째 다시 인사를 올리는지 모르겠네요, 소협.”
다음 순간, 지소약이 자세를 고쳤다. 절을 올리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땅에 대었다.
“천향루주, 기녀 월향, 그리고… 모자란 몸이나마 ‘하오문을 이끌고 있는’ 지소약이라 합니다.”
* * *
“……!”
이벽은 정말로 놀랐다.
물론, 월향과 지소약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허나.
심지어… 지금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하오문을 이끌고 있노라’ 소개했다.
말인즉슨.
‘하오문주’의 정체는.
“죄송해요 소협. 놀라셨죠?”
“…….”
지소약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저 세월의 흔적이 조금 깊어졌을 뿐 그녀의 이목구비는 분명 월향을 꼭 닮아 있었다. 또한.
이벽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녀, 지소약이 아닌 수호대의 ‘기녀 월향’을 처음 만났던 것은… 언미희를 납치해간 남궁세가를 쫓던 와중의 어느 주루에서였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는 수호대원이란 정체를 숨기고서 여인보다도 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이벽에게 다가왔었다.
외형의 나이를 바꾸는 것.
‘가벼운 주안술’이라고 하였다.
“…….”
이벽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코 거짓이 아님을 직감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갑작스레 알게 된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잘도 감쪽같이 속이셨군.”
이내 이벽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비밀에 싸인 하오문주의 정체나 그런 하오문주를 알현할 수 있는 수호대의 지위에 관해 설명을 해줬던 건… 다름 아닌 지소약 본인이었다.
“아하하, 혹시… 화나셨나요?”
“…화를 내고 말고 할 이유가 어딨겠습니까? 기밀이란 본래 그런 식으로 지켜지는 것이겠지요.”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순간.
지소약의 모습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세월을 거스르듯 얼굴과 체형이 변화했으며, 이내 다시 월향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역시 소협의 입장에선 제가 이 모습으로 있는 편이 대하기가 편하시겠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사, 상관없군요. 아하하…….”
월향이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너무 낯설어하실 건 없어요, 소협. 문주라곤 해도 형식상의 직책일 뿐이니까요.”
공기를 무마하듯 월향이 말했다.
“사실 ‘하오문주’란 건…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거예요.”
수호대는 하오문주를 알현할 권한을 지닌다. 허나 하오문주는 수호대의 일원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말하자면… ‘문주를 수호하는 수호대’ 전체가 곧 하오문주인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군요.”
“그러니 가능하면 저를…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냥 ‘월향’으로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벽은 다시 생각했다.
어쨌거나 ‘하오문주’인 그녀가 본단이 있다고 알려진 광동이 아닌 이곳 운남 땅에 있는 이유는.
물론, 수호대주 이진천이 인근의 화정촌에 줄곧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허나 어찌 되었건.
이벽은 서둘러 마음을 정리했다. 하오문주의 정체야 어쨌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이벽은 다시 그녀를 향했다.
“그럼 묻겠소, 소저. 아니, 문주. 나는… ‘수호대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네요.”
하핫, 월향이 웃었다.
“이미 저와 저희 하오문의 가장 깊은 속내까지 전부 보여드렸으니, 이제 와서 무르겠다고 하시면 오히려 저희가 난처하겠죠.”
“…….”
“어쨌거나 전(前) 수호대주의 뜻을 지키기 위해 저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았겠어요?”
월향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수호대주.”
“…….”
그리고.
그렇게 이벽은 수호대주가 되었으며, 낙검문주에 이어 또 다시 이진천의 지위를 하나 더 계승했다.
허나 물론.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내게 알려주시겠소?”
“무얼 말인가요?”
“하오문에 대한 것과 현 무림의 정세에 대한 것, 내 사형제의 행방에 대한 것,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말이오. 허나 무엇보다도.”
“…….”
“혈마의 행방을 알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