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49)
255화. 서천무존 (2)
“…….”
이벽은 침묵했다.
이내 서서히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공을 딛고 선 채 마주한 서천무존 정룡은 퍽 뻔뻔한 얼굴을 하고서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다짜고짜 마차 위로 습격을 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싸움을 멈추는 것 또한 제멋대로였다.
“응? 그만하자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나?”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이벽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멋대로 시작해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그만두자고 말해도 그게 순순히 납득이 될 거라 생각하시오?”
“클클클! 그것도 그렇긴 하구먼!”
정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자네 눈빛을 보니 슬슬 ‘같이 죽자’는 각오로 달려들 것 같아서 말일세. 그렇게 되면 나도 아주 무사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지!”
“…….”
딴에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면 애초에 왜 다짜고짜 일격을 가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싸움을 시작했는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이벽의 깨달음이 등천에 이르지 못했더라면 마차 안에 있던 시점에서 이미 죽음을 맞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클클! 이거 아무래도 노부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나 보군! 그래, 내 칼을 두 개나 꺼낸 건 사과하겠네! 흥이 좀 과했구먼!”
정룡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뭐, 자네에겐 솔직히 말해도 괜찮겠지. 사실 자네를 공격한 건… 자네가 ‘마인(魔人)’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네.”
“……?”
이벽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마인 말이네, 마인. 개새끼들.”
“…….”
마인(魔人).
돌아오는 답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벽에 있어서는 의미가 불분명한 단어였다. 허나 어째서인지 등줄기로 기분 나쁜 예감이 스쳤다.
클클, 그런 이벽의 내심을 짐작하듯 정룡이 재차 웃음을 흘렸다.
“쉽게 말해서 ‘마교도’란 뜻이네.”
“…….”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듯 정룡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허나 그것은 물론, 이벽으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아, 물론 자네는 마교도가 아니지만 말일세! 실상 처음 일검을 나눴을 때부터 이미 직감했지!”
슥, 정룡이 팔짱을 꼈다.
우우웅.
그 순간, 주변의 기가 움직이며 다시 구름을 형성했다. 이벽과 정룡의 주변을 감싸며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움찔.
가벼운 현기증이 스쳤다.
허나 동시에 이벽은 직감했다.
구름은 구름일 뿐, 용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으며 그 안에는 어떠한 공격의 뜻도 담겨있지 않다.
다만 그저.
대화의 내용이 행여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등천의 영역을 통해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다.
“우리 곤륜은 말일세.”
다시 정룡이 말했다.
“예로부터 선현들이 터를 잘못 잡은 탓에… 서쪽 구석탱이에 짱박혀서 마교가 준동하면 중원의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그 망할 개새끼들과 맞닥트려야 했던 천하의 불우한 새끼들이란 말이지.”
“…….”
“그러니 그만큼 놈들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네. 자네는 분명… 전대미문이라 할 만큼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뤘네만, 단언컨대 마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네. 클클클!”
이벽은 마교도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이벽에게 있어선 당연한 얘기였다. 허나 이벽은 다른 것을 생각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결코 청해를 벗어나지 않는 곤륜, 그것도 서방을 대표하는 절대고수가.
어째서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나타나 오십 년도 더 이전에 자취를 감춘 ‘마교도’를 찾고 있는가에 대해서였다.
“클클클, 머릿속이 퍽 복잡한 모양이구먼! 아마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생각이 맞을 거네!”
“…….”
“아무래도 내 생각에… 이 중원 땅에는 빌어먹을 개새끼들이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 이미 창궐해 있다는 예감이 든단 말이지?”
쿠웅.
고요한 충격이 이벽을 두드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고 자시고 말 그대로일세!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걸 확인하러 이 노부가 산 건너 물 건너 이 빌어먹을 먼 곳까지 찾아오질 않았겠나? 클클클!”
“…….”
이벽은 침묵했다. 다시 헝클어지려 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마교는.
오십 년 전 정사연합 고수들의 합공에 의해 천마를 잃었고, 이후 사실상 궤멸의 길을 겪었다.
그것은 물론, 무림에 크나큰 상흔을 남겼으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지난 과거의 일일 뿐이기도 했다.
허나.
이벽은 근래에 이미 다른 이로부터 그 이름을 들은 바가 있었다.
선우세가주 선우각은 말했다.
검치 선우명은 천마를 찾아 ‘서쪽’으로 떠나갔고,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이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낙검문주 이진천은 그런 검치의 비전을 이어받았다.
물론 그 이야기는.
지금 정룡이 꺼내고 있는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오래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허나.
‘정말로 그런가?’
이벽은 단언할 수 없었다.
불현듯,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는 사실들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한 답답한 감각에 휩싸였다.
“뭐얼,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는 하네! 이제 와서 갑자기 마교라니, 어처구니가 없지? 클클클!”
다시 정룡이 말했다.
이벽의 일그러진 표정을 두고서 그저 단순히 ‘마교’라는 이름에 놀란 것이라 받아들인 듯했다.
“허나 놈들은 그런 식이었네. 뿌리를 뽑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멀스멀 다시 기어 나오곤 하지! 중원인들이야 고작 오십 년 전의 대혈겁만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기실 우리 곤륜이 놈들의 잔당과 맞부딪힌 게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뿌드득, 뿌득.
정룡의 고개가 좌우로 번갈아 꺾어지며 뼈마디가 풀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또한… 이번에는 우리 역시 예상치 못했다네. 설마하니 중원 한복판에 당당하게 씨앗을 뿌려놨을 줄은. 검존 그놈이 웬만해선 우리 곤륜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하진 않을 텐데 말일세!”
“……!”
불현듯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태극검존이라면 물론 이벽 역시 알고 있는 이였다. 허나.
지금 이 순간.
당금의 정파무림에서 그 이름은 무당의 절대고수이기 이전에 ‘정도맹주’로서 더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이가.
서방을 지키는 곤륜에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즉, 정도맹이 상대하고 있는 ‘상대 쪽 집단’에 곤륜의 힘을 빌려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확인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의혈맹, 그리고 황보세가.”
다시, 정룡이 말했다.
“놈들은… 아무래도 힘에 눈이 멀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모양이야. 설령 검존을 속일지라도 내 눈은 못 속이지. 클클클!”
“…….”
정도맹의 반대편에 선 집단.
그것은 물론, 의혈맹이었다.
* * *
“…무슨 근거가 있소?”
이벽이 말했다.
황망한 마음을 수습했다.
“다짜고짜 그런 얘기를 나한테 늘어놓은들 노인장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요.”
말인즉슨.
‘의혈맹이 마교와 얽혀 있다’는 뜻이었다. 허나.
그것은 제아무리 상대가 천하십대고수라고 한들 섣불리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혹은 그저.
적대시하고 있는 상대를 악적으로 몰고 가는 모략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정파를 자칭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정(正)이나 의(義)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뜻이 아님은 이미 충분히 겪어보았다.
“근거? 없네.”
“…….”
“이보게. 자네는 무슨 마교 놈들이 마빡에 마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줄 아나? 아니, 사실은 그런 미친놈들도 없지는 않네만… 대개는 그렇지가 않단 말이지!”
정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저 부딪혀보고 ‘느낄’ 뿐이네. 그리고 그것은 천하에서 우리 곤륜이 제일 잘하는 일이란 말이지!”
말인즉슨.
조금 전 이벽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공격을 가해 알아낸다는 뜻과 진배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다 애먼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당신이 그러고도 도인이요?”
“클클클! 그런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시게! 자네 깜냥을 보고서 그 정도로 힘을 쓴 거지, 내가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얼간이로 보이나?”
“…….”
스윽.
문득 정룡의 손끝이 발아래를 가리켰다. 이벽의 시선이 그 끝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지면으로부터 오 장 정도의 거리를 둔 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대낮에 머리 위로 ‘재앙’을 맞닥뜨린 도시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침묵에 빠져있었다.
“자네는 저 아래의 양민들과 그 터전들을 지키고 싶은 게지?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허나… 모든 걸 상처 하나 없이 지킬 수는 없는 법이네.”
“……!”
“심지어 하나하나 조건을 따지고 있다가는 그사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지. 놈들에게 ‘경우’ 같은 게 있는 것 같나?”
목소리는 퍽 진중해졌다.
“자네가 망설이는 순간, 놈들은 그걸 이용해올 걸세. 설령 조금은 다치더라도, 죽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야.”
그것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교훈을 내리는 듯한 말투였다.
동시에 이벽으로선 반발심이 들었으나, 최소한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노인장의 말은 잘 알겠소.”
이내 이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여전히 믿을 수는 없소.”
“클클! 물론 이해하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한들 넙죽 믿어버리는 것도 그닥 머리가 좋은 치는 아니지!”
훅.
그때, 두 사람의 주변을 감싼 구름이 흩어졌다. 그리고 구름들은 다시 정룡의 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만 비켜드리겠네! 시간이 지나고 진상이 드러나면 우리는 결국 같은 편이 될 터인즉… 서로를 이 이상 다치게 할 이유가 없지.”
“…….”
이벽은 잠시 정룡을 바라보았다.
“…어째 하시는 말과는 달리 아직도 뭔가 ‘용건’이 더 남아있는 것 같소만.”
그저 이벽의 주변에서 거둬들였을 뿐, 구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정룡의 몸 주위에 몰려있었다.
즉, 힘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클클클, 신경 쓰지 말고 갈 길 가시게나. 그야 용건은 남아있지만 그게 자네는 아니라네!”
“…….”
불현듯.
다시 긴장감이 차올랐다.
“좌우간 뭐가 됐건 간에… 마교와 붙어먹은 것들은 그냥 보내줄 수가 없단 말이지. 의혈맹이건, 권왕이건, 혹은 그 부하 노릇이나 하는 떨거지들이건 말일세.”
슥.
정룡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부서진 마차 밖으로 걸어 나와 멍한 얼굴로 이벽과 정룡을 올려다보는 ‘의혈맹의 무인’이 서 있었다.
“저 계집이 독왕의 혈육인가?”
정룡이 말했다.
후욱.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몸을 둘러싼 구름 속에서 다시 ‘용의 머리’가 자라났다.
“…당 소저! 달아나시오!”
이벽이 다급히 외쳤다.
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룡의 신형이 아래로 꺼졌다. 용의 머리가 당려옥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후욱.
이벽 또한 다시 내력을 일으켰다. 허공에서 쾌의 묘리를 펼친 이벽의 몸이 제비처럼 쏘아지며 정룡을 추격했다.
쐐애액.
이내 순식간에 정룡을 따라잡았다. 그 이상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이벽은 검을 내뻗었다. 허나.
후욱.
“자네에겐 더 이상 용건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클클클!”
“……!”
정룡의 몸은 휘어지고, 흩어졌다.
이벽 역시 곡의 묘리로써 검을 펼쳤으나, 이미 구름과 한 몸이 된 정룡은 그 모든 휘어짐을 예측하며 허깨비처럼 흩어졌다.
후욱.
그리고 다음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정룡의 몸은 다시 저만치로 멀어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