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02)
310화. 꽃 그림자
매화가 만개한 들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인영의 모습은 퍽 낯이 익었다.
보이는 것은 옆모습뿐이었으나, 이벽은 물론 그 정체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보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스승님!’
낙검문주 이진천이었다.
이벽은 잠시 넋을 잃었다.
불과 조금 전, 당평세의 암기가 불러온 과거의 기억 속에서 이벽은 극한의 일검을 토해낸 이후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거두는 스승의 모습을 다시금 지켜봐야만 했다.
허나.
매화가 흩날리는 가운데 낚싯대를 기울이는 스승의 모습에서는 어둠이나 무게 따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내 이벽은 이해했다.
이 풍경은… 화영지정의 곡조에 담겨있던 월향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그녀가 어린 소녀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이진천에게는.
명징한 젊음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은공. 소녀가 감히… 모자란 솜씨로 은공의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때 월향이 말했다.
작은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아… 웃어서 죄송하오, 소저. 이것 참, 그러려던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만… 쩝.”
이진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피리를 불던 월향은 그만 실수로 가락을 틀리고 말았고, 그 순간 이진천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 어찌 되었건 참으로 듣기 좋은 가락이었소. 물론 음률에 대해서는 딱히 조예가 없소만… 곡의 이름이 무엇이오?”
“…이름 같은 건 없답니다. 그냥 소녀가 멋대로 불어보았을 뿐인걸요.”
월향이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허나 그 순간, 이벽은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이해했다.
이것은 월향의 과거임과 동시에 이벽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던 기억이기도 했다.
때문에 마치 서책을 읽듯, 그녀의 속마음이 이벽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화영지정(花影之情).
꽃 그림자의 마음.
곡조의 이름은 이미 가락을 짓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대단하시구려. 적당히 분 게 이 정도 수준이란 말이지. 소저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능을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 같소.”
“…아녜요. 미숙하기 짝이 없는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은공께 피리를 불 줄 안다고 말하지 말 걸 그랬어요.”
“결코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괜찮으면 다시 한번 들려주시겠소?”
움찔.
월향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하하,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은공께선 무리해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공연히 저 같은 걸 위해―”
“아니, 정말로 그런 게 아니오.”
험, 이진천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퍽 진지한 얼굴을 했다.
“실은 소저의 연주를 듣고 있자니 뭔가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는데… 아슬아슬한 순간 끊겨버렸단 말이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 뭐요?”
“…….”
“게다가… 좀 미숙하면 어떻소? 어차피 내 스승님 앞에서는 나 역시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인 건 마찬가지요.”
“…그렇게 강한데도요?”
“천하무림에 강자 같은 건 모래알만큼 많이 있소. 그야 소저께는 이놈이 퍽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그것은 무림의 이야기였다.
허나 동시에 그것은 어린 기녀에게 있어 마치 별천지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또한 나는 피리 같은 건 전혀 불 줄도 들을 줄도 모르니… 소저의 솜씨는 지금의 내 귀에는 이미 천하제일의 악공의 그것이나 다름이 없소.”
“…….”
월향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월향의 마음이 계속해서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그녀가 이진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졌다.
허나 그것은.
보아선 안 될 타인의 마음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흘러오는 마음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휘이이이.
이내 월향은 다시 죽적에 입을 대었다. 그리고 투명한 음색이 매화꽃과 함께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그리고 익숙한 곡조 속에서.
월향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계속해서 이벽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도박 빚에 팔린 어린 기녀였고, 뒷골목의 어둠에 삼켜져 다시는 빛이 있는 곳으로 나올 수 없게 된 신세였다.
허나.
근처를 지나가던 ‘협객’은 우연히 목도한 어둠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우연히 구원받았다.
“…….”
그 기억 속에서.
이벽은 서서히 이해했다.
과거, 소녀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왔던 월향은 거짓된 사연을 꾸며내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먼 옛날의 자신’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짝.
“그렇군. 이제 알겠소.”
그때였다.
돌연 이진천이 손바닥을 쳤다.
고개를 돌려 월향을 바라보았다.
“소저께서는… 가락 속에 흩날리는 매화를 담아두려 했군. 어쩐지 퍽 친숙하게 느껴진다 했소.”
“……!”
월향의 표정이 흔들렸다.
“어때, 내 말이 틀리오?”
이진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틀리지 않아요. 설마 은공께서 그런 것까지 알아주실 줄은… 정말로 생각도 못 했네요.”
월향이 마주 웃었다.
조금은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소? 소저는 분명 마음을 움직이는 하늘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이오. 물론, 그만큼의 피나는 노력 또한 있었겠지.”
“…아하하.”
이진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시 연못을 향했다.
“소저의 강단은 감탄스럽소.”
팔랑.
다음 순간, 이진천의 손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떨어지는 매화 한 송이가 그 위에 얹어졌다.
“매화나무의 뿌리는 어두컴컴한 흙속에 있소. 그 속에서 차가운 겨울을 벼르다가 이윽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지.”
“…….”
“화무십일홍이라고 결국은 그마저도 저물고 말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갈고닦는 것이 태어난 이로서의 본분이 아니겠소?”
이진천이 손을 털어냈다.
팔랑, 매화가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소저처럼 말이오. ‘그러한 처지’ 속에서도 기예를 포기하지 않았던 소저의 기개를 본받고 싶을 정도요.”
“…그야 은공 덕분인걸요. 은공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도 평생 피리 같은 건 두 번 다시―”
“나는 그다지 한 게 없소.”
휙, 첨벙.
이진천이 낚싯대를 휘둘렀다.
연못 위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우연히 지나치다 눈에 들어온 악적들을 해치웠을 뿐… 결국 소저의 그 무엇도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이진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협객이 아니오. 그냥 검 쓰는 것과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천방지축 애송이일 뿐이지.”
“…….”
그리고 대화가 끊어졌다.
침묵 속에서, 월향은 할 말을 찾고자 했다. 허나 자신의 심장 소리가 시끄러워 마땅히 할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다지 살기 좋은 천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소저께서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그 길을 나아가셨으면 좋겠소.”
그리고 결국.
침묵을 깬 것은 다시 그였다.
“…그럼요. 예나 지금이나 저에겐 이것뿐인걸요.”
월향은 웃었다. 죽적을 품속에 거둔 뒤, 이내 조심스레 이진천에게로 다가가 곁에 앉았다.
기실 그녀가 화영지정의 곡조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매화가 아니라 매화 속에 서 있던 검을 든 사내였다.
허나 사내는 알지 못했다.
전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녀는 그리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분에 넘치는 것을 바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월향은 조금 용기를 내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와주세요. 그때는 좀 더 연습해서 좋은 연주를 들려드릴게요.”
“핫, 그야 이를 말이겠소? 다만 날을 기약하진 못하겠군. 이래 봬도 도관에 적을 둔 몸이라… 빠져나오기도 힘들고 기방에 들락거리는 건 더욱 모양새가 안 좋아서 말이오.”
“…아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서서히 해가 저물었다.
“소저, 이걸 드리겠소.”
돌연 이진천이 낚시 바구니를 내밀었다. 월향은 그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고작해야 손가락만 한 피라미 한 마리가 담겨있었다.
“푸훗.”
월향은 웃고 말았다.
허나 곧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죄, 죄송해요, 은공! 제가 어찌―”
“아니오, 솔직히 웃길 만하지. 스승님의 흉내를 내본 건데… 낚시란 게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군.”
이진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조만간 다시 뵐 수 있을 거요. 어쩌면 그땐 내가 모조리 때려치우고 떠돌이 약장수 같은 게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하하…….”
흠, 이진천이 헛기침을 했다.
다시 진지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름이 뭐요?”
“네? 그, 그건 딱히…….”
“곡이 아니라 소저 말이오.”
“……!”
“월향 소저라고 해도… 그것은 무림인으로 따지면 별호 같은 게 아니오? 다시 만나고자 한다면 최소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찾기가 편하겠지. 그렇지 않소?”
“…….”
기녀는 객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허나 사내는 그러한 사정에 대해 그다지 밝지 못한 듯했다.
꾹, 월향은 주먹을 쥐었다.
“…지소약이라고 해요.”
* * *
이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화영지정의 곡조 속에서, 월향이 살아왔던 기억의 편린들이 이벽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짧지만은 않은 세월 속에서 매화가 필 무렵마다 은인은 잊지 않고 다시금 그녀를 만나러 찾아와주었다.
소녀는 여인이 되어갔으며.
하오문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물론, 그 또한 은인과의 인연으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과분한 지위임을 모르지 않았다.
“소저, 강녕하셨소?”
“그럼요 은공. 저야 매일같이 좋은 걸 먹고 피리나 불면서 지내는데 강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겠어요?”
“어떻소, 이번엔 제법 실하지 않소? 낚시란 게 하다 보니까 그럭저럭 재미가 붙더군 그래.”
사내가 낚시 바구니를 내밀었다.
“어머, 시장에서 사 오신 건 아니구요? 매번 무리해서 안 그러셔도 되는 것을.”
“…커험.”
“호홋, 농담이에요. 별로 재미없었나요?”
은인은 도문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리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사내와 여인의 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기예를 갈고닦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루주, 안 좋은 소식이 있네.”
“…네?”
허나 어느 해엔가.
돌연 은인의 허무한 ‘사망 소식’이 하오문에 전해졌고, 한순간 삶의 중심을 잃은 그녀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그때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도록 지탱해주었던 것은 ‘살아있는 이는 자신의 길을 갈고닦아야 한다’던 사내가 남긴 말이었다.
더는 기다릴 이가 없다 해도.
흙 속에 뿌리를 박은 매화나무처럼, 그녀는 다시 일어났고 더는 들려줄 이가 없어진 기예를 계속해서 갈고 닦았다.
또한 하오문도로서 과거의 자신과 같이 어둠 속에 삼켜진 어린 여아들을 찾아 거둬들이는 일에 몰두했다.
화영지정은 슬픔을 품었고.
이내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오, 소저.”
“……!”
그리고.
은인이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몇 해가 지나고 그녀가 하오문 일개 지부의 지부장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허나 다시 만난 사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소저. 나를 좀… 도와주시겠소?”
“…그럼요. 당연하죠. 은공께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디 마음껏 가져다 쓰세요.”
허나 어찌 되었건.
죽었다고 알려진 사내를 다시 만난 그 순간, 그녀의 기예는 다시 의미를 찾았다.
이후.
사내는 하오문도가 되었다.
그렇게 정파무림의 협객이 약장수가 되고, 어린 기녀가 하오문주가 되기까지, 많은 것들이 계속해서 변화했다.
허나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었다.
“…….”
그리고 이벽은 생각했다.
과거, 처음으로 화정촌을 나선 이벽은 사패련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천향루주 지소약에게 스승과의 관계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그녀는.
‘흠모하고 있노라’ 말을 했었다.
허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 말에 담겨있던 세월의 깊이나 무게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벽이 다시금 마을을 떠나 스승의 원수인 혈마의 단서를 찾고자 천향루로 찾아갔을 때.
스스로 하오문주임을 밝히며 이야기를 털어놓던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또한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벽은 화정촌, 스승의 무덤가에 피었던 매화를 생각했다. 꽃잎은 피어나고 아래로 떨어진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매화나무는 변하지 않는 중심을 지키고 서서 매 해마다 흙 속에서 잎을 틔워내고 꽃을 피워낸다.
욱씬.
이벽은 마음의 상처를 느꼈다.
허나 그 슬픈 마음이 스승을 잃은 자신의 것인지, 혹은 사내를 잃은 지소약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구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화영지정은 지소약의 마음이었다.
또한 그녀의 기예는 하늘에 닿아 슬픔을 꽃으로 피우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 마음은 줄곧 이벽의 기억 속에 새겨진 채 힘을 빌려주었다.
우우웅.
그 마음이 이내.
자신의 마음으로 오롯이 연결되었다. 고로 기예 또한 더는 ‘빌려 쓰는 힘’이 아니게 되었다.
허나 이벽은 이진천과 마찬가지로 피리나 음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예도 지니지 못했다.
다만 검을 다룬다. 그렇기에.
화영검무와 마찬가지로, 슬픔 속에 뿌리를 박고 매화를 피워내는 기예는 다시금 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검에.
이벽은 새 이름을 붙였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화영변검(花影變劍).
검의 이름은 그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