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96)
404화. 후일담, 낙검(樂劍) (2)
덜커덩, 덜컹.
마차가 쾌속하게 나아갔다.
조금 전, 달아나듯 정파 무림맹 재건회를 빠져나온 제갈소미와 혁대웅은 창공을 가로지르며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사이로 불쑥 솟구쳐오른 언미희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 두 분! 지금부터 사문으로 가시는 거죠?! 사실 저도 인근의 회택에 볼 일이 있거든요! 아래에 마차를 준비해뒀으니… 아무쪼록 제가 운남까지 편안히 모실게요!”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제갈소미는 조금 난처해졌다. 말인즉슨 언미희는 스스로 마부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허나 소림 방장의 직계 제자인 그녀를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것은 물론 모양새가 이상했다.
“…역시 제가 가면 폐가 될까요?”
“…….”
그러나 이내 제갈소미는 힘없이 고개 숙인 언미희의 표정에서 대강의 자초지종을 짐작했다.
피식, 웃음이 스쳤다.
“…아뇨, 폐라니 당치도 않죠. 그러시다면야 아무쪼록 부탁드릴게요.”
“…아, 네! 맡겨주세요!”
그렇게.
두 사람은 졸지에 또 한 명의 절대고수가 모는 마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덜커덩.
“…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불현듯 혁대웅이 말했다.
물론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그것이 이벽과 언미희에 대한 이야기임은 뻔한 일이었다.
“몰라.”
제갈소미가 즉답했다.
“아무튼 이벽은 좀 맞아야 돼.”
“응? 왜?”
“하여튼 나이를 먹어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예전에 수련이 마음고생 시키던 때랑 전혀 나아진 게 없잖아?”
“…아하하.”
“대강 낌새를 보니 본인도 언 소저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도망만 치고 다니는 거야? 진짜 뭐 하는 짓이냐고?”
“아마… 스스로도 자기 생각을 잘 모르는 거 아닐까? 혹은 상대방의 뜻이 어떨지 확신이 안 선다거나, 잘못될 것이 두렵다거나…….”
“쯧, 어떻게 된 게 우리 문파 사내놈들은 하나같이 칼이나 휘두를 줄 알았지…….”
“…아하하.”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찰나의 순간 혁대웅의 얼굴 위로 울상이 스쳤다. 말마따나 그것은 이벽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언미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 혁대웅은 할 말을 꺼낼 일생일대의 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역시… 그만두자.’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허나 그때였다.
“나한테 할 말이란 게 뭔데?”
“…어, 뭐?!”
“조금 전에 네가 그랬잖아.”
부르르, 덜컹.
혁대웅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등에 멘 창대가 마차의 벽을 두드렸다.
“역시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야, 곰탱이.”
제갈소미가 말을 끊었다.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눈치 좀 적당히 보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우리 사이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 거잖아?”
“……!”
그 순간.
혁대웅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 사저가 이미 대강 짐작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문주, 그 인간… 아무 이유도 없이 너랑 나한테 그런 말을 남기고 가진 않았겠지. 그렇지?”
“…….”
그리고 뇌리에 스친 것은.
스승 이진천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부르르, 혁대웅의 몸이 다시금 거칠게 흔들렸다.
―대웅아. 언제까지 그렇게 이름값 덩칫값 못하고 소웅(小熊)처럼 굴고 있을래? 응?
허나 이내.
떨림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혁대웅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알았어, 사저.”
마침내 철벽과 같은 눈빛이.
흔들림 없이 상대를 마주했다.
“나 돌려 말하는 거 잘 못 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그냥 말할게. 사저, 나랑 정혼해줘.”
덜커덩.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
서서히 제갈소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아,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데?”
“처음부터. 내가 문주님과 함께 낙검문에 당도하고 사저와 만난 뒤, 비무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던 그 첫날밤부터.”
“…근데 왜 그걸 이제 와서야 고백하고 앉았어?”
“하지만… 사저는 옛날부터 문주님을 좋아했잖아. 여러 가지 의미로다가.”
스륵, 빠아악.
그 순간 제갈소미의 왼손에서 비도가 뻗어졌다. 자루가 혁대웅의 몸을 두드렸다.
허나 평소와는 달리, 비도에 맞은 혁대웅의 표정과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스륵.
비도가 다시 회수되었다.
“…죽을래? 네가 뭔데 함부로 내 마음을 지레짐작하는데?”
“그럼 아니었어?”
흠칫.
“…뭐?”
일순 제갈소미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혁대웅이 자신을 추궁해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맞지만.”
“역시 그렇지?”
훗, 미소가 스쳤다.
이진천은 세 사람의 스승이었다. 허나 그보다 앞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무림초출의 어린 소녀가 생명의 은인이었던 젊은 사내에게 그러한 마음을 품은 시절이 있었다 해도.
물론, 이상할 것은 없었다.
스윽.
“에효, 문파 꼴 잘~ 돌아간다.”
제갈소미가 팔짱을 꼈다.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창가를 향했다.
“그래서 대답은?”
허나 다시 혁대웅이 말했다.
“…….”
“부탁이니 확실히 해줘, 사저.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돼. 끝끝내 안된다면… 나도 내 갈 길 찾아야지.”
“…이게 진짜.”
휙, 결국 제갈소미는 다시 혁대웅을 향했다. 반사적으로 다시금 비도를 던지려 했다.
허나.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비도는 소매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도로 들어가 버렸다.
사제 혁대웅은.
사패련의 차기 련주이자 젊은 절대자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 각지에서 혼담이 벌떼처럼 밀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아.”
그 순간 불현듯.
제갈소미는 짜증이 났다.
사파무림의 고혹적이고 도발적인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혁대웅을 상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너… 정말로 날 여인으로서 좋아하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성격은 더럽지, 맨날 때리고 타박하기나 했지.”
핫, 그러자 혁대웅이 웃었다.
“사저, 내가 어느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런 건 타박이 아니라 애정 표현이라고 하는 거야.”
“…….”
“그리고 맨날 밥도 해줬잖아. 최근 간만에 사패련 밥을 먹었더니… 이젠 너무 느끼해서 못 먹겠더라니까?”
“…단순한 자식.”
하아, 제갈소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파와 사파의 입장 차이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어떻건, 차후 다시금 정사무림간에 갈등이 벌어진다면 자신과 혁대웅의 입장은―
“…훗.”
아니, 그러나.
다음 순간, 제갈소미는 벌써부터 그런 것을 고민하기 시작한 자기 자신이 퍽 우스워졌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뭐가?”
“곰탱이. 아니… 혁대웅.”
“응, 사저.”
“네 말대로 시간이 필요해.”
“…그래?”
끄덕, 제갈소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선이 서서히 아래를 향했다.
“그러니까… 일단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오래는 안 걸릴 거야. 부탁할게.”
“…알았어. 사저의 부탁이라면야.”
아하하, 혁대웅이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화가 멎었다.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고, 태연하게 웃던 혁대웅의 표정이 서서히 기괴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덜덜덜덜덜덜.
“내, 내가 지, 지금, 무, 무슨―”
“…그만해. 정신 사나우니까.”
“아, 알았어. 어어어…….”
이후로도 한동안.
혁대웅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가부좌를 튼 뒤,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나서야 간신히 흔들림이 멎었다.
* * *
운남, 서산.
이벽은 봉긋하게 솟은 묘를 바라보았다. 선우협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주기 위해, 이벽은 서둘러 무림맹 재건회를 떠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의 ‘선우벽’이 숨을 거두었던 곳이자 선우세가와도 그리 멀지 않은 이곳 서산의 기슭에 묘를 만들어주었다.
“…….”
시간은 퍽 쏜살같았다.
허나 물론, 기억은 생생했다.
후욱, 퍼어어어어억.
검이 등줄기를 파고든 순간.
섬뜩하되 낯설지 않은 고통이 이벽을 파고들었다. 무아지경이 깨어지고 의식이 돌아왔으며.
몇 마디의 목소리를 통해, 이벽은 등 뒤에 선 검의 주인이 다름 아닌 선우협임을 깨달았다.
허나 귀에 닿은 목소리는.
시시각각 흐려지고 있었다.
퍼석.
그리고 마침내.
이벽의 단전을 그릇 삼아 육신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천마의 씨앗이 두 쪽으로 갈라진 순간이었다.
후우욱, 사라라락.
이벽의 주변을 휘감고 있던 나뭇잎의 영역이 최후의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스륵.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선우협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검을 놔버린 육신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핫, 혹여 실수하여 죽여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군요. 억세게 운이 좋으십니다, 형님.
―……!
이벽 또한 즉시 아래를 향했다. 어떻게든 손을 뻗어 추락하는 선우협을 붙들려 했다.
허나 단전을 꿰뚫린 채 간신히 통제권을 되찾은 육신으로는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눈이 마주친 순간, 회광반조의 빛이 스치는 안색을 통해 이미 선우협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직감했다.
청강유엽공의 기예로 말미암아, 선우협은 이벽의 무아지경이 그려낸 영역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허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재회와 갑작스런 죽음 앞에 이벽은 마땅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덥석.
다만 지면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그 몸을 낚아채는 데에 성공했고 피로 물든 육신을 안아 들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저는 기쁩니다. 드디어… 세가의 숙원이 이뤄진 날이 아닙니까?
―…협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벽의 입에서는 아우를 부르던 ‘옛 호칭’이 흘러나갔다. 그 순간, 선우협의 입가가 만족스런 웃음을 그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사실 저는―
이후.
호흡이 뭉개지며 미처 알아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말 몇 마디와 함께, 선우협은 눈을 감았다.
“…….”
다시 이벽은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선우협은 웃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옛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은 외려 어떤 천 마디의 말보다도 적절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자세한 속사정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과거, 소가주의 자리를 탐내어 선우벽의 등에 칼을 꽂았던 선우협은 다시 이벽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그 결과, 자신은.
천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사형제를 비롯한 동료들 또한 누구도 죽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러한 선우협의 ‘희생’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벽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정리할 수 없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형님의 등 뒤를 지킬 터이니, 형님은 이 세가를 지켜주십시오. 아시겠지요?
다만 이벽은.
어린 날의 선우협을 생각했다.
과거, 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울상을 짓던 아이는 무수한 방황 끝에 제 나름의 기예를 이루었고 ‘천마’의 등을 찔렀다.
욱신.
단전 부근에 고통이 스쳤다.
그것은 그리 날카롭지는 않았다.
허나 두 번씩이나 같은 곳에 상처를 입은 이상, 아마도 평생을 가져가야만 할 아픔일 터였다.
저벅. 타앗.
“헉, 허억… 소협!”
그때, 인기척이 다가왔다.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선 노인의 정체는 선우세가주, 선우각이었다.
“…노인장, 무슨 일이시오?”
“일은 무슨. 떠날 거면 얼굴이나 비추고 갈 것이지… 아침 댓바람부터 휑하니 떠나 버리는 법이 어디 있소?”
노인의 안색은 달아올라 있었다.
퍽 다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갈 길이 바빠서 그랬소. 그리고 인사라면 어젯밤에 이미 드리지 않았소?”
“에잉, 그것과 그것이 같소? 원, 뉘집 자식인지 버르장머리가…….”
“…….”
과거, 이벽은 스승과 혈마에 대한 단서를 찾고자 자신의 ‘친부’인 노인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노인은 이벽에게 ‘할 일을 모두 마친 후에 다시금 자신을 찾아와달라’ 말했었다.
말마따나 이벽은 지난 며칠간, 노인과 함께 모옥에 머물렀으며 퍽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윽.
“내 밥이 남아서 찬거리를 좀 쌌소. 뭐, 자갈이 씹힐 수도 있소만… 못 먹겠으면 그냥 내다 버리던가 하시오.”
돌연 노인이 찬합을 내밀었다.
“…고맙소.”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허나 이내 받아들였다.
“크핫, 고맙기는 무슨. 남는 밥이라 하지 않았소? 버리기 아까우니 주는 거요.”
“…….”
허나 노인의 말과는 달리.
찬합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말마따나 아침 댓바람부터 노인은 손수 밥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좌우간에… 잘 먹고 잘사시오. 그야 무림을 구한 위대한 영웅이시니, 아마 앞으로 이 늙은이와 볼 일은 그다지 없겠지만 말이오.”
크핫, 노인이 웃었다.
이벽은 잠시 노인을 바라보았다.
“…헌데 노인장께서는 계속 이곳에 머무르실 생각이시오?”
선우세가는.
사실상 멸문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소가주 선우협을 제외하고서는 세가 차원에서 마교의 편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므로, 선우세가는 딱히 무림맹 재건회의 제재 대상조차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는.
‘가담할 인원’조차 없었다.
과거, 이벽이 다녀간 이래.
언제고 다시 이벽이 찾아와 과거의 앙갚음을 쏟아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나날이 세가 내외를 옥죄어왔고.
하물며.
이벽의 이름이 중원무림의 영웅이자 절대고수로 떠오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조차 없었다.
이내 세가의 무인들은 하나둘 살길을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나날이 폐인이 되어가던 가주 대리 선우굉조차 자취를 감춰버렸노라 하였다.
물론 이벽으로서는.
딱히 지금의 선우세가를 어떻게 할 생각조차 없었다. 허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선우세가를 망하게 만든 셈이 된 것이다.
“크핫, 그야 물론이지. 외려 승냥이 떼들이 알아서 떠나가준 탓에 내 ‘진짜 식솔’들이 남았거늘 가긴 어딜 간단 말이오?”
허나 노인은 웃었다.
“…그렇군.”
이벽 또한 작게 웃었다.
분명 노인의 행색은 이전에 찾아왔던 때보다도 외려 젊어지고, 다소의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노인은.
여전히 선우세가주 선우각이었다.
“헌데 말이오.”
커험, 다시 노인이 말했다.
“소협께선…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무덤의 주인을 혈육이라 생각하고 있소?”
“……!”
그것은 퍽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허나 그 순간, 이벽은 노인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에 단순한 인사치레 이상의 의도가 있음을 직감했다.
이내 할 말을 골랐다.
“잘 모르겠군. 허나 은원의 무게를 따지자면… 이제는 갚아야 할 빚이 조금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소.”
“…크핫.”
노인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얘야, 이리 나오거라!”
돌연 등 뒤를 향해 외쳤다.
부스럭.
“…….”
그리고 그제서야 이벽은.
저만치 나무 사이로 노인 외의 또 한 명의 작은 인기척이 숨어 있었음을 눈치챘다.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동물에 가까운 기척이었기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부스럭, 탓.
이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해야 육칠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노인의 옆에 섰다.
“……!”
그리고 아이를 본 순간.
이벽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그것은 스스로 보기에도, 아이의 모습이 놀랄 만큼 ‘자신’을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외형의 문제가 아니었다.
짐짓 담담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빛 안쪽에서 이벽은 설명하기 힘든 동질감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핏줄이란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얄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는 법이지.”
허헛, 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
그리고 자신을 닮았다는 것은.
‘검치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협, 이 아이가 누구의 혈육일 것 같소?”
다시 노인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