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50)
51화. 초연서 (1)
“…하, 하오문이 어째서?”
장내에 내려앉은 정적을 깬 것은 양호명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에 깃든 당혹감을 숨기지는 못한다.
“어째서라뇨? 우리 공자를 열심히 괴롭히시던 와중에 왜 끼어드느냐고 묻는다면 저야말로 어째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오호호!”
“…….”
양호명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침중한 시선으로 이벽과 초연서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서서히 입을 연다.
“우리 공자라, 말인즉슨 그 녀석이 하오문의 소속이란 말이오?”
“뭐, 그렇다고 볼 수도,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좀 전에 사문을 물었을 때는 엉뚱한 이름을 들먹였던 걸로 기억하오만.”
“아,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그 엉뚱한 사문의 문주가 제 상관이 되시거든요.”
“…….”
“뭘, 정검문주께서 본인을 점창의 제자라고 주장하시는 것과 크게 다를 건 없지 않을까요~?”
반박할 말은 없다.
양호명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 말이 사실인지, 애초에 저자가 정말로 하오문도가 맞긴 한 건지,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건 의미가 없다.
괴상한 몰골을 하고 있으나 저자의 기세는 진짜였다. 자신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 정도의 고수가 튀어나온 시점에서 이미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지점은 지났다.
양호명이 이벽을 향했다.
‘시간을 끌고 있었던 건가.’
감히. 점창의 제자를 상대로.
후욱.
양호명의 온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헉, 대제자 장막수가 숨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오호호, 해볼 생각이신가요? 문주님 같은 사내를 싫어하진 않지만…, 원한다면 기꺼이 제 흔적을 그 몸에 새겨드리지요.”
초연서가 입술을 핥았다.
이벽을 지키듯 한 걸음 나섰다.
이내 그의 어깨 위로 스산한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절정의 기운들이 서로 부딪힌다.
삽시간에 무거워진 대기가 좌중의 어깨를 내리누른다. 솜털이 곤두서고 호흡이 답답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
주춤주춤, 정검문의 제자들이 양호명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다.
질 수 없다는 듯, 거동이 가능한 무적파의 남은 제자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탓.
“수고했어요, 언니. 그런데 하오문 측 지원군이 여러 의미로 제 예상을 많이 뛰어넘네요.”
“아, 아하하, 그러게요……?”
“케케케! 짜릿짜릿한데?!”
공손수와 파진성 역시 이벽과 언미희의 곁으로 다가섰다.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비룡대원들이 이벽의 앞을 가로막는다.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조금 전 이벽이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밀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지키고 본다.
“…큭.”
양호명은 침음을 삼켰다.
이대로 부딪히면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하오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모르되, 하오문이 개입한 이상 이 자리를 물러선다는 것은 결국 다음의 기회조차 없다는 뜻이다.
무적파를 제압하지 못한 채 협상에 들어간다.
이곳 회화를 중심으로 호남무림에서 점창과 정검문이 그리고자 했던 그림이 무너진다.
빠르게 전력을 계산한다.
무적파의 잔당들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어린 것들은 제법 기세가 있어 보이지만, 창명과 창성. 그리고 장막수가 있으니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눈앞의 사내였다.
물론, 자신이 상대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이 사내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기는 싸움이다.
“…….”
그러나… 어쩐지 꺼림칙했다.
무공이나 기세 이전의 문제였다.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는 저 사내에게서 어떤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고 있다.
찡긋.
사내가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움찔.
양호명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창성과 시선이 부딪혔다. 창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러설 수 없다.’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안을 애써 추스르며 양호명이 검을 쥐려던 그 순간이었다.
두두두두!
정검문 일행의 등 뒤로 파괴된 대문 바깥쪽에서 인파의 발소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양호명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 모래 먼지가 일어나고 있다. 언뜻 보아도 한두 명의 인파가 아니다.
설마… 하오문 측의 증원인가?
“칫, 재미없게 됐네.”
그때, 김이 샜다는 듯 초연서가 혀를 찼다. 반응으로 미루어 하오문 측은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양호명으로선 몰려오는 이들의 정체를 여전히 짐작할 수 없다.
타앗!
모래 먼지 속에서 인영 하나가 솟구쳐올랐다. 허공에서 몸을 튕기며 화살처럼 쏘아진다.
다음 순간, 인영은 이미 무적파의 내부까지 도달해있었다.
표홀하기 그지없는 몸놀림.
탓, 인영이 양호명과 초연서의 사이에 내려앉았다. 대뜸 양팔을 뻗어 두 사람을 가로막는다.
“그만! 정검문주와 하오문의 초 대협께서는 부디 기세를 거두어주시길 바라오!”
거지꼴을 한 사내였다.
아니, 꼴이 아니라 진짜다.
“이보세요 거지 아저씨, 지금 장난해요? 끼어들 거면 진작에 끼어들 것이지 왜 내 눈치보다 끼어들고 그래요? 사파가 우스워요?”
“…송구하오. 다만 본 방의 방주께서 호남의 일에 개입을 결정하시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오.”
“에이, 알만한 사람끼리 이러지 말죠, 우리? 안 그래도 업무상 얼굴 부딪힐 일도 많은데 정말~”
* * *
“케케케! 그래서 말야! 거기서 내가 딱 말을 했지! 해남의 떠오르는 샛별인 이 몸께서 기꺼이 너희들의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야!”
“오오오!”
“과연! 멋지십니다, 형님!”
파진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적파의 식당 정중앙에는 대제자 표왕호를 비롯한 일련의 무리들이 파진성을 둘러싸고서 연신 환호성을 발하고 있다.
주변 식탁에는 빈 접시들과 더불어 술병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콰하게 취한 얼굴들은 어느새 호형호제를 남발하고 있다.
“…의외로 인망이 좋네요?”
“그야 뭐,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살벌하기로 유명한 해남검파에서 두각을 드러낼 정도니까요. 나름의 수완이 있기야 하겠죠.”
멀찍이 구석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언미희와 공손수가 말을 주고받았다.
“…….”
이벽은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맨 처음 사패련 접객당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해남검파 측을 따르는 후기지수들이 그 주위를 잔뜩 두르고 있었다.
단지 후광만은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하, 하지만 형님!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비룡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즉…….”
“아, 그야 물론! 사문과 척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말야,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지! 하지만 사내가 어찌!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겠나?! 앙?!”
탕!
파진성이 호기롭게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 뭐시기냐, 자고로 말야, 앙?! 진정으로 사문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길을 가려는 사문과 맞설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야!”
“여, 역시!”
“크헝헝! 존경합니다, 형님! 진짜 중의 진짜 사내십니다! 평생 모시고 싶습니다!”
삽시간에 식당 안은 울음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은 잘하는군.”
“아하하, 이야기가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이벽과 언미희가 한 마디씩 늘어놓자 공손수가 피식 웃으며 식탁 위에 팔을 세우고 뺨을 괴었다.
“뭐, 좀 재수 없지만 놔두죠. 한 달 내내 두들겨 맞다가 오랜만에 자기보다 약한 녀석들한테 둘러싸여 우쭈쭈 받으니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그렇군.”
“그리고 뭐, 저런 짓거리들이 결국은 우리 비룡대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일이 될 테니까요. 파 소협도 나름대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
세 사람은 다른 이들과는 따로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혹 사파 제자들의 선망 어린 시선이 흘끗흘끗 닿긴 했으나 섣불리 다가오지는 못한다.
언뜻 보아도 이쪽 식탁에는 흐르는 공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라버니, 그 녀석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세던가요? 오라버니를 압도할 만큼?”
문득 공손수가 화제를 돌렸다.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앞서 이벽은 점창의 삼대제자인 창성과의 전투에서 잠깐이나마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일섬룡(一閃龍) 창성. 점창의 삼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이로, 소위 말하는 정파 오룡삼봉(五龍三鳳) 중 한 명이죠. 하지만 저희 암영각이 가진 정보로는 그래봤자 후기지수일 뿐, 오라버니를 몰아붙일 정도라고는—”
“아니, 상대하지 못할 수준의 적은 아니었다. 다만…….”
“다만 뭐요?”
이벽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선우세가의 검을 사용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미안하지만, 말하기 곤란하군.”
“…그렇다는 건 문제는 그 녀석이 아니라 오라버니 자신에게 있다는 이야기로군요.”
“…….”
“아, 괜찮아요. 제가 오라버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요? 제가 아직 그만큼의 신뢰를 얻지 못한 탓이니까요. 차차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아님 말고.”
휙, 공손수가 고개를 돌렸다.
말투에선 어쩐지 조금 뼈가 느껴졌다. 달그락달그락, 침묵 속에서 젓가락이 오고 갔다.
“…….”
흘끗, 언미희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이벽은 잠시 고민했다.
“…무공의 문제다.”
“네? 무공이요?”
“정검문주란 자가 내 검의 뿌리를 짐작하는 것 같더군. 확신을 가진 것까진 아닌 듯하지만, 과거에 발목을 붙잡혔다.”
“…….”
그것은 지금의 이벽이 비룡대의 일행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야기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공손수가 배시시 웃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라버니.”
“…….”
“뭐, 오라버니의 검을 보면 그런 사연이 있을 것 같기는 했어요. 여러모로 사파라는 이름이 안 맞는 옷처럼 느껴진달까……?”
히끅, 언미희가 딸꾹질을 했다.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 모습을 보며 공손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렇군요. 그런 근본적인 문제라면야… 당장은 해결하기가 어렵겠네요. 여차할 때 오라버니를 전력으로 사용할 수 없다니, 뼈아픈걸요?”
“…미안하군.”
“아뇨, 미안해할 문제는 아니에요. 저도 파 소협처럼 제 역할을 하려는 것뿐이니까.”
“…….”
이벽은 고민했다.
답 없는 고민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고 해서, 실재하는 선우세가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지는 않다. 허나 결코 부딪히고 싶지도 않다.
만일.
만에 하나.
다시 선우협을 만난다면, 만나게 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아이는 다시 한번 자신을 죽이려고 할까?
그리고 자신은 그런 선우협을 죽일 수 있을까?
“…….”
문득, 등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화정촌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때 분위기를 환기하듯 언미희가 말을 꺼냈다.
“어쩐지 싸움이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는데… 물론 이대로 정검문이 점거한 문파들을 풀어주고 물러선다면 좋겠지만 그러진 않겠죠?”
“그러게요, 언니. 이미 이 회화만이 아니라 호남무림 전체의 문제가 걸린 일이니까요. 하지만 설마 하오문에 개방까지 팔을 걷고 나설 줄은…….”
흐음, 공손수가 생각에 잠겼다.
비룡대 일행은 당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언미희를 통해 하오문 회화지부의 조력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오문의 존재감을 빌려 정검문을 압박하고자 했던 것이지, 무언가 실질적인 가세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결과, 하오문 수호대의 일원이자 절정고수인 초연서가 덜컥 낚여버렸다.
그리고 그만한 고수의 움직임은 안 그래도 호남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개방마저 부랴부랴 함께 움직이게 한 모양이었다.
개방의 오결제자이자 방주의 직전제자인 철면개(鐵面丐)의 중재 앞에서는 천하의 정검문주라 할지라도 이를 갈며 돌아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오문과 개방.
여러 의미로 공통점이 많다.
각각 정사를 대표하는 정보 세력이지만, 동시에 그 소속이 애매한 집단이기도 했다.
하오문은 사패련과 동맹관계일 뿐, 사패련의 소속이 아니다. 고로 그 입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개방 역시 이와 비슷하다.
무림맹이 도가문파 중심의 정도맹과 오대세가 중심의 의혈맹으로 쪼개지는 와중에도 둘 중 어느 쪽에도 가맹하지 않은 채 소림 곁에 남았기 때문이다.
“뭐, 어찌 되었든 일단은 잠자코 기다려 봐야겠죠? 비교적 가장 중도에 가까운 거대세력들이 나섰으니, 우리 행보는 그다음 문제—”
털썩.
“오호호, 안녕하신가요, 공자? 그리고 아가씨들? 식사하는 데 미안하지만, 공자를 좀 빌려 가도 괜찮을까요?”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나듯,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인영이 일행의 탁자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하오문의 초연서였다.
“무공의 문제라고 했죠?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하여간 제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