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hak RAW novel - Chapter 12
12화
무심코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자 급하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떨어졌다.
“아…….”
내가 무슨 짓을. 당황해 벗어나려 하자 어깨를 감싼 팔이 단단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목이 졸린 건 아닌데도 덩달아 호흡이 가빠졌다. 무얼 망설이는 걸까. 닿을 듯 다가온 옆얼굴에 긴장했다. 마침내 정해준이 얕은 한숨을 토해 내며 나를 꽉 그러안을 때까지.
“이대로 잡아가고 싶다.”
정말 그래 줬으면.
어디든 멀리 도망가고 싶은 건 입시에 묶여 답답한 수험생활 때문일까, 무겁고 어렵기만 한 집안 분위기 때문일까. 여태까지 잘 버텨 왔는데 부쩍 버겁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대입을 앞둔 부담감이 상당하겠지 싶다.
과외를 시켜 달라고 했다가 크게 혼났을 때 이소원은 무척 고소해했다. 한술 더 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평소 화날 때마다 쏟아붓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이 상처받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
‘너, 그런데 진짜 주제 파악 못 한다. 네가 지금 대학 갈 처지야?’
그건 무슨 의미일까. 엄마는 나를 대학에 보내 줄 생각이 없으신 걸까. 학부모 면담 때 분명 담임에게 목표 대학이랑 학과를 들었을 텐데 아무 말도 없었던 걸 보면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냥, 그냥 무관심한 거면 어쩌지? 막상 원서 낼 때 돼서 모르는 척하면? 나를 제대로 봐 주지 않는 엄마의 방관을 떠올리며 불안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입술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어? 아…….”
“다 왔다. 들어가자.”
“응, 오늘은 내가 살게.”
얼마 전 외삼촌에게 받은 용돈이 있었다. 저와 똑같은 액수를 보고 이소원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싫은 티를 냈지만, 기역 자로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드렸다가 돈 밝히는 게 꼭 제 아비를 닮았다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눈총이 쏘아졌지만, 그저 감사하게 받았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 내 공부를 도와주면서 정해준이 사 주는 음료나 디저트가 부담스러운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계산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케이크와 쿠키를 고르더니 휘적휘적 계산대로 걸어가 멋대로 마실 음료까지 주문해 버린 정해준 때문이었다.
“내가 산다니까 왜……!”
“내가 사 주고 싶어서.”
어차피 맨날 똑같은 것만 먹지 않느냐며, 그러게 얼른 주문하지 그랬냐고 짓궂게 놀리는 정해준을 향해 곱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안 먹어.”
“삐지니까 진짜 귀엽다.”
“말 돌리지 말고.”
“너야말로 좋아하는 여자 지갑 열게 만드는 못난 새끼 만들지 마.”
“……그래도 내가 도움받는 건데.”
“나도 너 알려 주면서 공부 많이 해. 오히려 도움받는 건 나라고.”
그런가? 아닐 것 같지만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으니 심증으로 끝났다. 하여튼 뭔 말을 못 하게 해. 반박하기도 어렵게. 근데 그게 또 다정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울었다. 조금씩, 조금씩, 침몰에 직면한 배의 돛처럼.
“아, 해.”
내 입에 빨대를 물려 준 정해준의 눈이 이번엔 접시 위의 쿠키와 케이크로 향했다. 뭘 먼저 먹일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 아기 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내가 아기 새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주고도 부족해하며 또 다른 먹잇감을 사냥하러 떠나는 어미 새와 정해준의 모습이 똑 닮아서.
‘어미가 아니라 아빠 새인가?’
어느 쪽이 더 맞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내밀어진 포크를 손에 쥐었다. 첫 한 입을 달게 삼키고 나서야 지켜보던 정해준의 눈매가 비로소 흡족하게 휘어졌다.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공부는 체력인 거 몰라? 든든히 먹어 둬야 집중도 잘하지. 성적이 괜히 제자리인 게 아니라고.”
과연 일리 있는 말인가 따지기 전에 성적이 제자리란 말에 지레 놀라 얼른 다음 술을 떴다. 옳지, 아기를 어르듯 추어올린 정해준이 쿠키까지 내밀었다.
반쯤 먹어 치우고 나서야 나란히 문제집을 폈다. 혼자서 해설지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애매모호하게 꼬여 있던 문제가 탁탁 풀리는 게 신기했다.
“외국 애들은 수학 잘 못 한다던데.”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에 피식 웃은 정해준이 말도 말라며 의자에 늘어져 지친 시늉을 했다.
“나 거기서 과외 엄청 받았어. 혹시 한국에 들어올 경우라도 생기면 뒤처질까 봐.”
“그랬구나…….”
“결과적으론 잘됐지. 너랑 이렇게 있을 수 있고.”
뒤에 말은 못 들은 척하며 책을 팠다. 목표한 분량을 모두 훑고 나왔을 때는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저녁 먹고 들어가지 않을래?”
“다음에. 쿠키랑 케이크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그래, 그러자.”
부담스럽지 않게, 한발 물러서 준 정해준이 고마웠다. 벌써 몇 번째 거절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저녁을 먹고 들어갔다가 누구랑 있었냐느니, 공부한다더니 어디서 딴짓하고 돌아다니냐느니, 괜한 추궁을 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럴 정도의 관심이 내게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이소원이 귀찮게 할 건 뻔했다. 최대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어차피 이제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음 달에 특강 있는데 같이 들을래?”
“어려울 것 같아.”
습관처럼 고개를 젓다가 거절이 익숙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문득 신경이 쓰였다. 나중엔 나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까 봐. 그런 게 아닌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뿐인데.
“다음에!”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빽 외치고 나니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지나가던 사람 두엇이 쳐다봐서 당황하기도 했고. 의외라는 듯 해원아, 부드럽게 부른 정해준이 가만히 나를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그 모습에 입을 열 용기가 생겼다.
“하자고.”
“…….”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왜 대답이 없지? 조마조마한 감정을 억누르며 시선을 들기 무섭게 너른 품에 시야가 가려졌다. 정수리로 더운 숨이 훅 쏟아졌다. 동시에 두근대는 가슴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덩달아 설레게 하는 두근거림이었다.
“넌 진짜…….”
매끄럽기만 하던 정해준의 음성 끝이 갈라졌다. 잠긴 것도 같았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정해준이 품 안을 조이며 속삭였다.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나보고 어쩌라고.”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
수능이 코앞으로 가까워져서도 이소원은 배려가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워 있는데도 아무 때나 불쑥 들어와 저 궁금한 걸 물었다. 대답해 주지 않으면 난리를 피울까 봐 억지로 응했다. 늦은 밤에 소란이 일면 잠에서 깬 어른들이 무슨 일인지 물을 테니까.
할머니나 엄마 앞에서 내 입으로 정해준의 이름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입 밖으로 낸 순간 정해준과 함께했던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퇴색될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고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이, 오물이 뿌려진 것처럼 더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애써 지키는 게 맞지 않나. 나름 성의껏 응하면 이소원의 무례도 많이 길어지진 않았으니까.
“아 씹, 존나 간지 나. 죽을 것 같다고! 걔 차고 있는 시계 봤어? 그거 개비싼 건데. 제일 싼 게 억대라고. 존나, 아…….”
오늘은 정해준이 차고 있는 시계가 화제였다. 이소원 덕분에 요즘 유행하는 운동화나 가방 브랜드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등골 브레이커라고 불리는 유행 아이템 대부분을 정해준이 갖고 있다는 것도. 매일 조금씩 패션에 변화를 준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줄은 미처 몰랐다.
한편으론 나한테 패악을 떨 때와 사뭇 다른 모습에 이소원도 평범한 고등학생이구나 싶어 신기했다. 우리가 자매로 엮이지 않았다면, 이소원도 그렇게 악을 쓸 일은 없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만 봐도 딱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그 또래 모습 그대로니까.
“봐, 존나 잘 찍혔지?”
아이돌 누구와 비교하며 실컷 정해준의 외모를 찬양하던 이소원이 이번엔 사진을 내밀었다.
“사복도 개 잘 입어.”
‘개’와 ‘존나’가 들어가지 않으면 입을 뗄 수 없는 걸까. 궁금해하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아이돌처럼 누군가 멀리서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난 주말에 나랑 만날 때 입고 있던 코트와 후드 티 그대로였으니까.
다행히 나와 공부했던 곳 근처는 아니었다. 훤한 주변이나 거리의 모습이 아마 나를 만나기 위해 막 집에서 출발한 듯했다.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에 내가 같이 찍혔거나, 혹 둘이 함께 있는 목격담을 들었다면 지금쯤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잠복이라도 할까 봐. 이 길 자주 지나는 것 같던데.”
사진 속 정해준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중히 쓸며 이소원이 혼잣말했다. 다행이다. 속으로 한숨 돌렸다. 마침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위해 수능까지는 컨디션도 조절할 겸 각자 공부에 전념하자고 약속한 상태였다.
요즈음 이소원은 열병을 앓는 소녀 같았다. 가뜩이나 변덕스러운 성격이 정해준 얘기만 나오면 오락가락했다. 보통 땐 나와 말도 섞기 싫어하면서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한밤중에 내 방을 찾은 것만 봐도 그랬다. 친구들과 종일 정해준에 대해 떠드는 것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