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hak RAW novel - Chapter 1
1부
Prologue
별 기대도 없이 간 학교였다.
병환이 깊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기 위해 찾은 한국이었고, 길어야 6개월 남짓 다닐 곳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아버지는 굳이 지역의 명문 사립고에 그를 집어넣었다.
기대가 없는 건 그의 담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전후 사정을 듣고는 하마처럼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몇 가지 서류를 체크한 후 “그러냐”고 짧게 말한 게 끝이었다. 명문 사립고인데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잘도 붙어 있구나 싶게 정이 안 가는 선생이었다. 어차피 정붙일 마음도 없었지만.
“운동했냐? 거기는, 거, 운동도 많이 시키지?”
“예.”
대충 대꾸하자마자 창밖이 번쩍 빛났다. 몇 초 후, 요란한 빗소리를 뚫고 천둥이 울렸다.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 오는 날의 복도는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거미줄처럼 기분 나쁘게 들러붙었다.
드르륵, 역사 깊은 명문 사립답게 닳아빠진 미닫이문이 내는 소리조차 따분하게 들렸다.
‘첫날부터 완전 꽝이네.’
심드렁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수 개의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고 그에게로 쏟아졌다. 교탁으로 이동하는 동안 들려오는 낮은 탄성은 덤이었다. 익숙한 반응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기에 쓸 신경이 없다는 게 더 맞으려나.
교실 구석 맨 뒷자리,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는 여자애한테 정신이 팔려서.
‘빛?’
그럴 리 없는데, 그 여자애 머리 위로만 따로 조명을 켜 둔 것처럼 환했다. 뒤늦게 유난히 뽀얀 피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희고 보드라운 빛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뭘 저렇게 보고 있지?’
따라서 시선을 돌린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잠깐 복도를 걸어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찬 빗줄기는 잦아든 상태였다. 그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찬란한 빛 한 줄기를 발견했다.
굵은 붓으로 마구 덧그려 놓은 듯한 먹구름, 어둠을 관통하는 빛, 예사롭지 않은 두근거림.
막연히 예감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벼락같이 내리꽂힌 네 첫 모습을.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무시한 채 천천히 교실을 둘러보며 어떻게 하면 첫인상을 좋게 남길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눈매를 곱게 접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감을 사는 외모가 가장 매력적이게 보이도록 계산한 행동이었다.
“안녕, 정해준이야. 잘 지내보자.”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아래쪽으로 이동한 무게 중심에 당황했다.
미친 새끼.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는 아래에 대고 욕설을 삼키며 담임이 가리킨 자리로 향했다. 운명처럼 여자애의 옆자리였다. 사과를 연상케 하는 달콤한 체향에 내달리듯 가슴이 뛰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의자에 앉은 후엔 뭘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필기구를 꺼내놓았다.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혹시나 단단해진 중심을 들킬까 봐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있었으니까.
***
때 이른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등굣길에 흠뻑 젖은 양말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꿉꿉한 기분에 잠겨 어둑어둑한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비가 잦아든 사이 두꺼운 먹구름을 뚫고 한 줄기 빛이 선연하게 허공을 관통했다. 경이로운 눈으로 빛줄기를 보다가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시선을 돌렸다.
“자, 자. 집중, 집중!”
조례는 건너뛰기 일쑤인 담임이 교편을 요란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 옆에 처음 보는 남학생이 서 있었다. 담임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이목이 집중됐다. 우중충하던 교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확 밝아졌다. 먹구름을 꿰뚫고 존재를 과시하는 빛줄기처럼, 새로운 인물은 강렬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린 듯이 시원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분명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낯이었는데, 입매를 슬쩍 당긴 순간 부드럽게 바뀐 인상의 간극에 놀랐다. 나도 모르게 꼼꼼하게 뜯어보고 있던 걸 자각하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자꾸 눈길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전학생이다. 자, 소개해라.”
담임의 말에 일순 교실이 조용해졌다. 기대 섞인 적막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째서 내가 긴장한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전학생이 싱긋이 웃으며 제 소개를 했다.
“안녕, 정해준이야. 잘 지내보자.”
듣기 좋은 저음에 몇몇이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목소리 하나로 미소년 같던 첫인상이 한순간에 성숙하게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전학생을 찬찬히 살폈다. 뒤늦게 직각을 이루며 떡 벌어진 어깨와 굵은 목울대, 탄탄한 팔 근육들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했나?’
농구 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져 당황한 찰나, 담임이 내 옆자리를 지목하자 누군가가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내며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저기, 빈자리 가서 앉아라. 맨 뒤.”
“네.”
문득 눈이 마주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정해준은 부드럽게 웃어 준 것 같았는데……. 못난 대응에 당황해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무는 사이, 정해준이 옆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분명 거침없는 걸음이었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느릿 재생됐다.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비현실적인 감각에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정해준은 자리에 앉아 필기구와 노트를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그러곤 담임이 조례를 마치자마자 엎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에 맞춰 흉곽이 부풀었다 가라앉을 때마다 산이 들썩이는 것처럼 등허리가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그 모양이 꼭 나른한 맹수 같다고 생각하며 남모르게 조심히 호흡을 다스렸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은 건 오랜만이어서 그런 거라고, 나름의 이유를 붙이며 교과서에 밑줄을 쳐 나갔다.
반 아이들의 호기심을 뒤로하고 전학생은 3교시를 내리 잤다. 수면욕과 식욕이 절정인 십 대였다. 아무리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누군가는 주야장천 엎어져 자는 건 고등학교 교실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문제는 그게 내 옆자리라는 점이었다. 세상모르고 자는 건 정해준인데 선생들의 눈치를 감당해야 하는 건 내 몫이었으니까.
죽은 건 아닌가 싶어 중간중간 확인하긴 했지만, 접힌 팔꿈치 사이로 보이는 얼굴 혈색이 멀쩡했다. 어차피 수학 시간에는 정해준도 일어나야 했다. 자신의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건 본인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하는 수학 선생이 그냥 넘어갈 리 없으니까. 흉흉해질 수업 분위기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정해준을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일어나.”
손끝에 닿은 정해준의 어깨가 단단했다. 무심코 도드라진 어깨뼈를 문질렀다가 실례라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만한 일이 아닌데, 제 발 저린 기분으로, 한편으론 가슴이 다시 두근거려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여전히 엎드린 채 정해준이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가까이서 마주한 얼굴은 보다 눈길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게 뻗은 눈초리가 의외로 날카로웠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찔리게 만드는 눈매를 하고서 정해준이 싱긋 웃어 보였다. 다시 확 달라진 인상에 꼭 홀린 기분으로 이제껏 그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얼른 떼고 중얼거렸다.
“수학은 자는 거 안 봐줘.”
“왜 나 더듬어?”
“……뭐?”
“너, 나 만졌잖아.”
조금 전 어깨뼈 문지른 걸 말하는 건가. 물론 허락 없이 남의 몸을 만진 건 잘못이지만, 다른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었는데. 파렴치한 취급에 당황하는 사이, 정해준이 놀리듯이 덧붙였다.
“슬쩍슬쩍 얼굴도 훔쳐보고.”
“……그건…….”
하도 자서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던 거였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혼자 생각할 때는 그럴듯했는데, 막상 입 밖에 내려니 스스로 듣기에도 빈약한 핑계 같았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머뭇거리는 틈을 타 허리를 곧게 세운 정해준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흐흣……!”
짓눌린 신음 소리가 야릇하게 들렸다. 그게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서넛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누가 우리 얘기를 듣지는 않았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시답잖은 대화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없는 듯했다. 겨우 진정하고 다시 책에 눈을 박았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