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hak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얼른 먹어. 불겠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건 손도 안 대고 내 반찬 그릇을 먹기 좋게 일렬로 놓아준다. 질세라 나도 정해준의 반찬 그릇들을 예쁘게 정리하려 손을 뻗었는데 바로 제지당했다.
“공주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순간 누가 들었을까 봐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밖에선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으면서! 식당이 워낙 소란스러워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지만,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살짝 째려보자 얄밉게도 빙글거린다.
“그러게 그런 소리 안 나오게 조심했어야지.”
이젠 아예 내 탓으로 돌리기까지? 밉지 않게 흘겨보고 졌다는 뜻으로 얼른 한 젓가락을 먹었다. 그 모양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해준도 그제야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식사 습관이 깔끔한 정해준은 무언가를 먹을 때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연히 나도 음식에 집중하게 됐다. 주변의 소음, 특히 김웅진 일행의 수다가 선명하게 귀에 꽂힌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와, 씨발. 무슨 시계가 억씩이나 해?”
휴대전화로 시계 가격을 검색한 듯 저들끼리 돌려보다가 그중 하나가 인생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차가 더 부럽더라. 의대 다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알아주는 금수저라던데. 아, 난 언제 파나메라 한 번 몰아보나.”
이소원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어 대던 브랜드들이라 이쯤에서 정해준 얘기인 걸 눈치챘다. 나만 들은 거였음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해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무어라도 화제를 찾으려 애썼지만, 막상 입을 떼려 하니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원 존나 복 받았네. 남자 하나 잘 물어서.”
“야야, 결혼까지 하면 몰라도. 지금은 그냥 이거 아니야?”
‘이거’가 무슨 뜻인지는 뻔했다. 손바닥을 맞비벼 음란한 흉내를 내며 키들키들 쪼개는 소리에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릇 안을 성의 없이 젓자 가느다란 애호박이 젓가락 끝에 애처롭게 걸렸다가 떨어졌다.
“그거, 다 과시욕이야. 겉멋만 잔뜩 들어선.”
김웅진이 한심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보니까 디자인도 별거 없던데? 그저 비싸니까 뭣도 모르고 명품입네, 차고 다니는 거지.”
꼭 타이르는 모양새였는데 자존심도 없는지 나머지가 잘도 수긍했다.
“하긴 시계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그런 건 교칙으로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위화감 조성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는 언제 스포츠카 타 보냐며 한탄했던 선배였다. 교칙으로 금지라니, 누가 들어도 유치한 발언에 정해준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나는 뒤늦게 정해준을 의식했다. 저렇게 주변 시선은 아랑곳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데 못 듣는 게 이상하긴 하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지, 저런 치들이 같은 과 선배인 게 창피할 정도였다.
“그냥 나가자.”
“그래.”
반도 넘게 남았지만 정해준은 순순히 일어나 주었다. 평소라면 너무 적게 먹는 거 아니냐며 잔소리했을 텐데. 고마운 마음에 얼른 따라 일어섰지만 난관이 있었다. 식판 반납대까지 가려면 김웅진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지나야 했으므로.
훤칠한 인영이 가까이 다가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김웅진 일행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남다른 체격 탓에 정해준의 존재감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김웅진 무리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팽팽한 긴장감 사이를 걸었다. 성큼성큼 앞장서는 정해준의 등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하지만 정해준이 거리낌 없이 김웅진의 정수리를 내리쳤을 땐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
악 소리도 못 지르고 머리를 감싸 안은 김웅진을 내려다보며 정해준이 무미건조하게 사과했다. 시계가 부딪친 듯 식판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위화감 조성한 것도 사과할게.”
선선한 태도로 사과하는데도 어쩐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김웅진 무리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정정하자. 뭣도 모르고 명품이라 산 게 아니라 맘에 들어서 사고 나니 명품인 걸 어떡해. 내가 안목이 좀 좋아서.”
머리를 감싼 손을 슬금슬금 움직여 문지르던 김웅진이 문득 정해준을 노려봤다. 대차게 쏘아붙일 것처럼 실룩이던 입술이 뱉어 낸 말이란 고작 이런 거였다.
“근데 이 새끼가 꼬박꼬박 반말이네?”
“남의 여자 흘끔흘끔 훔쳐보는 새끼한테 선배 대접해 줄 마음 없는데.”
“이게 진짜!”
벌떡 일어나려던 김웅진이 정해준이 들고 있던 식판에 이마를 부딪치곤 찰랑이는 국수 그릇에 지레 겁먹고 주저앉았다. 누가 봐도 우스운 꼴에 김웅진 옆에 있던 선배의 어깨가 웃음을 참느라 심하게 들썩거렸다.
진동하듯 달달 떨리는 선배의 상체와 자존심이 상해 시커멓게 죽은 김웅진의 낯빛에 정해준은 같잖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했던 말을 자근자근 되씹어 돌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원 꽉 물고 안 놔 주는 거니까 복 받은 놈 서운하게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제 할 말을 마치고 유유히 자리를 뜨는 정해준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도중에 김웅진과 눈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했다. 여전히 끈적끈적한 시선이 달라붙는 것만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여러 가지 음식이 뒤섞여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갑자기 역하게 느껴졌다. 숨을 꾹 참으며 습도 높은 식당을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밝은 밖으로 나와서야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슬쩍 정해준의 표정을 살피니 줄곧 넘치던 여유가 지워져 있었다. 역시 화났겠지. 별 어중이떠중이들이랑 얽혀서. 그 또한 내 탓 같아서 명치에 돌덩이가 얹힌 기분으로 살며시 새끼손가락을 정해준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대로 가볍게 손을 흔들기 전에 강한 손아귀에 덥석 붙잡혔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이를 악문 정해준이 속엣것을 쏟아 냈다.
“나 전과할까 봐.”
“뭐?”
“불안해서 안 되겠어. 저런 새끼들이 우글거리는데 나보고 그냥 두고만 보라고?”
“그래서 우리 과로 전과한다고? 의대에서?”
“생물학과가 뭐 어때서. 우리 엄마도 생물학 전공하셨는데?”
“음…….”
엄마까지 들고나오니 뭐라 반박하기가 어려워 마른침만 삼켰다. 그래도 나 때문에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따지려 해도 ‘이해원 찬양론’을 펼칠 게 뻔하기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겨우 정해준이 혹할 만한 답을 찾아냈다.
“난 의대생 남친이 좋은데.”
하!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카락을 쓱 훑어 넘긴 정해준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진심이야. 네 소개할 때 좀 으쓱하던걸?”
“과시욕 같은 거 없잖아, 너. 검소하고 엄격한 가풍에서 자란 이해원 씨. 음?”
“그래도 너는 자랑하고 싶어…….”
순수한 본심이었다. 이렇게나 대단한 남자라서, 그런 남자에게 사랑받는 게 나라서, 조금은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얘기는 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귀까지 빨갛게 물든 정해준을 보기 전까지는.
“왜…….”
“너 때문이야. 네가 너무 귀여운 소릴 하니까.”
귀여워 보이려고 의도한 게 아닌데. 진심이라고 말하면 정해준의 얼굴이 그야말로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단과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탓에 꼭 끌려오는 모양새로 쫓아오며 실실 쪼개던 정해준이 이내 바짝 따라붙어 잡혔던 손을 슬며시 풀고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도 그래.”
“응? 뭐가?”
은근한 속삭임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마에 이해원 남친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고 싶어. 아니다. 아예 녹음해 놓고 확성기로 틀면서 돌아다닐까 봐. 그냥 대자보를 붙일까? 이해원 내 여자니까 눈독 들이지 말라고?”
“말도 안 돼.”
어디서 엉뚱한 생각이 샘솟는지. 아프지 않게 옆구리를 쿡 찌르고 단과대로 이어진 언덕을 올랐다. 봄의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꼭 우리 둘을 반기는 것처럼.
***
아침부터 이소원과 마주쳤다. 재수학원에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게으름 피우는 게 눈에 보였다. 새벽부터 학원에 가도 모자랄 마당에 잠이 덕지덕지 붙어선 눈곱도 떨어지지 않은 얼굴이라니. 내 한심한 눈빛을 읽은 이소원이 바락바락 소릴 질러 댔다.
“야! 너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 나 어제 밤새워서 공부했거든?”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네 성적이 증명할 테니까.”
“뭐, 뭐? 야! 너 이제 대학생 됐다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래, 두고 봐! 너 보란 듯이 의대 갈 테니까 두고 보라고!”
너무 냉정하게 말했나. 그냥 평소처럼 무시하면 될 것을. 발광하는 이소원을 보며 뒤늦게 후회했다. 찝찝한 기분으로 집을 나서니 바람이 봄을 시샘하듯이 맹렬하게 불어왔다. 괜히 꽃샘추위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해준마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2학년으로 올라와서 해부학이니, 조직학이니, 부쩍 늘어난 암기량 때문인 듯했다. 정해준처럼 머리 좋은 애도 끙끙댈 때가 있다니, 신기해하며 책에 코를 박았다. 막 범인의 트릭이 밝혀지는 부분이라 집중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