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397)
405화. 후일담, 낙검(樂劍) (3)
선우세가의 적통 선우협은.
지닌바 검의 재능에 밀려 서자인 선우벽에게 소가주의 자격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선우벽을 기습한 뒤 절벽에서 떨어뜨렸고, 마침내 소가주의 위를 되찾았다.
허나 이후 방황을 거듭했으며.
떨쳐낼 수 없는 악몽에 시달렸다.
급기야 선우벽이 죽지않고 ‘이벽’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뒤에는 그러한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이내 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그 뒤를 추적하여 다시 한번 이벽을 제거하려 했으나, 외려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방황은 더욱 심해졌다.
“황보가에 투신하기 이전에도… 소가주께선 이미 한참 전부터 세가에 머물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고 있던 모양이오. 급기야는 여염집의 여인네와 ‘살림 비슷한 것’을 차리기까지 했더군.”
노인, 선우각이 말했다.
“…….”
이벽은 침묵했다.
다시,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 또한 조심스런 몸짓으로 이벽을 올려다보았다.
‘…선우협의 아이.’
말인즉슨 아이는.
선우씨의 ‘사생아’였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는 그 담담한 눈빛으로부터 이벽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자신을 비춰보았다.
“나는 이벽이라 한다. 너는?”
이내 입을 열었다.
“…선우엽입니다.”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혹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허나 제 부친께서 대협께 큰 죄를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
“아, 오해는 마시오. 그저 이 아이의 존재를 소협께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 감히 뭔가를 부탁드리려는 건 아니니까.”
다시 노인이 말했다.
“아이와 어미는 세가에서 거둬들일 것이오. 그 정도 입이야 어떻게든 먹여 살릴 수 있으니. 뭐, 이 녀석이 원치 않는다면야… 무리해서 검을 가르칠 생각은 없소만.”
말인즉슨 이미 한 번 모든 걸 놔버렸던 노인에게도 나름대로 가주로서의 책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군.”
그와 동시에 선우세가는.
작은 떡잎 한 장을 품게 되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형님의 등 뒤를 지킬 터이니, 형님은 이 세가를 지켜주십시오. 아시겠지요?
―걱정 마시죠. 이 아우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예, 힘닿는 데까지… 세가를 이끌어 올리는 것이… 형님과 저의 꿈이었지요.
―…죄송합니다, 형님. 사실 저는…….
불현듯 또다시.
선우협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철컥.
그 순간, 이벽은 허리춤에 매어 있던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풀었다. 그리고 검집째로 아이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이 검은 네 물건이다.”
흠칫.
아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크핫.”
검의 정체를 알아챈 노인이 나지막이 웃었다.
창공비검.
그것은 선우세가의 가주에게서 소가주에게로 내려져 전해오는 검이자 검치의 유품이기도 했다.
한때는 선우벽의 것이었고.
얼마 전까지는 선우협의 것이었으며, 이벽의 단전에 깃들었던 천마를 조각낸 검이기도 했다.
그리고.
선우협의 시신을 거둔 이후, 돌려줄 이가 마땅치 않아 이벽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정말로 제 것이 맞습니까?”
“본래는 네 아비의 물건이었고, 지금의 내게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아이가 잠시 머뭇거렸다.
철컥.
“…감사합니다, 대협.”
허나 이내 검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 아이의 담담한 눈빛에 찰나의 이채가 스치는 것을 이벽은 목도했다.
선우세가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세가의 전성기는 검치 이후, 두 세대를 거친 후에서야 마침내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묘한 감정이 스쳤다.
“…나 또한 아직 대협이라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니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백부(伯父)라고 하는 게 맞겠군.”
“……!”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만 가보겠소, 노인장. 죽지 않고 잘 살아 계시오. 때가 되면 다시 뵙지.”
“…그러시오. 하핫.”
마침내 이벽은 돌아섰다. 허나 몇 걸음 나아가다 말고 다시금 아이를 뒤돌아보았다.
“언젠가 혹, 힘이 필요할 이유가 생긴다면… 운남 화정촌의 낙검문에 찾아와도 좋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꾸벅.
아이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벽은 선우협의 마지막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이벽은 서산을 떠났다.
선우세가 인근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길 맞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나타서는 대뜸 멈춰 서며 길을 막았다.
덜컹, 다그닥.
또한 그 화려한 장식은.
퍽 눈에 익은 모양새였다.
철컥.
문이 열리며 여인이 내려섰다.
“어머, 이게 누구신가요? 정말 기가 막힌 우연도 다 있죠? 오호홋!”
“…당 소저?”
당가의 잠영난봉 당려옥이었다.
“길가에 웬 옥기린 같은 소협이 지나가길래 몰래 슬쩍해서 달아날까 생각했더니… 역시 소협이셨네요~”
당려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천박한 소리 좀 하지 마요!”
탓.
그때, 또 한 명의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벽을 마주하자마자 넙죽 고개를 숙였다.
“으, 은공!”
“…….”
아미파의 금광선봉 정연화였다.
허나 재회는 퍽 갑작스러웠으므로 이벽은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은공!”
정연화가 질끈 눈을 감았다.
“…뭐가 갑자기 죄송하시오?”
“그, 그게… 저는 안 오려고 했는데! 이 여자가 막무가내로―”
“뭐 어때요? 소저께서도 소협이 보고 싶었잖아요? 이때가 아니면 우리가 언제 강호의 영웅이신 소협과 다시 재회의 인사를 할 기회가 생기겠어요?”
그러자 다시 당려옥이 나섰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그야 물론 축하의 뜻을 전할 겸, 경사스런 자리를 함께하려구요~ 소협께서는 지금 개파식을 위해 사문으로 향하는 길이잖아요?”
“…그걸 어떻게?”
“오호홋! 재밌는 말씀이시네요.”
당려옥이 눈웃음을 쳤다.
“강호무림을 구한 일세의 영웅께서 문파를 연다는데… 설마 세간으로부터 아무런 관심도 끌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나요?”
“……!”
“기실 온 무림이 소협께 밉보일 것을 우려해 최선을 다해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인걸요~”
이벽은 조금 당황했다.
말인즉슨 원하건 원치 않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무림 곳곳에 전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는 다르죠.”
당려옥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왜냐하면… 뭐니뭐니해도 소협과 저희 당가는 선대로부터 인연을 쌓아온 막역한 사이이니까요. 그러니 이렇듯 직접 축하의 뜻을 전하러 온 게 아니겠어요? 호홋!”
“…….”
이벽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라, 혹시 소녀가 주제 파악을 잘못한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산골인지라 별로 대단할 것도 없소만.”
이벽이 황급히 답했다.
지금 이 순간, 이벽이 느낀 당혹감은 엄밀히 말해 눈앞의 당려옥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저 시골무관에 불과한 낙검문이 무림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었다.
허나 당려옥의 말처럼.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퍽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이내 이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도 예까지 찾아오셨는데 함께하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겠지. 그럼 모처럼이니… 잠시 신세를 지겠소.”
“…아, 네! 그럼요. 호홋!”
어찌 되었건.
매몰차게 굴 이유는 없었다.
이벽은 당려옥의 마차에 올라탔다. 이내 세 사람을 실은 마차가 다시금 나아가기 시작했다.
덜커덩, 덜컹.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아, 이건 본가로부터 소협께 드리는 약소한 선물이에요!”
“……?”
침묵을 깨듯, 당려옥이 주먹만 한 자루 하나를 내밀었다. 이벽은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슥.
매듭을 열자 안쪽으로는 청량한 내음을 풍기는 단약 십여 알 정도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뭐요? 독단?”
“…당가라고 해서 주야장천 독만 우려내진 않는다구요. 천영단(千英丹)이라고… 본가의 영약이에요. 대충 한 알당 십 년 정도의 내공이 담겨있어요.”
“……!”
말인즉슨.
결코 ‘약소한 물건’이 아니었다.
세력을 막론하고 비전의 영약이란 쉬이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문 외로 불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한 영약이 한 알도 아니라.
무려 십여 알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야 소협께서 앞으로 제자를 키우고 문파를 꾸려나가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실 테니까요. 호홋!”
당려옥이 활기찬 웃음을 보였다.
“…….”
스윽.
허나 이벽은 자루를 묶었다.
다시 당려옥에게로 내밀었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소.”
“…어, 네?”
“약소하다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 아니오? 또한 아무래도… 착오가 좀 있는 것 같군. 낙검문은 그저 마을의 작은 무관일 뿐, 딱히 무림인을 키워내는 곳이 아니오.”
“…호홋.”
당려옥이 미소가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소협께서 그걸 받지 않으시면 조만간 저희 할아버지께서 대노한 채로 직접 찾아오실 텐데요?”
“……!”
이벽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앞서, 독왕 당평세는 당가에 나타난 혈마를 상대하고자 절초를 연신 쏟아낸 결과,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 노야께선―”
“네에, 근래 들어 다행히 의식을 차리셨어요. 물론… 손상된 기혈의 회복에는 좀 더 오랜 정양이 필요하실 테지만요.”
“…다행이구려.”
이벽은 조금 안도했다.
“그렇다면… 노야께는 내가 나중에 따로 당가에 찾아뵈어 인사를 드리겠소. 어찌 되었건 이 물건은 너무 과분한 듯하니 부디 도로 거두어주시오.”
“…네, 소협.”
당려옥이 체념하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자루가 다시 당려옥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덜커덩, 덜컹.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이벽은 재회와 동시에 지금 막 눈을 뜬 마음속의 작은 불안감을 마주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으므로 이벽은 돌아가야 할 곳인 낙검문으로 다시 돌아갈 뿐이었다.
허나 자신이 무림에 남긴 족적은.
좋건 싫건 계속해서 뒤를 따른다.
어쩌면 그것은 오 년 전, 사패련의 싸움이 끝난 뒤 다시금 화정촌에서 눈을 떴을 때 품었던 불안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죄송해요. 멋대로 찾아와서.”
그때 다시 당려옥이 말했다.
“소협을 난처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호홋! 역시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
그제서야.
이벽은 당려옥의 미소가 적잖이 흐려진 것을 눈치챘다. 무언가 오해를 사게 하고 만 것이다.
“아니, 소저의 탓이 아니오. 물론 이렇게 찾아와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소.”
이벽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만… 나 자신의 걱정이 좀 과한 것 같군. 차후 가능한 무림과는 거리를 두고자 했는데…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니 말이오.”
“……?”
당려옥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내 의아한 기색이 퍼져나갔다.
“…저기, 소협?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이상하지만요. 무엇이 두려우세요? 소협에게… 아직까지도 두려워할 것이 남아있나요?”
“…….”
일순 이벽은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을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저… 은공?”
줄곧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정연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잠은 언제 주무셨나요?”
“…뭐라고?”
“아무런 근심도 없이… 편안한 밤을 보낸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것은 또다시.
퍽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허나 자신을 향한 정연화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고로 이벽은 불현듯 생각에 잠겼다.
기실 제남에서의 일전을 치른 이래, 지난 몇 개월이 어떻게 지났는지 이벽은 체감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다시금 무림으로 돌아온 이후, 아무런 고민거리도 없이 잠에 들었던 적은 아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잘… 모르겠소.”
“…역시 그러시군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야 하늘의 경지를 이루셨으니 스스로의 ‘피곤함’을 눈치챌 새조차 없으셨겠죠.”
다시 정연화가 답했다.
“피곤함… 말이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아무리 대붕이라 한들 쉬어가지 않는 날개는 부러지기 마련이니까요.”
훅.
그 순간 정연화가 가까이 다가왔다. 앳된 얼굴이 이벽을 지척에서 마주했다.
“은공,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제가 옥체에 잠시 손을 대도 될까요?”
“…그게 무슨?”
우웅.
정연화의 두 손끝에 은은한 금빛이 서렸다. 움찔, 이벽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 그러나 즉시 손을 멈추었다. 정연화의 기운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아미의 추나술이에요.”
다시 정연화가 말했다.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굳어버린 혈을 풀어주고… 심신의 피로를 가라앉히는 재주가 있거든요.”
“…그렇군.”
다시 이벽이 대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어쩌면 정연화의 짐작이 결코 그릇되지 않았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너무 오랫동안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할 일을 마친 지금에 이르러서도,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은공께서 잠깐이나마 편안히 쉴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무, 물론 그리 대단한 재주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한숨 정도는―”
“아하, 그렇단 말이죠?”
그때였다.
다시 당려옥이 말을 꺼냈다.
스윽.
그리고 이내 당려옥의 소매 안쪽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색의 주머니가 흘러나왔다.
“소협께 필요한 건 영약 따위가 아니라 그냥 보통의 꿀잠이었단 뜻이군요. 참, 진작에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호홋!”
스윽.
자루의 입구가 열렸다.
사르르, 은은한 향이 마차 안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벽은 즉시 그것이 수면향의 일종임을 깨달았다.
“당 소저, 잠깐―”
“소협, 부탁이니 이것마저도 마다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소협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
“그리고… 비좁은 마차 안에서 정파무림의 삼봉 중 두 명을 양옆에 끼고 잠드는 것도 천하를 구한 영웅만이 누려볼 수 있는 호사 아니겠어요? 오호홋!”
스르륵.
이내 나른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물론, 저항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이벽은 간절한 호의를 품은 두 사람의 눈빛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거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소.”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은공!”
스윽, 이내 이벽은 팔짱을 낀 채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연화의 섬세한 손끝이 몸 곳곳을 스치기 시작했다.
꾸욱, 꾹.
“……!”
일순 예상 외의 짜릿함이 스쳤다.
“세상에 은공, 온몸이 돌덩이 같으세요! 이, 이게 절대지경을 이룬 사내의 몸……?”
“…….”
“죄, 죄송해요! 제가 감히 무엄하고 천박한 소릴!”
꾸욱.
허나 하는 말이 어떻건 기혈과 육신의 피로를 덜어내는 정연화의 솜씨는 진짜였다.
그녀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몸의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 소협. 혹시 눕고 싶으시다면 소녀가 무릎베개라도 해드릴까요? 귀도 파드릴 수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당가의 독침을 귀에 넣는 건… 윽, 사양해야 할 것 같군.”
“유감이네요. 호홋!”
그즈음, 당려옥의 웃음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이벽은 서서히 생각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을만큼 무거운 잠이.
밤바다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소협, 적어도 이 마차가 나아가는 동안만큼은… 소녀가 지켜드릴게요. 그러니까 편안히 쉬세요.”
“…….”
덜커덩.
마차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 * *
이벽은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속에서 스승 이진천과 함께 나란히 앉아 계곡을 향해 낚싯대를 드리웠다.
물론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굳이 스승에게 말을 꺼내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계곡 위로 낮과 밤이 여러 번 교차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다.
이내 막연한 불안감이.
물처럼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덜커덩.
그리고 마차의 흔들림과 함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이벽은 창밖으로 흘러들어오는 햇살을 느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소협?”
그리고 햇살에 비추는 맞은편의 얼굴은 물론 당려옥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화려한 웃음이 스쳤다.
“…쿠울.”
동시에 정연화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란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울까 했는데 정 소저께서도 너무 곤히 잠든 바람에 차마… 죄송해요, 호홋.”
“개의치 않소.”
훗, 이벽 또한 마주 웃었다.
“확실히… 자고 나니 한결 낫군.”
분명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허나 이상하리만치 몸과 마음은 가벼워져 있었다.
“고맙소, 소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소. 이렇게 깊이 잠들어본 것은 어쩌면 처음인 것 같군.”
“호홋! 별말씀을요. 수고는 정 소저가 다 했죠. 저야말로 고작 하룻밤이지만, 소협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말이 좀 이상하군.”
“그런가요? 호홋!”
찰나의 어색함이 흘렀다.
“그보다 실은 조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서… 안 그래도 슬슬 소협을 깨워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소?”
“그게… 사실은 마차를 몰고 계신 노야께서 조금 전부터 길을 헤매고 계신 것 같아서요.”
슥.
이벽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퍽 눈에 익은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
이벽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길가를 채운 많은 인파들과 함께 왁자한 소란이 파고들었다. 그 풍경은 분명 낙검문의 아이들과 함께 거닐곤 하던 회택의 시내였다.
말인즉슨 어느새 마차는.
화정촌의 지척에 다다른 것이다.
허나 동시에 화정촌은 작은 산골마을에 불과하므로, 여기서부터는 다소 길을 헤매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정도 왔으면 거의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여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마차를 몰지.”
“네에? 그러실 필요는―”
“괜찮소. 덕분에 충분히 잤으니. 무엇보다 이쯤 왔으면 내가 주인이고 소저들은 객이 아니오?”
“…그렇게 되나요? 호홋!”
이내 일행은 잠시 마차를 멈추었다. 당가의 고용인인 마부 노인을 인근의 객잔에 머물게 한 뒤, 이벽은 마부석에 앉았다.
덜커덩, 다그닥, 탁.
서서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어느새 봄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다시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가의 곳곳마다 스승과 사형제들, 그리고 낙검문의 아이들과 함께 거닐었던 지난날들의 기억들이 남아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역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화정촌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고.
마차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털썩.
“그아악, 케헥, 케헤헥……!”
허나 그때였다.
돌연 네 발로 땅을 기는 인영 하나가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끼익, 이벽은 황급히 마차를 멈춰 세웠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인영의 정체는 또한 이벽에게 친숙하지 않을 수 없는 이였다.
“…파진성?”
저벅.
“흥, 어딜 도망가? 딸꾹.”
다시 그때.
또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기어서라도 달아나려 하는 파진성의 목덜미를 붙든 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갸아아악―!”
“…….”
묘한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었다.
“…송영영. 뭘 하고 있나?”
휘익.
그 즉시 송영영의 고개가 꺾어졌다. 취한 두 쌍의 눈이 마부석에 앉은 이벽을 올려다보았다.
“…대주.”
부르르, 송영영의 눈이 흔들렸다.
훅, 퍼어어어억.
허나 바로 그 순간.
그림자 하나가 송영영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문답무용의 손날이 목덜미를 두드렸다.
비틀.
“…꽥.”
송영영의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이내 그림자가 그 몸을 받아들었다.
“…에휴, 겨우 기절시켰네. 주정 부리는 절대고수라니, 대체 이게 웬 재앙이래?”
물론.
그림자의 주인이 공손수이며, 딱히 적의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벽은 굳이 저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뵙네요~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는데요? 그간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이내 공손수가 이벽을 향했다.
배시시, 낯익은 웃음을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벽은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야 물론 오라버니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개파를 축하하러 모인 자리에 저희끼리 먼저 가버릴 수는 없잖아요?”
“…….”
당연하다는 듯 공손수가 답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인즉슨 세 사람이 회택의 거리에 있는 이유는 결국 당려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헌데… 둘은 왜 그 모양이 됐나?”
“그게요, 여기까지 와서는 송 소저가 자꾸 도망치려고 하길래… 일단 파 소협한테 술 상대라도 시켜서 묶어두고 있었거든요.”
공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막상 오라버니나 현 비룡대주님의 얼굴을 뵙기가 좀 그런가 봐요.”
“…….”
이벽은 잠시 의식을 잃은 송영영을 내려다보았다. 기실 일전이 끝난 뒤, 송영영은 한 번도 이벽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 또한.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헌데 오라버니? 그 마차는―”
덜컹.
그때, 마차의 문이 열렸다.
“어머나, 이게 누구신가요? 암영각의 공손 소저! 그간 별일 없이 무탈하셨나요?”
“…윽, 역시나.”
당려옥을 마주한 순간, 공손수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휙, 조금 날카로워진 시선이 다시 이벽을 향했다.
“…오라버니, 솔직히 이건 좀 섭섭해요. 저희에겐 초대는커녕 개파식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안 했으면서… 저 여자의 마차를 타고 나타나다니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소저. 그저 소저보다 조금 앞길에서 소협을 납치했을 뿐, 이렇다 할 일은 ‘거의’ 없었답니다. 호홋!”
“…….”
공손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하아,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요. 그보다 마차가 있는 김에 실례 좀 할게요. 술에 젖은 짐 덩어리가 두 마리나 있어서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공손수는 날을 세웠으나.
당려옥은 개의치 않았다.
물론, 그녀는 얼마 전 암영각과 해남검파를 비롯한 사패련의 무인들이 위기에 처한 당가를 도운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윽?!”
술에 취한 한 쌍이 올라타자 정연화가 기겁을 했다. 마차는 순식간에 술 냄새로 가득차 버렸다.
어쨌거나.
추가로 이벽의 벗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다시 화정촌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핫.”
불현듯 이벽은 웃었다.
사람이 늘어난 만큼, 마차가 나아가는 속도는 느려졌다. 허나 물론 급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이내 마차는 산으로 접어들었다.
오래전, 이벽이 스승 이진천을 따라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를 끌고 올랐던 산길을 지났다.
마침내 저만치에.
눈에 익은 울타리가 나타났다.
* * *
다그닥.
화려한 마차가 화정촌으로 접어들었다.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던 두 노인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둑판을 뒤엎을 뻔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꾸벅, 마차를 몰던 사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노인들이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이구야. 웬 나으리께서 마을에 납셨나 했더니만… 이제 보니깐 이 문주네 셋째잖아?”
“아니, 이 사람아.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어? 셋째가 아니라 이제는 저 아가가 ‘이 문주’잖아?”
“껄껄껄! 그랬었지 참. 어디, 도시로 영영 떠나버렸나 했더니만… 꽃이 피니 다시들 돌아오는구먼 그래?”
다시 마차가 나아갔다.
드문드문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날 때마다 이벽은 인사를 건네었다. 화정촌의 하루는 이벽이 떠나오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쿵쿵쿵.
“형니임―!! 형님―!”
마을의 중앙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저만치에서 거구의 사내가 땅을 울리며 달려 나왔다.
“…석두야.”
“형님! 크허허헝!”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며 눈이 마주한 순간, 털썩 주저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 있었나?”
“아, 아뇨! 죄송함다… 크흑! 얼굴을 뵈니 저도 모르게 북받쳐 올라서… 여하튼 간에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렇게 되었다.”
퉁, 혁대웅이 가슴을 두드렸다.
“문파에 대해서라면 안심하십쇼! 잡초 하나 나지 않게끔… 제가 날마다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낙검문주 이벽의 수제자’로서.
이벽이 마을을 떠나있는 동안 낙검문을 맡아 지키고 있겠노라 장석두는 굳게 약속했었다.
그 덕에 이벽이 돌아올 곳은.
잘 지켜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맙다, 석두야.”
“핫, 뭘요! 형님의 동생으로서, 그리고 이 화정촌의 미래의 촌장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석두가 코를 쓸었다.
저벅.
“…벽이 오빠?”
그리고 다시 그때였다.
장석두의 거대한 몸 뒤로 가려져 있던 가녀린 그림자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왕수련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어설픈 과거의 기억들이 빠르게 이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은 어색한 미소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해야 할 일’은 다 끝났어요?”
“당장은 그런 것 같다.”
“당장이라… 아핫, 결국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네요.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런 식이죠, 뭐.”
“…할 말이 없군.”
다시 머쓱한 웃음이 번졌다.
“그보다… 가요, 어서. 소미 언니랑 대웅이 오빠는 이미 조금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덥석.
그리고 왕수련이 장석두의 팔을 붙들었다.
“얼른 일어나요. 애도 아니고… 창피하게 길바닥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하핫, 미안해요. 형님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멋대로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네.”
“…….”
이내 장석두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벽은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긁적긁적.
장석두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사실 저희 두 사람…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형님. 그러지 않아도 조만간에 혼례를 치를 거거든요.”
“…그렇군.”
훗, 이내 이벽이 웃었다.
물론, 마을을 떠날 즈음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잘된 일이기도 했다.
“…오빠, 이젠 되게 잘 웃으시네요. 헌데 그 마차에는 어떤 분들이 타고 있는 거예요?”
“내 벗들이다.”
불쑥.
“안녕하세요, 소저? 호홋!”
그 순간, 당려옥이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흠칫, 당황한 왕수련의 안색이 흔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아하하.”
휙, 얼른 다시 이벽을 향했다.
“…설마 오빠, 정인이에요?”
“…딱히 그런 사이는 아니다.”
“…꽃처럼 화려한 분이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하긴 척 보기에도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저런 분이 이런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시집을 올 리는 없겠죠? 하하.”
“…….”
“그러고 보니… 소미 언니랑 대웅 오빠들도 어떤 예쁜 소저 한 분이랑 같이 와있던데.”
“……?”
이벽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덜커덩, 다그닥, 다그닥.
어쨌거나 마차와 두 사람은 속도를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저만치에 낙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마차가 그대로 들어섰다.
덜컹,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석두의 말마따나 문파 내의 모든 것들은 이벽이 떠나오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후우욱.
찰나의 순간 이벽은 감회에 젖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날아드는 비도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퍼어어억, 쿵.
“…컥.”
비도의 자루에 얻어맞은 이벽이 그대로 마부석에서 추락했다. 풀썩, 땅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강호의 영웅, 위대한 천하제일고수 낙검신룡 이벽 소협이잖아?”
“…사저.”
이벽이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부엌 쪽에서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걸어 나오는 제갈소미를 마주했다.
“이 망할 꼬맹이, 개파식 하는데 문주가 제일 늦게 오는 법이 어딨어? 쌀 한 톨도 준비가 안 되어있잖아?”
“…….”
“심지어 늦은 주제에… 대책 없이 손님만 주렁주렁 달고 오면 대체 뭘 어떡하자는 거냐고? 응?”
“아하하, 진정해, 사저. 뭐 어때? 준비야 지금부터 다 같이 하면 되지. 거창하게 할 것도 없잖아?”
이어 혁대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효.”
흘끗, 혁대웅을 일견한 순간, 쌍심지를 켠 제갈소미의 눈매가 스르르 내려앉았다.
한숨과 함께 비도가 거두어졌다.
후욱, 탁.
그리고 그때였다. 저만치 하늘에서 인영 하나가 이벽의 지척으로 쏜살같이 내려앉았다.
“아하하… 공자. 괜찮으세요?”
인영의 손이 슬며시 이벽을 향해 뻗어졌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여인의 평범한 흰 손일 뿐이었다.
허나 동시에 그 손은 천하의 권왕 황보혁을 정면으로 맞상대했던 주먹이기도 했다.
“…….”
이벽은 태양을 등 뒤로한 채 밝게 빛나는 언미희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찾아와버렸네요. 죄송해요, 공자. 하지만 꼭―”
“…아니.”
이벽이 말을 받았다.
“응당 내가 먼저 함께할 것을 권했어야 하는 건데… 여러 의미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소.”
“…아하하.”
덥석.
이벽은 뻗어진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절대지경을 이룬 무인이 몸을 가누는 것에 일일이 부축 따위를 필요로 할 이유는 없다.
다만 호의로 뻗어진 손을.
무안하게 만들 이유 또한 없었다.
덜컹.
“와! 언니다!”
그때, 대뜸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인영 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 즉시 언미희에게로 매달리듯 쇄도했다.
덥석.
“…수야? 어떻게?”
“어떻게는요? 언니랑 마찬가지로 초대 따위야 해주건 말건 밀고 들어오는 거죠~ 우리가 이 목석같은 오라버니와 하루 이틀 함께했나요?”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
“그보다 언니야말로 좀 너무했어요. 일전에는 저희가 위험할 때 구해줘 놓고선…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잖아요?”
덜컹.
“나, 나도 살아있다고… 케헤헤.”
뒤이어 열린 마차의 문틈 사이로 창백한 안색의 파진성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흠칫.
제갈소미의 손이 움직였다. 비도가 다시 소매 바깥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다 멈추었다.
“…에이씨, 깜짝이야. 뭔 강시인 줄 알았네. 사람이 왜 네 발로 기어 나오는 거야?”
저벅.
이어 송영영이 내렸다.
파진성과 마찬가지로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눈빛이 혼란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어서 와요, 소저.”
제갈소미가 웃으며 말했다.
송영영의 표정이 흔들렸다.
“…나도 있어도 돼?”
“그럼요. 누구 덕에 말 그대로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긴 하지만… 어쨌건 편히 있다 가세요.”
“…….”
이벽은 송영영을 돌아보았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이진천의 마지막을 거두었던 장본인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직까지도 못내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것은.
스승 이진천이 직접 의도했던 결과임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벽과 사형제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고마워.”
이내 송영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탓, 타앗.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차의 주인인 당려옥과 정연화가 차례대로 내렸다.
“호홋, 어쩜. 정말로 아무것도 없긴 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천의 명물이나 향신료라도 좀 챙겨올 걸 그랬나 봐요. 그쵸, 정 소저?”
“절에선 그런 거 안 먹는다고.”
“…얼씨구?”
그리고 다시 두 여인의 정체를 확인한 제갈소미의 시선이 도로 이벽을 향했다.
“꼬맹이, 너 대체 무림에서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송 소저야 그렇다 쳐도 정파무림의 삼봉이 마차에서 한꺼번에 내린다고?”
“…어쩌다 보니 오는 길에 만났―”
우득.
허나 이벽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일순 맞잡은 언미희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이벽의 손을 와락 움켜쥔 것이다.
“…언 소저.”
“…앗, 죄송해요, 공자.”
그 즉시 맞잡은 손이 풀려났다.
“…….”
허나 이벽은 축 늘어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뼈가 짓이겨질 수도 있었음을 직감했다.
“…어머, 무서워라. 호홋!”
당려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언미희와 당려옥이 눈을 마주한 순간,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하… 개판이네. 하아.”
제갈소미가 다시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짜악, 돌연 손뼉을 치며 주변의 시선을 환기시켰다.
“뭇 동도 여러분?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건 이렇듯 본문을 축하하는 자리에 기꺼이 모여주셔서 감사해요. 헌데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지라…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그리고 시선이 왕수련을 향했다.
“우선은 밥이라도 해야 하는데… 저기, 수련아. 미안한데 너희 집에 가서 쌀이랑 이것저것 좀 꿔올 수 있겠니? 언니 돈 많으니까 걱정 말고―”
“네, 소미 언니. 그럼요.”
“아, 그럼 저도 얼른 집에 다녀오겠슴다! 제가 사냥해서 저장해놓은 고기가 좀 있거든요!”
“…그래, 부탁할게, 석두야. 너희 둘이 저 죄 많은 문주보다 백 배는 더 의지가 되는구나.”
타닷.
장석두와 왕수련이 문을 나섰다.
“…밥 먹는 거야?”
다시 그때, 송영영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술 사올게.”
탓, 후욱.
그리고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방향을 꺾으며 삽시간에 멀어졌다.
멀어진 방향은.
회택의 시내를 향하고 있었다.
“아, 그럼 저희도 송 소저랑 같이 적당히 장이나 봐올게요. 조금 전에 둘러보니 산동네치고는 구경할만한 게 꽤 있더라구요~”
“자, 잠깐! 케헤헥, 그 이전에 나 물 한 잔만―”
“시끄럽고, 따라와요, 짐꾼.”
곧이어 공손수와 그 손에 붙들린 파진성 또한 반쯤 강제로 날아올랐다. 송영영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벽.”
다시 제갈소미가 이벽을 향했다.
“너는 그… 하아, 됐다. 그 아리따우신 소저들과 함께 가서 꽃이나 좀 따와. 화전이나 부쳐 먹게.”
“…꽃?”
이벽이 되물었다.
매화는 사방에 피어있었으므로, 굳이 어디로 나가지 않아도 지천에 널린 것이 꽃잎이기 때문이었다.
“잔말 말고 갔다 오라고 이 색마 감자대가리야. 네 업보다, 업보. 난 모르겠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결해.”
허나 제갈소미는 단호했다.
“사저, 나는? 장작이라도 패올까?”
“…아니. 대웅이 넌 그냥 여기서 날 좀 도와줘. 이래저래 안에서도 준비할 게 많으니까.”
“응, 알았어, 사저.”
혁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벽은 잠시 사저와 사형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스쳤으나 이내 돌아섰다.
저벅.
그리고 세 여인과 함께 문을 나섰다. 허나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 어색한 공기가 이어졌다.
사라락.
침묵 위를 꽃잎이 뒤덮었다.
“소저, 우리 구면이죠?”
돌연 당려옥이 말을 꺼냈다.
흠칫, 언미희의 눈이 흔들렸다.
“왜, 오래전에 한 번 피 터지게 싸운 적이 있었잖아요? 저는 여러분들의 적이었고, 소저는…….”
“…아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언미희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만 해도 무인으로서 이렇게까지 격의 차이가 나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해진 거예요? 부럽네요. 호홋.”
당려옥이 작게 웃었다.
덥석, 정연화의 손을 붙들었다.
“뭐,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일과 못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죠. 소협, 저는 정 소저랑 같이 근처에서 먹을 수 있는 산채나 버섯을 좀 캐올게요!”
“…버섯 말이오? 갑자기?”
“네, 이래 봬도 당가의 여식인걸요! 모처럼이니 ‘잘할 수 있는 일’로 살림에 보탬이 되어 제갈 소저께 점수를 따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호홋!”
“잠깐! 근데 나는 왜―”
“가요, 정 소저. 아미와 당가의 자존심을 걸고 사천의 매운맛을 보여줘야죠!”
타앗.
이내 당려옥은 막무가내로 정연화를 끌고 가다시피 매화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
그렇게.
낙검문의 대문 앞에는 이벽과 언미희만이 남게 되었다. 허나 이후로도 두 사람은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문 앞을 서성였다.
“꽃을 따려고 해도… 이렇게 지천이 꽃에 널려있으니 정작 꽃을 따러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하하.”
언미희가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벽은 잠시 당려옥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보면 자신 또한 검 외에도 스승에게 배운 것이 있었다.
“…공자, 사실 저 할 말이―”
“소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소?”
“…네, 네?”
“안에서 낚싯대를 챙겨오겠소.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계곡이 있으니… 어차피 어딜 가나 꽃이라면 고기라도 좀 낚아가는 게 좋겠지.”
“아… 네!”
저벅.
이벽은 다시 돌아섰다.
[낙검문]그 순간 불현듯.
대문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즐거운 검문.’
그것은 새삼스럽게도 무관의 이름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볍고 우스운 이름이었다.
허나 그것이야말로.
스승이 바랬던 모습일지 모른다.
낙검(落劍), 그리고 낙검(樂劍).
말마따나 오늘만큼은 검을 내려놓고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좋은 날씨였다.
지금까지 낙검진천록을 사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