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291)
297화. 억측
이후.
이벽과 철면개, 혜공선사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하오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인력과 상황이 갖춰지는 대로 이벽은 ‘흑시의 추적’에 나설 것을 당부했다.
“놈들은… 필시 아직까지도 이 근방에서 양민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을 터요.”
“…….”
이벽은 모란과 남궁천수 등을 베었던 일을 떠올렸다.
놈들의 꼬리를 짚고 올라가다 보면… 그 또한 의혈맹과 연결되어 있을 공산이 컸다.
“…쿨럭!”
돌연 철면개가 기침을 했다.
피를 토하지는 않았으나, 결코 내상이 가볍지 않음은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해야 할 이야기는 대강 마친 것 같군. 걸개, 이만 들어가 쉬겠소?”
“아니, 괜찮소 대주. 나는―”
“시주의 말이 맞소, 방주. 지금은 무엇보다 걸개께서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소?”
혜공이 이벽을 거들었다.
후우, 철면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창백한 안색을 미처 숨기지는 못했다.
기실 남궁천승과의 일전에서 철면개가 입은 내상은 족히 몇 달은 꼬박 정양해야 할 만큼 위중한 상태였다.
다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을 뿐이다.
끼익.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이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선사님.”
이내 철면개가 일어섰다. 혜공에게 고개를 숙인 뒤, 시선을 돌려 이벽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소협.”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 개방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소. 악적들을 피해 본거지를 버리고 달아나… 놈들이 민초들을 상대로 활개를 치게 만들었소.”
꾸욱.
철면개의 주먹이 흔들렸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오. 내 그럭저럭 성취를 이뤘노라 생각했소만… 막상 일이 닥치자 스승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아랫놈들을 지키기에도 여전히 턱도 없는 수준이군 그래.”
“…….”
“허나 이 몸이 아직 늙지는 않았으니… 그대에게 마냥 모든 짐을 맡겨두지는 않을 것이오. 또한 입은 은혜를 잊지도 않을 거요.”
“…내게 개방에게서 돌려받을 은혜 같은 건 없소.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이미 선대의 방주께 모두 받았소.”
이벽은 철면개를 바라보았다.
계기가 있으면 무인은 강해진다.
두 절대자가 무너지고 구 무림맹이 나날이 위축되는 과정에서 신임방주로서 그가 겪었을 지난 오 년은.
결코 순탄했을 리 없다.
허나 그러한 와중에도.
이끌어주는 스승조차 없이.
철면개는 목천의 벽을 넘어섰다.
이벽은 그 굳은 눈빛에서 다시금 취풍신개의 흔적을 발견했다. 고로 해줄 수 있는 조언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주가 아닌 무인으로서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할 시간일 터였다.
“믿고 있겠소.”
“…허헛.”
철면개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내 철면개가 승방을 나섰다.
“그래, 시주께선… 날이 밝는 대로 곧장 사천을 향해 떠날 생각이시오?”
이후, 혜공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벽은 검존을 비롯한 정도맹의 절대자들이 황보세가를 치는 것보다 한발 앞서 움직여야 했다.
고로 시간을 허비할 여유는 없다.
“아미타불. 무운을 비오, 시주. 독왕은… 마교의 침공에 함께 맞서 싸우던 그 옛날에는 분명 나의 동료였소만. 아마도 더는 그렇지는 않을 것 같구려.”
혜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
그리고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그것은 이대로 소림을 떠나기 전, 혜공선사에게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은.
확실히 증명된 사실이라 할 수는 없었으며, 다만 이벽 혼자만의 심증에 불과했다.
고로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나.
남궁세가와의 일전이 있기 전.
혜공선사는 이벽에게 마교와 혈교, 의혈맹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으며.
―오십여 년 전, 정사연합이 마교를 무찌른 그 순간부터… 놈들의 씨앗은 이미 정파 내부에 심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소.
또한 그런 말을 했었다.
고로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이야기는… 노승 역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일 지도 모른다.
“선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오?”
혜공 역시 이벽에게 달리 할 말이 남아있음을 눈치챈 듯, 태연한 미소로 말을 받았다.
이내 이벽은.
검치 선우명이 남겨두었던 진법 속에서 만난 마교의 우호법, 풍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풍마와 권왕 황보혁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 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
노승의 흰 눈썹이 흔들렸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렇구려.”
“물론… 한낱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그저 선조가 남긴 환영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억측이라. 허헛!”
노승이 수염을 쓸었다.
만일 황보혁의 정체가.
단순히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공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풍마의 혈족’이라면.
말 그대로 그는.
‘마교의 씨앗’인 셈이 되며.
결국, 자신들이 의혈맹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지라도…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만일 소협의 억측대로.”
그리고 다시 혜공이 말했다.
‘복잡함’을 말로써 풀어내었다.
“권왕 그자가 정말로 ‘심어진’ 씨앗이라면… 물론 그 씨앗을 황보세가에 ‘심은 자’도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그렇지 않소?”
“…….”
* * *
권왕 황보혁은.
물론 의혈맹주이다. 허나.
어쩌면… 흑천방주 맹철극이 한낱 혈마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듯 권왕 역시 ‘그 뒤에 있는 세력’의 진정한 우두머리는 아닐 수도 있으며.
또한 이미 오십여 년 전, 황보혁을 황보세가에 심어 넣었던 누군가가 어둠 속에 존재한다면.
당금에 이르러 그 어둠 속의 뿌리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게 뻗어있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다시는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새벽의 어둠이 소리 없이 실내로 스며들었다.
분명 자신이 먼저 꺼낸 이야기였으나, 이벽은 마땅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신개와 천존이 쓰러진 이래, 줄곧 마교와 혈교의 조사에 몰두해왔던 노승의 이어질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리고 마침내.
혜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 또한… 시주에게 내 ‘억측’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소. 일전에는 분명하지도 않은 일로 공연히 시주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염려하여 말하지 않았소만.”
“…어떤 말씀이십니까?”
“과거, 마교가 혈교 세력을 흡수했고, 그로 인해 당금의 혈마 역시 마교에 속해있으리라는 얘기를 드렸지 않소?”
“……!”
이벽의 눈이 흔들렸다.
혈마는 스승 이진천의 원수이자, 이벽이 무림으로 나온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허나 그자는.
스승 이진천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건져 달아난 이래, 종적은커녕 단 한 번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오문주도, 개방주도.
그 단서조차 알지 못했다.
“헌데 사실은 말이오. 애당초 과거 마교와 혈교가 하나로 합쳐졌던 것도… 생각해 보면 퍽 이상한 일이란 말이지.”
“…그게 무슨?”
“그야… 우리가 보기에는 양쪽 다 똑같이 천하만민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사교집단일 뿐이지만… 그들 스스로에겐 전혀 그렇지가 않단 말이오.”
혜공의 목소리가 사뭇 달라졌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마교는 ‘힘을 숭배하는 집단’이고, 혈교는 ‘혈마를 왕으로 따르는’ 집단이 아니오?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이… 어찌 하나로 섞일 수가 있겠소?”
“……!”
“그것은 마치… 한평생 불경만 읽은 이 늙은이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이제라도 무당에 들어가 도를 닦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거요.”
그것은 과연.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뿌리부터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광인들이 전쟁을 시작한다면, 항복이나 흡수보다는 어느 한쪽이 아예 절멸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리고 실제로.
마교에 비해 세가 약했던 과거의 혈교는 절멸의 위기에 처했고, 이내 혈마는 스스로를 ‘두 명으로 갈라’ 생존을 도모했다.
생각과 마음을 쪼개어.
두 명의 몸으로 전이시킨다.
혈마가 그러한 사술을 지니고 있으며,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몸 갈아타기’를 반복해왔다는 것은 이미 혜공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물며 혈교도들은 자신이 모시는 ‘명왕’이 누군가의 밑에 종속되는 걸 참고 있을 이들이 아니오. 차라리 ‘순교’를 택하는 편이 그들의 교리에는 훨씬 더 걸맞은 일이지.”
“…그야 그렇겠지요.”
“헌데… 그런 일이 일어났소.”
둘로 갈라진 혈마 중 하나는 사파무림에 암약하여 오 년 전, 녹림과 흑천방의 탈을 쓴 채 사패련을 삼키려 했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함께 고스란히 마교에 흡수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
그것은 따지고 보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이벽은 ‘백 년 전의 이상한 일’이 지금에 와서 뜻하는 바를 섣불리 이해할 수 없었다.
“천마.”
“……!”
허나 그때.
혜공은 돌연 다른 이름을 꺼냈다.
“그것은 물론… 마교의 교주를 가리키는 말이오. 오로지 힘을 숭배하는 마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에게 허락되는 이름이지.”
마교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호무림 내에서도 어느 누구보다 가장 힘을 숭배하는 집단이며.
그렇기에 ‘마공’을 익힌다.
마공이란, 경지가 깊어질수록 수련자의 힘에 대한 집착을 극대화하고 인간성을 지워버리며.
급기야 힘을 위해서라면 처자식은 물론, 스스로의 영혼마저 서슴없이 팔아치우는 ‘마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마란.
그 ‘정점에 선 이’였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소.”
마침내 혜공은.
‘억측’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마교와의 세력다툼에서 패색이 짙어진 혈교는 궁지에 몰렸고, 이내 혈마는 ‘언제나 그래왔듯’ 스스로를 둘로 갈라놓았다.
그렇게.
한쪽이 마교와의 불사항전을 펼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다른 한쪽은 도주를 택했다.
헌데.
불사항전을 택한 혈마는 돌연 죽음이 아닌 항복을 했고, 그를 따르던 혈교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섞일 수 없는 것이.
한 데 섞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천마와 혈마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오.”
“……!”
백 년 전의 두 마두는.
서로 충돌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천마와 혈마는 서로의 힘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내 천마는 불현듯 ‘혈마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오히려 ‘혈마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대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벽이 물었다.
허나 그 시점에서 이벽은 이미 혜공의 ‘억측’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컨대 혈마에게 ‘몸을 갈아타는 능력’이 있다는 걸 천마가 알게 되었다면… 과연 천마가 어떻게 반응을 했을 것 같소?”
마인이란.
힘을 위해 기꺼이 제 영혼마저 팔아버릴 수 있는 이들이며, 천마는 다시 그들 중에서도 정점에 선 존재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천마에게 있어, 혈마는 마치 ‘먹음직스러운 영약’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혈마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터럭만큼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천마라는 존재는 기꺼이 자기 자신의 몸을 ‘그릇’으로 혈마에게 제공하려 했을 것이오.”
“…….”
그리고 이어지는 혜공의 말은.
이벽의 짐작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혈마의 입장에선… 가히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육신과 그에 딸려오는 휘하세력들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
천마의 육신에.
혈마가 깃든다.
강해지고자 하는 이와 영원히 살고자 하는 두 마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순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무엇보다… 각자의 숭배대상이 ‘하나로 합쳐지면’, 그 둘을 따르던 세력 또한 하나로 합쳐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겠소?”
허헛, 혜공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서로 다른 교리를 따르는 두 개의 사교집단은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말이오.”
그리고 긴 이야기를 돌아.
혜공의 억측은 결론에 이르렀다.
“시주의 스승을 해했다던 또 한 명의 혈마야말로… 작금의 의혈맹 뒤에 숨어있는 ‘혈마임과 동시에 천마’인 존재일 지도 모르는 일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