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8)
8화. 일대제자 이벽 (3)
“야앗!”
목검이 엉망으로 휘둘러졌다.
이벽은 어설프게 검을 쥐고 선 왕수련의 자세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검술을 운운하기 이전에 기초체력이며 근력이 절대적으로 없다.
하지만… 이벽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침을 내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딱히 무림인이 될 것도 아니다.
마을 소녀에게 무림문파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가혹한 체력단련을 시키는 것은 이벽의 생각에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앗, 으아아!”
덥석.
일순 발을 헛디딘 왕수련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벽은 얼른 팔을 뻗었다.
폭, 왕수련의 몸이 기대어졌다.
“괜찮나?”
“앗! 네, 고, 고맙— 꺅!”
타악.
돌연 왕수련이 이벽을 밀쳐냈다.
그러나 도리어 밀려난 것은 왕수련 본인이다.
이벽은 두어 발자국 멀어져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왕수련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땀 냄새 안 나요?”
“…아니, 안 나는데.”
발갛게 물드는 얼굴.
휙, 왕수련은 황급히 이벽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것으로 족하겠지.
이벽은 생각했다. 아예 근력이 붙기 전까지는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로 잠자코 지켜본다.
왕수련은 현재 이벽의 유일한 제자이므로, 그녀를 지켜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장석두를 쓰러뜨린 이후에도 마을 아이 중 이벽에게서 검을 배우길 희망하는 것은 여전히 왕수련 뿐이었다.
그 밖의 아이들은 이벽과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흠칫흠칫 놀라며 눈을 피하기 일쑤였다.
“…….”
뭐가 잘못된 걸까.
좌우간 본의는 아니지만, 왕수련을 지도하는 오전은 그의 빠듯한 하루에서 가장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낙검문에 정착한 것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이벽은 새로운 생활에 서서히 적응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왕수련에게 검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제갈소미에게서 집안일을, 혁대웅에게서 바깥일을 배웠다.
그것은 과거 온종일 본인의 무공에만 전념해있던 이벽에게 있어 하나하나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노동으로 가득 차 있었던가.
정작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해가 저문 후에서야 가까스로 이뤄질 수 있었다.
취침에 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이벽은 명상을 하거나 혹은 혁대웅, 제갈소미와의 비무를 반복했다.
퍽 충실한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하아.”
이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벽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서서히 초조함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진천으로부터 ‘비전’을 전수 받은 그날 이후, 내공에 대한 것은 여전히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것은 돌이켜보면 마치 몸속의 고장난 기혈을 억지로 찢어발겨서 길을 내는 듯한 경험이었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고통이 지나고 나자, 거짓말 같은 내공과 충만함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단 한 순간뿐이었다.
그날 이후, 이벽은 몇 번이고 다시 청강유엽공을 운기해 보았다.
기혈은 언제 상처를 입었냐는 듯 깨끗했고, 기운은 강처럼 도도하게 흘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에게는 단전이 없으므로, 기운은 흘러 흘러 밑 빠진 독처럼 몸 안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
마음 같아선 이진천을 붙잡고서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진천은 ‘지금 단계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검술 한 토막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그저 ‘네가 가지고 있는 검에 마음을 비추어보라’는 뜬구름 잡는 말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다시 종적이 묘연해졌다.
제갈소미에 의하면, 며칠씩 사라지는 것 정도는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순환, 그릇, 눈물의 의미.
이진천이 언급했던 말들을 하나하나씩 되새겨봤다. 그러나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좌우간 이벽은 하릴없이 청강검식을 반복해서 휘둘렀다.
이진천의 말마따나 언젠가는 선우세가의 검을 버려야 한다 해도, 지금 당장은 ‘가지고 있는 검’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오빠?”
“…하아.”
“벽이 오빠?”
물론, 무공을 익히는 데에 있어 한계에 부딪힌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막막함이라 할지라도 과거 이벽은 노력과 재능으로 넘어서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안개 속을 더듬는 듯한 막막함.
단전도 없이 내공을 되찾는 것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저기요!”
왕수련이 소리쳤다.
이벽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왕수련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나?”
“아니, 오빠 자꾸 한숨 쉬니까…….”
우물쭈물하는 왕수련.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삼킨다.
“…미안해요. 나 형편없죠?”
왕수련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니, 괜찮다. 급할 건 없어. 미안해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잘한다면 가르치는 의미도 없지.”
“그, 그렇죠? 아하하…….”
힘없이 웃는다.
그때, 저만치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문밖으로 몰려나갔다. 제갈소미에게서 글을 배우던 아이들이 수업을 마친 모양이다.
“저, 저도 가볼게요, 오빠!”
꾸벅, 왕수련이 고개를 숙였다.
거치대에 목검을 올려놓은 뒤, 잰걸음으로 황급히 아이들 무리에 섞인다.
“…….”
이벽은 대문을 나서는 왕수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련에게는 수련 나름대로 답답함이 있는 모양.
검에 대한 열의가 있음에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지금의 이벽과 입장이 다르지 않다.
슈욱, 탁!
그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이벽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간단히 낚아채었다. 끝이 날카로운 붓이었다.
“이건 무슨 의미지 사저?”
“의미는 무슨. 그런 거 없고 그냥 네가 다쳤으면 하는 마음에 집어 던진 거야.”
“…….”
“최소한 너도 수련이 반만큼은 아파야지. 그걸 또 잡아버리냐 눈치 없게.”
이벽은 시선을 돌렸다.
제갈소미의 눈매가 날카롭다. 때때로 그녀는 화를 내지만, 이벽으로선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좌우지간 이제는 비무를 통해 그녀의 비도술에도 익숙해졌으므로 이러한 기습에 쉬이 당하지는 않는다.
“끙, 앓느니 죽지.”
고개를 피해버리는 제갈소미.
“아하하, 수고했어, 벽아.”
그리고 혁대웅이 다가왔다. 사이를 중재하듯, 제갈소미와 이벽을 가로막고 섰다.
나란히 서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구이지만,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가 걸려있다.
“…….”
10전 5승 5패.
그것이 혁대웅과의 전적이었다.
혁대웅은 강했다. 내공이 없음에도 그 타고난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용력은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이벽이 우세를 점했으나, 비무를 반복할수록 혁대웅은 이벽의 청강검식에 대해 이해도를 넓혀가는 듯했다.
자연히 상대하는 입장에선 점점 더 까다로워졌다.
그것은 동 나이대의 누군가에게 밀려본 적이 없던 이벽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딱히 수고랄 건 없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이제부터 같이 수고하자!”
탁, 혁대웅의 커다란 손이 이벽의 어깨 위에 놓였다. 그리고 힘을 주어 떠밀기 시작했다.
질질질.
“…….”
“자자자~ 일하자~ 먹고살자~”
말마따나 노동의 시간이다.
이벽은 붓을 대충 내팽개쳤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인영 하나가 담벼락 바깥쪽에 기대어 서 있다가 화들짝 놀란다.
“벼, 벼, 벽이 오빠! 잠깐만요!”
왕수련이었다.
“응? 수련이? 뭐 놓고 갔니?”
“아, 아뇨. 대웅 오빠, 그게 아니라요. 저기, 그게…….”
“…….”
우물쭈물,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말을 흐리는 왕수련. 질끈 눈을 감으며 남은 말을 뱉는다.
“벽이 오빠! 있잖아요! 나랑 같이 마을 구경 하러 가지 않을래요?!”
“…뭐라고?”
“아니 그게! 벽이 오빠, 우리 마을 온 지도 벌써 열흘째인데! 아직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고!”
왕수련의 손이 필요 이상으로 허우적댔다. 좌우간 이벽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고로 이벽은 답했다.
“나는 지금 밭일을 해야 한다.”
따악!
그때, 이벽의 뒤통수에 충격이 가해졌다. 어느새 다가온 제갈소미가 기어코 붓으로 이벽을 내려찍은 것.
“수련이랑 놀다 와.”
“잡초를 뽑아야 한다.”
“됐으니까 놀다 와, 그냥.”
“하지만 감자도 캐야 한다.”
“놀다 오라고, 이 감자 대가리야.”
* * *
이벽과 함께 마을을 거닐며 왕수련은 쉴새 없이 재잘거렸다.
누구네 집과 누구네 논밭, 누구네 밤나무, 소와 닭, 키우는 개에 이르기까지.
이벽에게는 전부 똑같아 보이는 풍경들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모두 다른 이야깃거리인 듯했다.
그러나 이벽에게는 대꾸할 말이 마땅치 않다. 그러자 왕수련 역시 제풀에 지쳐 곧 조용해졌다.
“응? 왕씨네 첫째 아니냐?”
“앗, 할아버지들 안녕하세요!”
그때, 늙수구레한 목소리가 아는 체를 해왔다. 왕수련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이벽이 시선을 돌리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두 노인이 보였다.
“흘흘, 그래그래. 그리고 너는… 응? 누구네 집 아들이더라? 못 보던 애기인디?”
“거 왜, 얼마 전에 새로 데려온 이 문주네 셋째잖아. 벌써 노망이 났누?”
꾸벅.
이벽도 고개를 숙였다.
열흘 전, 이 마을에 갓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 노인이다.
“흘흘, 둘이서만 놀러 가니?”
“헤헤, 네!”
덥석, 왕수련이 기다렸다는 듯 이벽의 팔을 붙들었다. 의아하지만 이벽은 굳이 뿌리치지는 않았다.
“응? 가만있자. 그런데 그러면 촌장네 아들내미는? 왕씨 댁이랑 서로 시집, 장가보내기로 한 거 아니었남?”
“아, 아, 아녜욧!!”
빼액! 왕수련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벽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 자리를 벗어나며 이벽은 다시 노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촌장댁 아들…이라면.
이벽은 장석두를 생각했다.
이벽과의 비무에서 패배한 이후, 그 소년은 단 한 번도 낙검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속이 과했던 건가.
“헉, 헉…….”
그렇게 얼마만큼을 달렸을까.
노인들의 모습이 저만치 점이 되었을 무렵 왕수련은 자리에 멈춰 섰다. 허리를 숙이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나?”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오빠! 오해하지 마세요! 저 석두랑은 그냥 소꿉친구고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그렇군.”
“아니, 어른들은 맨날 그래요! 그냥, 마을 애들끼리 나이가 비슷하면 어떻게든 엮으려고……!”
한껏 달아오른 목소리.
그러나 이벽의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서서히 말끝이 흐려졌다.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전 그런 거 싫어요. 제가 혼인할 사람 정도는 제가 직접 고르고 싶어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저만치 앞에 마을의 울타리가 보이고 있었다. 규모가 작은 마을이므로 대강 한 바퀴를 다 돈 셈이다.
슬슬 돌아가서 일을 해야겠군.
이벽이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포, 폭포!!”
왕수련이 다급하게 외쳤다.
“오, 오빠! 폭포 좋아해요?!”
“…폭포?”
“좋아하죠?! 그쵸? 오빠는 무림인이니까! 폭포 같은 거 맞으면서 깨달음을 얻고 그러잖아요!”
덥석!
왕수련이 다시 팔을 붙들었다. 가쁜 숨을 고르면서도 어떻게든 이벽을 이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울타리를 벗어났다. 이내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개울가가 나타났다.
왕수련은 그대로 물줄기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탓, 탓,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발을 쉬지는 않았다.
“…….”
그 뒤를 따르며, 이벽은 왕수련의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대체 무엇이 이렇게까지 이 작은 아이를 열의에 차게 하는 걸까.
쏴아아아!
일다경쯤 산길을 올랐다.
문득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