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hak RAW novel - Chapter 73
73화
그건 아닌데. 거짓말도 하네, 싶어서 살짝 흘겨보자 정해준이 뻔뻔스런 눈길로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 해. 사위니, 결혼이니.”
“그게 왜 이상한 소리야. 난 진심인데.”
순간 정해준 어머님의 단호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굳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그냥 들고 온 작은 꽃 화분을 유골함 앞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오늘은 대변인이 되기로 작정한 건지 정해준이 나 대신 줄줄 얘기를 쏟아 냈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님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모른다고 해원이가 한참 고민했습니다. 해원이가 그런 면이 있어요. 딸이 고른 꽃이면 길 가다 민들레를 꺾어다 드려도 좋은 게 당연히 아버지 마음일 텐데. 안 그렇습니까.”
고마워. 이번에도 말하는 대신 괜히 정해준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아빠 앞이라 그런지 손을 완전히 겹쳐 쥐는 건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 봤자 정해준의 큼지막한 손에 덥석 잡혀 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엔 네가 인사드릴 차례라는 듯 정해준이 부드럽게 고갯짓했다. 따스한 손의 온기에 힘입어 겨우 사진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빠.”
너무 오랜만에 불러봐서, 내 목소리인데도 영 어색하게만 들렸다. 그래도 재차 불렀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거리면서.
“아빠, 아, 빠. 아빠…… 아빠.”
미안, 미안해요.
채 입 밖에 내지 못한 죄책감이 와아아, 눈물이 되어 터졌다. 오랫동안 찾아오지 못해서, 나마저 당신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해서, 당신께 향하는 무수한 그리움을 부정해서, 그런 못난 딸이어서.
끝내 무너지고만 나를 받아 안은 정해준이 말없이 어깨를 다독였다. 쉬이 그치지 않는 눈물,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떨림이 네 안에서 멎기까지는 한참이었다.
겨우 진정했을 땐 납골당 안으로 길게 고개를 들이민 오후의 햇볕이 바깥으로 길처럼 그림자를 내고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는 듯이. 가슴의 응어리가 얼마간 녹은 느낌으로 정해준과 나란히 아빠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기분 탓일까. 사진 속의 아빠가 살며시 미소를 띠고 계시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자, 정해준도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 인물의 표정이 변하다니,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진지하게 동의해 주니 아빠의 미소가 더 짙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자.”
“응.”
아빠가 지켜보고 있다 해도 이제는 정해준의 손을 잡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꼬옥 깍지를 끼고 천천히 걸어 나오며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다음에는 우리 사진도 같이 갖다 놓자거나 하는 것들.
어느 순간부터는 정적이 깔린 너른 잔디를 천천히 걸으며 고요한 정취를 감상했다. 볕이 잘 드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따스한 빛에 감싸여 아빠가 영 춥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더 위로받는 느낌에 살짝 글썽인 것도 잠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 굳어졌다.
“…….”
딱딱한 반응에 정해준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쳐다보니 시선을 느낀 엄마, 아니, 이젠 남보다도 못한 새엄마가 우리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오물을 삼킨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피하고 싶어 재게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다시 납골당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몰염치한 여자. 여기가 어디라고……!
나도 모르게 그 앞으로 몸이 나아갔다. 해원아, 나직하게 부르며 붙잡는 정해준의 팔도 뿌리치고 성큼성큼 다가가 납골당으로 가는 길목을 막아섰다. 초점 없이 올려다보는 두 눈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허망함.
한때는 빛을 잃은 두 눈이 안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사랑하면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는 거라고. 순전히 오판이었다. 당신이 저지른 짓 따위, 사랑일 리 없는데.
“여긴 왜 왔어요?”
김성희 씨.
이름을 불리자 흐렸던 두 눈이 잠시 명료해지는 것도 같았다. 켕기는 게 있으니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모로 꼬아진 그녀의 고개에 울화가 깊어졌다. 어쩌면 지난 시간 내내 이처럼 나를 외면했던 건 단순한 무관심과 회피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작 마주하기 두려운 건 따로 있었을 테니.
양심, 진실로부터의 도피.
“무슨 염치로 왔냐고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뱉는 목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알았잖아요. 아빠, 우리 아빠 나쁜 사람이라고, 정말 당신 가정 망가뜨린 사람이라고 내 아빠 미워하도록 그냥 뒀잖아!”
창자를 끄집어내듯 악을 쏟아 내느라 마지막엔 거의 숨이 끊어질 듯 호흡이 차올랐다. 학, 몰아쉬다가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내가, 아무 잘못 없는 우리 아빠를 미워했다. 아주 오래도록.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기를 미워하게 만든 당신을, 우리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아?”
이소원은 어려서 몰랐다고, 어른들이 하는 말만 곧이곧대로 듣고 그랬다고 쳐도 이 여자는 그러면 안 됐다. 당사자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았으면서, 어린아이가 속앓이하는 걸 뻔히 두고 보면서 모른 척 외면해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신 우리 아빠 보러올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 그럴 자격 없어.”
걸음을 돌릴 때까지 지키고 서 있을 각오로 벌린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뒤에 버티고 서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정해준이 한 발 나서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꽁무니를 뒤로 뺐으니까.
고작, 고작 한 발 나선 것만으로.
이렇게나 비겁한 여자였구나. 아무리 정해준의 골격이 건장하다 해도 위협하는 등의 별다른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닌데. 쓴웃음이 나왔다. 정해준이 전면으로 나서자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한심한 모습에 쓴웃음마저 지워졌지만.
“아버님, 더 좋은 곳에 모시려 합니다.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해원이 말대로 다시 찾을 생각 말고.”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듣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옮기고 싶어졌다. 한편으론 세심하게 신경 써 준 정해준에게 새삼 고마움이 일었다.
“고마워.”
새엄마가 완전히 자리를 뜨고 난 후, 겨우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고맙다는 말 말곤 표현할 방법이 없어 애석했다. 그 마음조차도 읽어 낸 정해준이 도리어 날 타일렀다.
“네 부모님이면 이제 내 부모님도 되니까.”
말만이라도 고마운데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서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마냥 든든해 하다가 들키지 않도록 입 안의 혀를 지그시 씹었다. 이렇게나 과분한 현실이 꿈이 아닐 리 없다고 확신하며.
불안과 망설임을 동반한 비밀스러운 저작은 통증으로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들어 자주 씹는 바람에 부풀어 오른 혀 한 귀퉁이가 먹먹하다.
그래도 좋았다. 아픈 만큼 생생한 현실이어서. 늘 쓰기만 한 줄 알았던 내 몫이 이토록 달아서.
***
낮 동안 빈집에 혼자 남아 있게 된 건 오랜만이었다.
정해준과 합치기 위해 짐을 싸 둔 박스 세 개가 현관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청소도 말끔하게 해 놓아서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정돈된 모습인데 텅 빈 공간 때문인가 오히려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박스 세 개.
옷가지와 화장품,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전부인 조촐한 짐. 승아의 옷과 장난감을 빼고 나니 정작 내 물건은 몇 개 없었다.
눈에 보이는 빈자리에 승아가 내 삶을 채웠던 시간들을 실감한다. 한때는 버겁기만 했던 어린 승아가 또 한편으론 고통을 버티게 해 주는 삶의 축이었다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승아의 물건이 있던 자리가 단순히 빈 공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마치 살덩이를 뚝 떼어간 것처럼 상실감이 일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눈을 깜박이는 내게 정해준이 다가와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어미 개의 보살핌이 필요한 젖먹이 강아지처럼 그 온기에 온전히 나를 내맡겼다. 꾹 감은 두 눈으로 끝내 뜨거운 것이 흐르는 건 막지 못했지만, 정해준의 다정한 손길은 충분히 마음을 어루만졌다.
“너무 허전해. 왜 더 잘해 주지 못했나 싶고. 엄마는 아니어도 어른이었는데, 똑같이 애처럼 굴 때도 많았어.”
후회는 이른 법이 없다. 언제나 늦게 찾아와 그렇지 않아도 무너진 가슴을 자근자근 짓밟는다.
“너도 어렸어. 말만 성인이었지. 준비된 상황도 아니었고, 네 책임도 아니었고.”
조곤조곤 달래던 정해준의 나직한 음성이 문득 웃음기를 띠었다.
“무엇보다 네 앞가림도 못했잖아.”
“…….”
다분히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정곡을 찔렸다. 머쓱해 하는 내게 정해준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탓하는 게 아니라, 그랬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 쉽게 노출됐고, 할머니와 새엄마가 나를 쉽게 흔들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앞가림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