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검수 이벽 (2)
선천의 힘이 속삭였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듯, 이벽의 머릿속에 무리를 떠오르게 했다.
이벽은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내력을 그저 무턱대고 밀어 넣기만 해선 의미가 없다.
검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도 아닌 검이다.
이벽은 검을 생각했다.
내력이 의지를 타고 목검 안팎에 일정한 형태로 차곡차곡 쌓였다.
배열을 통해 중첩되고 중첩된다.
후욱
다시, 내력의 절반 이상이 한순간에 빨려들었다. 그리고 목검이 살아있는 것처럼 잘게 떨었다.
우우웅!
목검에 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그리 선명하지도, 확고하지도 않았으나 그것은 분명 절정고수의 손에서나 펼쳐질 수 있는 강기였다.
그러나 이벽은 자신의 손에 강기가 쥐어졌다는 사실마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생각할 틈이 없다.
타악, 발을 뻗었다.
이진천을 향해 직진했다.
몸에 스며든 검로를 따라 이벽이 다음 초식을 생각하던 그때였다.
“쩝, 고놈 참 성급하기는.”
슥, 이진천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이벽이 다가선 순간 슬며시 발을 뻗었다. 이벽의 다리 사이로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타악!
다리를 걸린 이벽이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삽시간에 몸이 기울어졌다.
푸욱!
강기를 품은 목검이 연무장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검을 놓친 채 이벽은 데굴데굴 땅 위를 뒹굴었다.
이벽은 그 즉시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문득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음을 깨달았다.
놀란 근육들이 경련하고 있다.
“막내야, 그러다 진짜 죽는다?”
시야에 들어찬 파란 하늘을 가리며 이진천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제 겨우 자리 털고 일어난 녀석한테 또 칼질을 시켰으니.”
“…….”
“신난 거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좀 쉬자. 몸뚱아리 고쳐주는 것도 지겹다, 이제. 응?”
* * *
이벽은 기력을 회복했다.
며칠 간의 간단한 수련과 요양을 통해 손상된 근맥을 다스리고 위축된 기운을 북돋웠다.
놀라운 점은, 선천의 힘이 이벽의 전신세맥을 타고 돌아다니며 그의 빠른 회복을 도왔다는 점이다.
이 역시 강기를 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벽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저절로’ 이루어졌다.
‘…터무니없군.’
어쩌면 내력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은 선천의 힘이 지닌 극히 일부분의 면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알아가야 할 것이 많다.
하나의 벽을 넘어서자 그 너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광막한 길이 펼쳐져 있었다.
이벽은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 즈음, 장석두가 찾아왔다.
“형님! 흐엉엉어!”
“…울지는 마라.”
“크흑,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혹시라도 잘못되시는 줄 알고!”
그 사이 덩치가 더욱 불어난 장석두는 넙죽 엎드린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근골을 보아하니 이벽이 쓰러져 있던 동안에도 청강수련검식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후 제갈소미, 혁대웅과의 상의 끝에 이벽은 장석두에게 본격적으로 무공을 가르치기로 마음 먹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마음껏 굴려주십시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꽉, 주먹을 움켜쥐는 장석두.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목마른 이는 스스로 우물을 찾는다.
이벽에게는 장석두가 받아들이는 한 있는 힘껏 가르쳐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어……?”
장석두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본격적인 전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
내공을 쌓기 위해선 당연히 심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심법을 익히기 위해선.
“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 진짜루요……?”
또르륵, 장석두가 눈알을 굴렸다.
책을 좋아하는 왕수련과는 달리 장석두는 글에 흥미가 없었고, 굳이 배우려 들지도 않았다.
그야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마을에서 살아왔던 장석두가 필요를 느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장석두는 주먹을 말아쥔 자세 그대로 제갈소미에게 질질 끌려 방구석에 유폐 당했다.
“으어어어, 하늘 천… 땅, 땅…….”
그리고 한동안 낙검문에는 초췌한 몰골로 머리를 움켜쥔 채 천자문을 웅얼거리는 장석두의 모습이 맴돌았다.
그렇게 일상이 이어졌다.
이벽은 다시 낙검문의 하루하루에 적응해갔다.
제갈소미와 혁대웅은 각자의 수련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이벽의 성취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물어본들 별수 없음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벽이 맞닥뜨렸고 극복한 마음의 문제는 오직 이벽의 것이며,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벽이 알 수 없는 각자의 문제가 있을 터이다.
그것은 이진천의 말마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도, 섣불리 간섭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벽은 생각했다.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숨기고 싶지는 않다.
생각을 정리한 이벽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선우세가의 사람이었다.”
“응? 벽아, 지금 뭐라고?”
혁대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서서히 당혹감이 번져간다.
“선우세가라면……?”
이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벽아. 미안한데 그게 어디 있는 무가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이벽은 머쓱해졌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선우세가? 곤명의 그 검가?”
그때, 제갈소미가 말했다.
“사저, 알고 있어?”
“뭐, 중원에서야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변방에서는 나름 손꼽히는 무가 중 하나니까. 애초에 이 운남 땅에 제대로 된 무림세력은 그 정도뿐이잖아? 동네 저잣거리만 나가도 얘기가 들리는구만.”
“…….”
“좌우간에… 그렇단 말이지? 사실 대강 예상은 했어. 그 정도 수준의 검공이 아무 문파에나 널려 있는 건 아니니까.”
제갈소미가 말을 잇는다.
“명백히 사파의 무공은 아니야. 그렇다고 오대세가나 구파였다면 내가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
“그렇다면 그다음 정도로 손꼽히는 변방세력 중 하나일 텐데, 그런 곳이 천하에 몇 군데나 있겠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늘어놓은 말이지만, 퍽 타당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 이제야 알겠네. 풍문으로 돌던 ‘행방불명’ 된 선우세가의 전 소가주가 역시 너였구나.”
“…….”
행방불명이라.
이벽은 입을 다물었다.
제갈소미의 표정을 보건대 이 이상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우선, 이벽.”
제갈소미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얘길 지금 왜 한 거야?”
탁, 제갈소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혁대웅의 손에 들린 숟가락은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애매하게 허공에 머물러 있다.
“밥상머리에서 갑자기 너의 비사를 들어버린 우리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냥 말하고 싶었다.”
제갈소미의 눈이 이벽을 향했다.
기색을 읽는다. 이벽의 눈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다.
피식, 제갈소미가 웃었다.
“그래. 하기는 아무렴 어떠니. 선우세가건 뭐건, 문주님부터가 하오문도인 이 마당에.”
“…….”
회택의 장시에서 청성의 제자와 부딪혔던 그때, 이진천은 하오문의 수호령주를 꺼내 들었다.
그 당시 의식을 잃었던 이벽으로선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전말에 대해서는 전해 들은 바 있다.
“나 참, 하오문이라니. 나는 내가 근 2년 만에 사파의 제자가 됐다는 걸 처음 알았지, 뭐니.”
“아, 아하하, 그러게. 사파라니. 세상에 정말 황당한 일도 다 있지?”
문득 혁대웅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제갈소미가 잔을 들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정이니 사니 해도, 세상에는 뒤통수를 치는 정도 있고 구해주는 사도 있지.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알고 있지, 이벽?”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뭐, 정사를 떠나 내공도 없는 우리가 과연 무림인일지 어떨지부터가 이미 문제지만.”
“…….”
“하지만 우리 절정고수이신 막내님께선 어련히 알아서 잘 생각하고 행동하시겠지?”
이벽의 말문이 막혔다.
제갈소미의 입가에 슬며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야, 절정고수. 물 좀 따라봐.”
쫄쫄쫄!
이벽은 잠자코 주전자를 들었다.
제갈소미가 내민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사형제 간의 성취의 격차.
그렇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한다.
턱, 이벽의 어깨에 혁대웅의 손이 얹어졌다.
“벽아, 알지? 너무 지나치게 우쭐하지는 말고. 이래 봬도 무공으로 지고는 못 살거든. 금방 따라잡아 줄 테니까.”
건강한 호승심이 감도는 얼굴.
그 기저에는 오히려 이벽에 대한 배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벽은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난관이 자리하고 있건, 그의 사형제들은 반드시 극복해낼 것이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
그리고 다시 식사가 이어졌다.
그릇들이 거의 비어갈 때 즈음, 제갈소미가 다시 말을 흘렸다.
“이벽, 만약에 말야.”
“뭐지?”
“만약에, 언젠가 우리 중 누군가가 선우세가와 얽히게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그것은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것은 없는 문제였다.
“어떻게도 할 필요는 없다. 사저나 사형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생각하고 행동하겠지.”
“어쭈? 이게?”
* * *
이벽이 의식을 회복한 이후, 며칠이 지났다.
낙검문에는 다시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벽에게 있어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낮에는 장석두를 지도하고 밤에는 자신의 검을 갈고닦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왕수련은 좀처럼 이벽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쳐도 피해버렸다.
휙!
이벽이 먼저 다가서려 해도 왕수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망치듯 제갈소미의 처소로 향했다.
“…….”
오전의 일과가 끝난 이후, 이벽은 다시 왕수련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다.
낙검문을 떠나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잠깐, 할 말이 있다.”
왕수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탓탓, 오히려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타앙, 이벽은 땅을 박차고 한 번에 거리를 좁혔다.
“꺅!”
저만치 뒤에 있던 이벽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나자 왕수련이 놀라며 주저앉았다.
“뭐, 뭐예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벽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왕수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선 뒤 떨어뜨린 책을 주워들어서 탁탁, 모래를 털어냈다.
“뭐가 고마워요?”
“…….”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둘 다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것뿐이잖아요?”
그리고 이벽을 지나쳤다.
왕수련이 화가 난 것은 아마 제갈소미, 혁대웅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무슨 변명을 한들 의미는 없다.
“수련아.”
흠칫, 왕수련의 어깨가 떨렸다.
“미안하다.”
“…왜 사과해요?”
왕수련이 걸음을 멈추었다.
제자리에 서서 이벽을 돌아봤다.
“알아요. 오빠는 잘못한 거 없는 거. 언니한테 들었어요. 몸이랑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
“그냥요, 내가 한심해서 그래요. 나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하면서 바보같이 따라다니고 호들갑만 떨고…….”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들었다.
공기가 어색해졌다. 이런 말을 하게 하려고 붙잡은 것은 아니다.
이벽의 시선이 왕수련이 품고 있는 책에 닿았다.
“수련아, 책을 사러 갈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이벽은 기억을 더듬었다.
왕수련은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장석두와 함께 셋이서 회택의 장시를 돌아다니던 중, 분명히 서점을 본 기억이 있다.
“회택에 가자.”
“네? 지금요?”
왕수련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다.
그리고 회택은 산 아래에 자리한 도시로 아무리 빨리 잡아도 두 시진 가까이 걸리는 곳이다.
“갈 수 있다. 네가 원한다면.”
“그, 그게 무슨…….”
이벽은 다시 손을 뻗었다.
왕수련이 그 손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왕수련이 못 이긴 척 슬며시 그 손을 잡아주었다.
이벽은 그대로 손을 잡아당겼다.
손쉽게 딸려오는 작은 몸. 움찔, 왕수련이 놀란 듯 흔들렸으나 뿌리치지는 않는다.
이벽은 왕수련을 등 뒤로 업었다.
눈을 감고 선천의 힘을 일으켰다.
이내 언제나처럼 충만한 힘이 몸 안을 감싸며 내력의 순환을 만들고 매듭을 이뤄내었다.
“꽉 잡아라, 수련.”
“…네?”
타앗!
“꺄악! 으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