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ed dungeon life RAW novel - Chapter (210)
적나라한 던전생활-210화(210/238)
외전 1편
“혹시 여유가 된다면 그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어서 오키나와를 빠져나가라고. 그 사람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왔을 뿐이잖아요. 도움만 받고 보답도 못했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어요.”
저 아래서 들려오는 치히로의 목소리.
나는 아직 무너져 내리지 않은 빌딩의 옥상에 서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키나와 각성 총국을 빠져나온 난, 순식간에 12 게이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과 수십 초.
그 짧은 시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조금 전까지 모니터를 통해 봤던 모습과 실제 현장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거대 사마귀 보스는 게이트와는 전혀 다른 장소를 배회하며 지면을 쿵 쿵 내리 찍고 있었고, 치히로와 그녀의 동료들은 지금 저 아래서 웬 싸구려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의 비극적인 여주인공께서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 능구렁이 같은 강정혁님의 안전까지 걱정해주고 계신다.
이거 참,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만 같다.
비웃자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다.
주위에서 공주 공주하고 떠 받들어지며 자라 사리 분간 못하는 철부지일 줄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오키나와라는 섬을… 아니, 오키나와라는 나라를 생각하는 인물이었다니.
게다가 가까운 동료들은 물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니.
어디 그 뿐인가?
누누이 설명해도 부족한 저 빼어난 외모.
가히 천사라고 해도 어울릴 법한, 완벽한 베드 엔딩 스토리의 여주인공이 따로 없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 한심한 놈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
문득, 오직 그녀를 따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스스로가 참으로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뭐, 이런 반성을 한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은 아닌 데다, 내일도 모래도 나는 똑같이 살아갈 생각이지만.
아무튼 그래도 기분이 좋다.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확실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와줘야 이쪽도 진심을 내고 싶어지지.
나는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씨익하고 미소 지으며, 지금 이 순간 확실히 그녀의 편에 서기로 마음 먹었다.
치히로의 움직임은 빤히 보였다.
보스를 유인해 다시 게이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그리 쉬워 보이진 않았다.
수백 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음에도 저 괴물 놈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마나의 기운은, 심지어 나조차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이제와 새삼스럽지만 권한이 4로 상승한 이후로 주변 마나의 파동에 무척 민감해졌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저 징그러운 괴물 놈을 실제로 본 순간 내 오감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위이이잉-
귀가 찢어질 듯한 놈의 날개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치히로.
놈은 그런 그녀를 향해 쏜살처럼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난 아주 오랜만에 왼 손에 착용 중이던 장갑을 벗어 던졌다.
길가메시의 안구.
그동안 이놈을 통해 축적해온 거대한 마나를 해방 시킬 최적의 스테이지가 지금 막 완성되었다.
* * *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그러나 실제론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농밀하게 이어진 치히로와의 관계를 통해 그녀와 링크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가진 능력은 대량의 마나를 소모해 주변 사물은 물론 생명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
몬스터는 물론 인간까지도 이 능력에 당하면 그 어떤 움직임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전신의 장기와 근육, 심지어는 뇌의 기능마저 완벽하게 정지 시켜 순간의 기억 마저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라도 여기에 당하면 시간이 멈췄었다고 밖에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스킬의 최대 적용 범위다.
그것은 목표로 하는 대상과의 거리가 될 수도, 동시에 적용 가능한 최대 객체 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아직은 나도 모른다.
여기까지 마나를 대량으로 소모해 실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왼 손에 저장해 두고 있었던 거대한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지금 막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도중이었던 드래곤 맨티스에 더해 놈들의 보스인 자이언트 드래곤 맨티스.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던 수 많은 각성자들.
움직임을 멈춘 생명들의 숫자를 전부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다.
백… 이백… 삼백… 천… 이천…
감각으로 어렴풋이 느껴지곤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다.
그야,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아직 끝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반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물의 움직임까지 완벽 통제 중이다.
치히로는 마나의 낭비를 막기 위해 이렇게 까지 활용 하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대놓고 마나를 낭비하고자 마음 먹은 나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때문에 시간이 경과할수록 저장해 두었던 마나가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하지만 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천천히 치히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시간이 완벽하게 멈춘 세계에 오직 그녀와 나만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대체…”
“안녕? 그건 나를 위한 작별 인사인가?”
치히로는 까무러치게 놀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은 그녀에게 최대한 멋있는 척을 해야 할 타이밍이니까.
“당신을 도와주러 왔어.”
“그, 그런…”
그녀는 아직 상황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아까운 마나가 쑴풍쑴풍 빠져나가고 있다니까?
“질문을 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때?”
“아아… 하지만 어떻게.”
나는 속으로는 마나가 아까워 울면서도 겉으로는 쿨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은 내 또 하나의 숨겨진 능력이야. 지금은 이 정도로만 답해두지.”
그녀는 지금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듯한 얼굴이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
나에게 홀딱 반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당신을 신뢰한다는 의미니까, 이 이야기는 비밀로 부탁해. 그게 누가 되었든.”
“……”
그녀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여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에?”
“정신 차리라고 이 아가씨야. 저거 안 보여?”
나는 손가락으로 거대 보스를 가리켰다.
이 곳이 천국이지 지옥인지 분간 못하는 그녀의 표정이 이제야 현실감을 되찾는다.
“아무리 나라도 이 상황을 오래 유지하는 것은 힘들어. 그러니까 슬슬 마무리 짖는 것이 어때? 이 능력은 원래 당신 거니까 잘 알잖아. 내가 마무리까지 하기에는 더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는 걸.”
그녀의 능력에 약점이 있다면 이 부분이었다.
통제 중인 대상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경우 평소보다 몇 배, 어쩌면 열 배 이상의 마나가 추가로 필요했다.
“제가 마무리를?”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린 치히로는 금세 표정을 다잡았다.
망설임은 찰나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저 괴물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오키나와는 말 그대로 끝장이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덧 오키나와를 수호하는 최고 책임자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하압!”
그녀는 얼마 안되는 남아있던 마나를 쥐어 짜내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드래곤 맨티스들의 약점 부위를 향해 마력을 가득 머금은 애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너무나 쉽게 그녀의 검이 놈의 살을 깊게 파고 들었다.
뿌지직!
검을 비틀어 손상을 넓혀 간다.
푸욱!
다시 검을 뽑아 들고, 또 다른 위치로 이동해 검을 재차 찔러 넣는다.
보스의 크기가 워낙 거대한 탓에 이런 데미지가 과연 소용이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모양이었지만 단 한 시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꼭 해 내야만 한다는 그녀의 의지가 내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다는 듯이.
“하아… 하아… 후우… 후…”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다.
주변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탓에 오직 그녀의 호흡 소리와 심장 소리만이 아주 선명하게 내 귓가를 파고 들었다.
“하아, 하아… 이제… 마나가…”
마나를 모두 소진한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연신 몰아 쉬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몽롱한 표정으로 내 앞에 겨우 서 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아직 부족해… 게이트 안에는… 더 많은… 괴물이…”
그녀는 아직도 걱정 투성이인 모양이었다.
지쳤으면 이제 내 어깨에 기대도 좋으련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안심 시키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그만 쉬도록 하지.”
“하지만… 당신 혼자서… 저 많은 수를… 아직… 보스도 끝장내지 못했는데…”
나는 그저 미소를 보였다.
이 여자는 나의 대단함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니까, 이제 여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아니, 여긴 좀 위험하겠다.”
나는 쓰러지기 직전인 그녀를 안고 가볍게 도약했다.
조금 떨어진 빌딩 옥상에 살포시 그녀를 내려 두었다.
“그럼 다녀오지.”
“……”
나는 이 말만 남기고 빌딩 아래로 다시 뛰어 내렸다.
내가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봐 줬으면 했지만 지금 그녀의 몸 상태로는 무리인 것 같았다.
뭐 어때.
연출은 이만하면 충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다.
“자, 이제 사냥을 시작해 볼까?”
나는 가장 먼저 저 커다랗고 징그러운 보스 녀석의 숨통부터 끊어 놓기로 했다.
스르릉!
내가 쥔 검이 딱 한번 휘둘러 졌다.
그와 동시 거대 보스의 대가리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놈의 육중한 육체로부터.
그리고 사방으로 놈의 두터운 비늘 파편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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