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61)
267화. 은원의 덫 (5)
그것은 오 년 전.
이벽이 흑천방과 혈교 세력에 의해 점거된 사패련을 되찾고자 ‘수라의 길’을 걷던 때의 일이었다.
흑천방을 따르던 칠독문의 무인들은 어느 산골 마을의 양민들을 미끼로 삼아 이벽을 손에 넣으려 했고.
그 대가로 이벽은 칠독문을 무너뜨렸으며, 칠독문주 모간을 비롯한 무인들을 말 그대로 ‘몰살’시켰다.
그리고 그날 이후.
칠독문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
다만 이벽은 문내에 있던 모든 식솔들의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칠독문의 식솔들 중에는 어미의 품에 안긴 채 이벽을 향해 원독을 드러냈던 ‘칠독문주의 어린 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세월 속에서 증오를 간직한 채 여인으로 자라났으며, 지금 이 순간 모가장주 모란이 되어 이벽의 눈앞에서 당려옥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유감이네요.”
이내 모란이 말했다.
“…뭐가 말이오?”
“다시 만날 때에는 반드시 산 채로 사지를 찢어서… 내 아버지와 같은 모양의 절망을 맛보여주려 했는데 말이에요.”
“…….”
“지난 수년간 당신이 다시 무림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준비가 많이 미흡했던 모양이에요.”
“그러게 말이오, 장주. 이거야 원, 솔직히 조금 전에는 복수는커녕 여기서 꼼짝없이 뼈를 묻게 되는 줄 알았지 뭐요?”
스스로를 종인욱이라 소개한 사내가 말을 받았다. 어느덧 혈기를 가라앉힌 남궁천수 역시 모란의 좌측으로 다가와 있었다.
“…….”
칠독문의 모란.
귀혼파의 종인욱.
숭무관의 남궁천수.
이벽은 ‘옛 원한’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최소 한 번씩, 자신이 직접 살려주었거나 혹은 스스로 살아남았던 이들이었다.
“…뭐, 그래도 아직 하늘이 저를 버리진 않은 모양이지만요. 듣자 하니 여기 당가의 당려옥 소저께서 당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소중한 인질이라면서요?”
“…그게 무슨 말이오?”
“시치미 뗄 생각은 말아요. 얘기는 다 들었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우릴 죽이지 못하고 있는 것 자체가 명확한 증거 아니겠어요?”
“…….”
일순 이벽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모란이 뭔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 이내 당려옥이 그녀를 ‘속여넘겼음’을 직감했다.
훅, 이벽이 당려옥과 눈을 마주했다. 허나 당려옥은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당려옥은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눈빛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암기 하나 지니지 못한 지금의 그녀가 무얼 할 수 있는지, 또는 정연화는 어디에 있는지 이벽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거요?”
이내 이벽이 다시 모란을 향했다.
“어쩌긴 어쩌겠어요? 패배를 인정할 테니… 이대로 이곳을 떠나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이겠어요.”
“내가 왜 그래야 하오? 지금 당신들을 살려준다고 해도 어차피 다시 나를 노릴 생각이지 않소?”
“그럼요. 물론이죠.”
모란은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그러니 인질을 잡고 있잖아요?”
“…인질이라.”
이벽은 모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겠소? 당신들 따위가 감히… 내 눈앞에서 내 일행을 해칠 수 있겠소?”
다음 순간.
훅, 이벽은 기세를 내뿜었다.
별다른 상승의 경지를 일으킬 필요도 없이, 그저 내력을 발산하는 것만으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모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철컥, 모란과 함께 나타났던 흑의인이 황급히 비수를 꺼내 들며 앞을 가로막았다. 허나 이벽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소?”
“…….”
파르르, 모란의 눈가가 떨렸다. 허나 다음 순간 모란의 입가에는 오히려 미소가 피었다.
“…천만에요. 비룡대주, 제가 죽음 따윌 두려워해서 이러고 있는 것 같나요?”
“그렇지 않소?”
“아뇨, 나는… 우리들은 오직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온 목숨들이에요. 그러니 목숨을 구걸하느니 이대로 죽는 쪽이 천 배는 나아요. 하지만 물론, 죽어야만 한다면 혼자서 죽을 순 없죠.”
철컥, 당려옥의 목에 대어진 모란의 비수가 더욱 조여들었다.
“이 여자를 죽인다면… 당신은 당가의 분노를 살 테고, 결국은 해독 따윈 꿈도 못 꾸고 말라 죽게 되겠죠? 그 모습을 내 눈으로 살아서 볼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요.”
“…….”
이벽은 잠시 침묵했다. 모란의 표독스러운 얼굴에서 그녀의 말이 허세 따위가 아님을 이해했다.
또한 동시에 당려옥이 ‘어떤 거짓말’로 모란을 속여넘겼는지, 대강은 알 것만 같았다.
허나 ‘어째서’ 그런 짓을 했으며,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소협.”
허나 그때였다.
불현듯 당려옥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붙잡혀버렸어요.”
“…보면 아오.”
“뭐, 원래도 인질 신세였지만 또다시 인질이 되어버렸네요. 심지어 알몸을 보여버렸으니 진짜로 시집도 못 가겠네~”
“지금 농담이 나오시오?”
“그러게요.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반쯤은 일부러 이렇게 한 건데… 잘 싸우고 있던 거 괜히 방해가 된 건 아니죠?”
“…그렇군.”
불현듯 이벽은 이해했다.
어쨌거나 모란과 당려옥의 등장으로 인해 싸움은 멎었고, 덕분에 양민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즉, 달리 말하자면.
위험을 ‘자신에게로’ 옮긴 것이다. 허나 물론, 당면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헌데 막상 ‘최후의 수단’을 행동으로 옮기려니까… 쫌 무서워서 그래요~”
그리고 다시 당려옥이 말했다.
그 순간 이벽은 불안감을 느꼈다. 허나 자세한 의미를 생각해볼 틈도 없이,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뭐… 협행이란 게 원래 목숨 걸고 하는 거니까요. 소협, 제가 벌 수 있는 시간은 딱 한순간뿐이에요. 하지만 소협이라면 그걸로 충분하죠? 그쵸?”
철컥.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누가 멋대로 지껄여도 좋다고 했나요?!”
그때, 모란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비수의 끝이 당려옥의 목을 파고들었다.
주륵, 핏방울이 당려옥의 흰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허나 당려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 모란 소저. 죄송해요. 사실 아까 했던 말은 거의 다 뻥이구요. 그냥 불쌍한 양민들 목숨 좀 구해보려고… 대충 꾸며낸 거예요.”
“그, 그게 무슨……!”
“소협, 내가 쓰러지고 나면요. 우측 벽 너머 어딘가에 정 소저가 갇혀있는 방이 있거든요? 어떻게든 빨리 구해주세요. 그러면… 아마도 정 소저가 저를 구해줄 거예요.”
생긋.
당려옥이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
그 순간.
이벽은 비로소 당려옥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허나 이벽이 채 할 말을 떠올릴 새도 없이, 그녀는 입 안에서 ‘무언가’를 씹어버렸다.
콰득.
“퉷.”
그리고 ‘시커먼 침’을 뱉었다.
치이익.
당려옥이 뱉은 침이 비수를 쥔 모란의 손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피부가 시커멓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헉!”
모란이 호흡을 삼켰다.
* * *
‘이, 이게 무슨……!’
모란의 눈이 흔들렸다.
당려옥이 입안에 숨기고 있던 독단을 깨물었다.
물론, 그녀 역시 독문의 여식으로서 입안에 숨긴 자결용 독단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당려옥이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상대에게 작은 생채기를 내는 것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아, 아니 어떻게?’
허나.
그 생채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주 짧은 판단의 공백을 일으켰다.
이대로 당려옥의 목을 그어야 할지, 한순간의 망설임이 일었고.
후욱.
그것은 이벽에게 ‘일보’를 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다음 순간, 이벽의 신형이 잔상을 남긴 채 사라졌다.
타앙.
이벽은 쾌보를 펼쳤다.
마음의 발현과 동시에 이미 발밑에 자리한 나뭇잎을 밟으며 몸이 쏘아졌다. 동시에 이벽은 망설임 없이 검을 내뻗었다.
후우욱.
그것은 일찍이 서천무존 정룡조차 쉬이 따라잡지 못한 쾌의 경지였으며, 또한 청성제일검 공능자와도 맞섰던 쾌검이었다.
서걱, 푸욱.
허나 다음 순간.
모란을 노리고 쏘아진 이벽의 검이 다른 인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를 보호하듯 가로막고 서 있던 흑의인이었다.
“……!”
사내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허나 이벽은 개의치 않았다. 목천의 힘으로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당려옥이 벌어준 ‘한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로 흑의인의 가슴을 관통한 채, 이벽은 전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모란의 지척까지 이른 순간, 검을 그어 올렸다.
서걱. 촤아앗.
파육음이 울렸다.
흑의인의 몸이 좌우로 갈라졌다.
“…어? 가가?”
모란이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녀의 신체 역시 균열을 일으켰다.
툭. 탱그랑.
비수를 쥐고 있던 모란의 오른팔이 땅에 떨어졌다.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베어진 것이었다.
“아아…. 아아아악—!!”
이내 비명과 함께 모란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제 몸으로 모란을 보호하고자 했던 흑의인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훅. 덥석.
이벽은 당려옥을 회수했다.
왼팔로 그녀의 몸을 안았다.
“이, 이게 무슨……?!”
그 순간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훅, 이벽의 시선이 우측으로 꺾여 들었다. 경악한 얼굴의 종인욱과 마주쳤다.
푸욱.
“꺼억… 그르륵!”
그 즉시 이벽은 검을 던졌다. 망설임도 없이 던져진 검은 정확히 종인욱의 목을 파고들었다.
서걱, 툭.
이내 목을 떨어뜨렸다.
툭, 찰그랑.
몸이 무너지며, 채 꺼내지 못한 방울이 품 바깥으로 굴러 나와 땅을 뒹굴었다.
그렇게 이벽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성가신’ 상대인 술사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타다닷.
파슈슈슈슉.
“이, 이런 등신 같은! 멍청한 계집년이… 제멋대로 일을 모조리 망치다니! 이게 무슨—”
그때였다.
좌측에서 강기가 날아들었다. 남궁천수가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창궁무애검법을 펼친 것이다.
허나 그저 달아날 틈을 벌기 위해 급하게 펼쳐진 초식의 위력은 그다지 보잘 것이 없었다.
푹, 푸욱.
깃털 모양을 한 강기는 이벽의 몸을 두른 나뭇잎에 막혔다. 그리고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크, 크하핫! 좋다 이놈! 이렇게 되된 이상 잔재주 따윈 필요 없다! 어디 한 번 계속해서—”
저만치에서 남궁천수가 외쳤다.
허나 이벽으로선 더는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고로.
후욱, 퍼어어억.
“…커어억!”
다음 순간, 이벽의 검신이 남궁천수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종인욱의 목을 궤뚫은 검이 그대로 공간을 선회하여 남궁천수의 등 뒤를 파고든 것이다.
이기어검의 기예였다.
퍼억.
“큭… 커어억!”
그대로 추락한 남궁천수가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리고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순—”
“…….”
이벽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만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퍼어억.
그러자 남궁천수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던 검이 이벽의 의지에 의해 그대로 상체와 머리를 양단(兩斷)하며 빠져나왔다.
덥석.
검이 이벽의 손으로 회수되었다.
물론, 남궁천수의 숨은 끊어졌다. 한 마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허망한 최후였다.
애당초 양민들이 인질로 붙잡혀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토록 손쉬운 상대였다.
그리고 그런 난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은… 물론 당려옥이었다.
“…쿨럭!”
그때, 당려옥이 피를 토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안색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있었으며, 의식마저 잃은 듯했다.
자결을 위해 준비된 독을 삼킨 이상 당연한 것이다. 허나 물론, 절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우측.’
이벽은 당려옥의 말을 떠올렸다.
우측 벽 너머 어딘가에 정연화가 갇혀있는 방이 있으며, 그녀라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영문은 알 수 없다. 다만.
지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훅, 쐐애애애액.
판단이 선 순간, 이벽은 다시금 검을 날렸다. 이기어검이 쏜살같이 뻗어나가며 우측으로 향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이내 벽과 충돌했다.
거대한 충격이 공간을 흔들었다.
후두둑, 후둑.
“……!”
허나 다음 순간 이벽은 당황했다.
무려 이기어검을 날렸음에도 벽에 구멍을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표면이 조금 무너져내렸을 뿐, 벽 안쪽에는 기이할 정도로 단단한 금속이 덧대어져 있는 듯했다.
탓, 후욱.
이벽은 당려옥을 안은 채 그대로 뛰쳐올랐다. 돌아오는 검을 낚아챈 뒤, 창공비검을 펼치려 했다.
철컥, 끼이익.
허나 그때였다.
그 순간 벽 한켠에서 저절로 틈새가 벌어졌다. 충격에 의해 감춰져 있던 문이 열린 것이었다.
“허억… 헉!”
그리고 다음 순간.
인영 하나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친 기색의 정연화였다. 그녀의 시선이 아수라장이 된 장내의 풍경을 빠르게 훑었다.
“이쪽이오, 소저!”
이벽이 외쳤다.
탓,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정연화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흠칫, 놀란 정연화가 몸을 떨었다.
허나 다음 순간, 이벽에게 안긴 당려옥을 확인함과 동시에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 이건 대체……?”
“당 소저가 독단을 삼켰소.”
“왜, 왜 그런 미련한 짓을……!”
“…소저, 침착하시오. 당 소저가 말하기를 소저가 ‘자신을 살려줄 거라’ 말했소. 뭔가 짚이는 게 없소?”
“……?!”
부르르, 정연화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크게 치켜 떠졌다.
“퉷!”
다음 순간, 정연화가 손바닥 위로 무언가를 뱉어내었다.
그것은 앞서 두 사람이 납치되기 이전 당려옥이 그녀에게 주었던 당가의 해독약, 만해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