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69)
71화. 남촌 피습 (1)
호화로운 식사가 끝났다.
허나 이후에도 대접은 이어졌다.
비룡대 일행들 모두에게 시종이 딸린 따뜻한 목욕과 깨끗한 옷, 그리고 별실의 잠자리가 제공되었다.
“대접이 변변찮아서 죄송해요, 여러분. 어째 집구석이 좀 어수선한 경향이 있네요.”
“…변변찮다니요. 저는 살아생전 이런 사치를 누려본 기억이 없는데…….”
“케헤헤! 암! 이 정도야 그냥 소박한 수준이지! 나중에 해남 한 번 와 봐! 진짜 대접이란 게 뭔지 내가 아주 그냥 단계별로다가—”
“아, 파 소협은 늘 그래왔듯이 다 빚에 포함인 거 아시죠?”
“…….”
“농담이에요.”
피식, 공손수가 웃었다.
“뭐, 그동안의 미운 정 생각해서 마지막 정도는 의리로 봐줄게요. 부디 편안하게 쉬다 가세요.”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일행들은 석등에 불이 켜진 정원을 거닐며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각자의 잠자리에 들었다.
“…….”
잠자리는 모두 개별실이었다.
손님용의 별채에 딸린 방들은 하나하나가 혼자 머무르기에는 불필요할 만큼 크게 느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한 시간이 제법 길었단 뜻이겠지.’
노숙을 하거나, 객잔에 머물거나, 남녀가 유별함에도 함께 부대끼는 것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차였다.
풀썩.
이벽은 침상에 드러누웠다.
식사 자리에서 공손수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았다.
—여러분, 마음 같아선 며칠이건 몇 달이건 느긋하게 대접하고 싶지만… 가능한 한 빨리 저희 집을, 암영각을 뜨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엥? 그게 뭔 말인데?
—…무슨 일이 있나요, 소저?
—…분위기가 좀 이상하거든요.
—원래는 이런 분위기가 아닌가?
—아뇨, 오라버니. 딱히 이상한 건 없었지만요… 너무 그림 같아요. 마치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일행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섣불리 캐묻기에는 난처했다.
말인즉슨,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어머니인 천소연마저 의심의 범주에 포함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선 기본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는 게 올바른 마음가짐이거든요. 부모님께 그렇게 배웠어요.
공손수가 웃으며 마무리했다.
그리고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
이벽 일행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곳 암영각을 떠나기로 했다.
공손수는 함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맞는 일인지는 아직까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암영각에선…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파무림의 현 정세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패왕가와 흑천방.
늦건 빠르건, 결국은 암영각 역시 어느 쪽에 설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설령 이곳에 계속 머문다고 한들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
애초에 천소연은 어째서 일행을 이곳 암영각까지 데려왔던 걸까? 정말로 흑천방의 추적을 걱정해서?
‘알 수 없군.’
생각이 길어지려던 찰나, 무거운 잠이 몰려왔다. 이벽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그러나 잘 수 없었다.
퍽 불편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만큼 피로한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벽은 그 상태로 반 시진 가량을 깨어있었다. 그리고.
우웅.
어느 순간, 이유를 깨달았다.
‘선천의 힘이……?’
이벽의 가슴 속에 또아리 튼 선천의 힘이 움찔거리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내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허나 어째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선천의 힘은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아 종종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움직이곤 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이벽에게 해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벌떡.
이벽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흐읍.
숨을 들이켰다.
공기 중에서 미세하게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스며들자 나른한 기운을 퍼뜨린다.
우웅.
다시 선천의 힘이 일어났다.
퍼지려 하던 기운을 태워버린다.
쿵, 타다닷!
“오, 오라버니! 언니! 파 소협!”
그때, 방문 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손수였다.
훅, 덜컹!
이벽은 검을 챙겼다.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공손수.”
“오, 오라버니! 괜찮아요?!”
“…나는 괜찮다.”
방문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이벽은 별채의 마루를 가로지르는 공손수와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거지?”
“…마비향이에요.”
슥, 공손수가 정원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하인들 서너 명이 쓰러져 뒹굴고 있다.
“누군가 저택 내부에 향을 풀었어요. 서서히 잠에 빠져들게 한 다음 움직임을 마비시키죠. 저는 내성과 호흡법이 있어서 조금 불편한 정도예요. 하지만…….”
타앙!
그때, 저만치 방문이 열렸다.
“크으……!”
언미희가 걸어 나왔다.
허나 움직임은 괜찮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다가는 흔들, 신형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탓.
공손수와 이벽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미희를 부축한다.
“아, 해요, 언니. 어서요.”
공손수가 단약을 꺼냈다.
언미희의 입에 밀어 넣은 뒤, 벽 한켠에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기대어 앉혀두었다.
“…크으, 미, 미안—”
“괜찮아요, 언니. 자도 돼요. 약도 먹었고 별거 아니니까 시간 지나면 금방 해독이 될 거예요.”
챙, 채앵!
“마, 막아라!”
“절대로 넘어서지 못하게 해!”
그때, 집을 둘러싼 담벼락 너머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좀 알겠나?”
“…죄송해요. 저도 뭐가 뭔지 잘.”
꾹, 공손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집을 치는 걸 보니 오늘 도착한 우리가 목적이겠죠. 우선은 튀어요. 제가 파 소협을 데리고 나올 테니 오라버니는 먼저 언니를—”
슈욱, 탁.
그러나 그때였다.
다음 순간, 복면을 쓴 흑의인들 여럿이 정면의 담장 위에 착지했다. 일행들을 내려다본다.
“이미 늦은 것 같군.”
“…….”
저벅.
이벽은 한 걸음 나섰다.
언미희와 공손수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쥐었다. 우선은… 열 명인가.
“파진성을 데려와라.”
“…네, 오라버니.”
탓.
공손수가 땅을 박찼다.
슈슈슉!
그 순간 적들의 손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암기들이 쏘아진다.
스겅.
동시에 검집을 벗어난 이벽의 검이 원을 그었다. 빠르게 뻗어지고, 변화하며 회수된다.
챙, 채챙!
청강검식의 발검식 쾌와 회검식 변이 연달아 펼쳐졌다. 철컥, 그리고 검이 검집으로 회수되었다.
후두둑.
암기들이 일제히 땅에 쏟아졌다.
“재미없군.”
“……!”
“가능한 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 우선은 정체와 목적을 밝히시오.”
적들은 이벽의 한 수에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결국은 침묵을 고수했다.
이벽은 상황을 생각했다.
잘 훈련된 것 같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다. 충분히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수준.
그러나 거동이 어려운 언미희가 등 뒤에 있는 이상 함부로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는 없다.
슈슈슉!
그때, 다시 암기가 쏟아졌다.
채앵!
청강검식이 다시 원을 그었다.
허나 암기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 쏟아지는 틈을 타 적 두 명이 조용히 자리를 뜨는 것을 이벽은 놓치지 않았다.
슥, 서걱.
들켜버린 암습은 의미가 없다.
“커억.”
“크… 윽.”
두 명의 인영이 베어졌다.
피를 흘리며 땅 위로 포개어졌다.
“죽이지는 않았소.”
“…….”
“허나 다음은 없소. 마지막 경고요. 정체와 목적을 밝히고 물러서시오. 그렇지 않다면 이후로는 굳이 살려주지 않겠소.”
후욱.
이벽은 적파심공을 끌어올렸다.
움찔.
그제서야 적들이 동요를 보였다. 적파심공은 그 혈향과 같은 살기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다.
그것은 호남에서 있었던 일섬룡 창성과의 비무에서 이미 경험해 본 바 있다.
타닷.
그때, 공손수가 돌아왔다.
기절하듯이 잠든 파진성을 들쳐멘 채 나타난 공손수는 마찬가지로 언미희 옆에 그를 앉혀두었다.
“음냐음—”
짝, 짜악!
“일어나! 일어나요, 파 소협!”
“커윽, 커흐윽…! 누, 누구야? 춘앵이? 아니면 도향이? 그렇다면 여기는 해남……?”
“헛소리하지 말고 입 벌려! 자더라도 이거 삼키고 자요!”
공손수가 단약을 쑤셔 넣었다.
쿨럭쿨럭, 파진성이 기침을 했다.
“둘의 회복은 어느 정도 걸리지?”
“…당장은 어려워요. 아마도 한 두 시진 정도는 있어야 거동이 가능할 거예요.”
슥, 탁.
이윽고 적들이 다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히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뒤, 신중하게 거리를 좁힌다.
“…….”
역시 물러나 주진 않는군.
찰나의 순간 이벽과 공손수가 시선을 교환했다. 끄덕, 공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륵.
공손수가 등 뒤의 방문을 열었다. 언미희와 파진성을 안고서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 놈도 들여보내지는 않겠다. 다만… 만일의 경우에는 두 사람을 부탁한다.”
“네, 오라버니. 뒤는 신경 쓰지 마세요. …큰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척.
그리고 이벽은 문 앞을 막아섰다.
어느새 지척까지 이른 적들이 반원의 형태를 그린 채 포위한다. 훅, 이벽은 다시 청강유엽공을 일으켰다.
슈슈슉, 챙!
이벽은 재차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었다. 그 틈을 타 적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챙, 채앵!
암기를 통한 거리 조절.
그리고 머릿수를 통한 압박.
적들의 움직임은 현란했다. 무엇보다 이벽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함을 잘 알고 있기에,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허나.
‘어렵지 않다.’
문득 이벽은 생각했다.
적들의 움직임은 공손수를 닮아있었다. 공손수와 파진성의 협공을 상대하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한 명씩, 확실하게 벤다.’
이윽고 한 명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훅, 이벽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청강유엽검식을—
“자자, 그만! 물러서, 이놈들아!”
그때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쐐애액!
그와 동시에 측면에서 암기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이미 수도 없이 쳐낸 암기였으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결코 심상치 않다.
청강유엽검식(淸江流葉劍式).
회검제일식(回劍第一式).
곡검(曲劍).
채앵!
“크—”
이벽의 검이 휘어졌다.
다가온 적을 가볍게 스치고는 곧이어 측면의 암기를 쳐내었다. 그 순간, 손목이 저릿했다.
쳐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허나 그것은 이미 손을 떠난 암기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묵직했다.
타앗.
그 틈을 타 다가왔던 적들이 일제히 썰물처럼 물러섰다. 담장 아래까지 후퇴한 뒤 부복했다.
“쯧, 미련한 녀석들 같으니. 딱 봐도 상대가 안 되는데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려고 해?”
“…….”
담장 위에 선 이는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없던 또 한 명의 복면인이었다. 그리고.
‘우두머리.’
이벽은 한눈에 직감했다.
“읏차.”
탓, 사내가 담장 아래로 내려앉았다. 저벅저벅, 부하들을 지나쳐 이벽에게로 다가온다.
“그래그래, 너 잘났다 이놈아~ 보아하니 사파제일 후기지수니 낙검신룡이니 하는 이름을 놀음판에서 따낸 건 아닌가 보네.”
그리고… 강하다.
철컥, 이벽은 검을 고쳐 쥐었다.
꺼낼 말을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삼촌?”
등 뒤에서 공손수가 말했다.
흠칫, 이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이거, 역시 한 번에 들키네. 얼마 만에 보는 건데 역시 우리 조카님 눈썰미는 못 당하겠다니까?”
슥, 사내가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웃는 낯을 한 장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태연한 얼굴은… 공손수, 그리고 천소연을 꼭 닮아있었다.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요.”
“뭐, 무슨 할 말이 있겠니? 보이는 그대로, 널 데리러 왔을 뿐이야. ‘대세’가 저쪽으로 넘어가 버려서 말이다.”
“…….”
목적은… 공손수였나.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이런 짓 하고도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여긴 제 집이 아니라 우리 아빠 집인데요?”
“에이, 설마~”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어찌 감히 매형의 분노를 감당하겠니? 당연히 매형도 이미 우리 쪽에 계시니 이러는 거지.”
“…뭐, 뭐라구요?”
“독침 맞고 쓰러지셨어, 매형. 못 본 사이, 북촌의 백가 아저씨가 많이 세졌더라고.”
타앙!
“마, 말도 안 돼!”
공손수의 발이 바닥을 굴렀다.
허나 사내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따라와 보면 알겠지? 하나뿐인 조카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그럴 거였으면 마비향 같은 걸 쓰지도 않았겠지.”
“…….”
슥, 사내가 다시 이벽을 향했다.
“저기, 비룡대주?”
“…뭐지?”
“말했다시피, 방법이 거칠긴 했지만 나는 그냥 내 조카를 데리러 왔을 뿐이야. 일종의 집안싸움이지. 그러니 이대로 물러서는 게 어떠니?”
“…….”
“이대로 조용히 암영각을 떠나준다면야 너와 다른 친구들은 건드리지 않으마. 뭐랄까, 너는 좀… 함부로 죽어버리면 이야기가 복잡해져서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