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 Machine RAW novel - Chapter (124)
# 37장 두 번째 입회자 (4) #
‘내….내 눈은 잘 못 되지 않았어.’
목숨의 위기를 겪었던 것도 잠시였고 연무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여운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다. 무명이 보여주었던 그 검초의 후반부 초식이.’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스물네 개의 동일한 검식으로 이루어진 초식의 위력은 자신이 펼쳤던 초식보다 더욱 절묘했고 검초에서 일어나는 검력은 배로 강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천여운의 그 말에 연무화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승부는 결착이 났다.
같은 화경이라 해도 한 단락 이상 차이가 났기에 공력에서 밀린다고 여긴 그녀는 절세검법으로 이를 보완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천여운이 더욱 뛰어났기에 다시 승부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결과는 같은 것이다.
“네 녀석의 승리다. 패자는 유구무언이다.”
유구무언(有口無言).
말 할 입은 있어도 할 말은 없다는 의미였다.
의외로 그녀는 패배에 대한 인정이 빨랐다.
괴팍하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어떻게 나올지 몰랐는데, 이 점은 다행스러웠다.
“이제 그 검법들을 어떻게 익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천여운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녀가 비장의 비기로 썼던 검초였다.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그 검법은 검마가 극도신과 겨룬 후에 파훼검법을 정리한 이십사마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제대로 익힌 것은 아니었는지 초식이 미묘하게 불안정했지만 확실했다.
‘큭! 내가 할 소리다.’
사실 검법에 대한 진상은 그녀가 더욱 물어보고 싶었다.
주름 가득한 미간이 꿈틀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연무화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내 패배와 별개의 문제다. 알려줄 수 없다.”
답변은 거절이었다.
이에 천여운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무인이라면 검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까 저에게서는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 녀석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가 강제로 알아내려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먼저 네 녀석에게 공격했으니, 패배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고 한다면 내 한쪽 팔을 내놓을 각오는 되어 있다.”
“…….”
무인으로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팔마저 내놓는다고 과감하게 말하는 연무화의 완고한 태도를 보면 뭔가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진실을 가로막는 제약이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거론했던 그 무명이라는 자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천여운은 고민이 되었다.
두 번째 입회자로 설득하기 위해서 왔는데, 의외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잘 풀어나가지 못한다면 애써 찾아온 것이 그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 것이다.
‘주군…..’
이 부분만큼은 자신들이 도울 수 없었기에 천여운의 수하들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천여운이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꾸도록 하죠. 저는 당신이 검마종이나 현마종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여 그들과 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연?”
“왜냐하면 저는 그들과 공생할 수 없는 관계니까요.”
‘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천여운의 말에 연무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외부와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라고 해도 마교의 일곱 번째 공자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가 막 태어났을 당시에는 장로 회의에서 몇 번 거론되었을 정도로 화제였다.
‘내가 두 종파와 한 패인지 알아보려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었나?’
처음 중년의 고용인이 전해온 말을 듣고 판단했던 것이 오판인 듯 했다.
검마종, 현마종과 같은 길을 걷고 있냐는 질문에 같은 검종의 맥을 잇고 있냐는 의미로 알아들어서 노기가 치솟았었다.
‘내 성질에 내가 못 이겼구나.’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성격적인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스스로 오해했던 것이 풀리자 그녀가 허탈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연이라면 연이지. 놈들과는 악연이니까 말이야.”
두 종파를 떠올리면 분노가 치솟는지 연무화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스스로를 맥이 끊긴 검마의 종파인 검종(劍宗)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연 장로님. 검종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하아…..”
진지한 천여운의 질문에 그녀가 땅이 꺼질 것처럼 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종주를 물려받은 후로부터 이 질문을 어찌나 듣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 여섯 종파가 득세하고 있는 마교였다.
오백 년 가까이 내려온 교주 일가인 천가(天家) 역시도 반은 이 여섯 종파의 피가 섞여있었기 때문에 마연검종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외침은 묻히고 말았다.
‘여섯 종파 이외의 소교주 후보자라…..’
그들과 관련이 없는 그에게라면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마연검종은 유일하게 검마 공의 의지를 이어받은 검종의 후예이다.”
“검종의 후예?”
천여운이 알기로는 검마는 전인들 중에 누구도 제자로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검종의 맥이 끊어졌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연무화가 종파 대대로 구전으로 물림 받아왔다며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검마에게는 세 명의 전인들이 있었다.
경천, 무주랑, 연홍수.
이 세 명은 일반 무가 출신으로 검마가 뛰어난 근골과 재능을 지닌 그들을 발탁했다.
검마는 그들을 키워서 가장 뛰어난 검재(劍才)는 일인전승을 기본으로 하는 검종의 제자로 받으려고 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교주의 호위로 삼게 하려 했다.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검마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 역시도 탁월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세 명은 검종의 기본공과 내공, 검식들을 빠르게 익혔고, 이내 마교의 젊은 후기지수들 중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검마가 전인들인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뛰어난 무공보다도 마교에 대한 절대적인 충의(忠意)였다.
그런데 전인들 중에 경천과 무주랑은 그런 바람과 달리 갈수록 야욕을 가지게 되었고, 그를 후원해주는 여러 중소 종파들을 등 업어 교주와의 혼인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장로 회의에서 승인마저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검마는 치를 떨만큼 그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검마 공께서는 자신의 위명이 헛된 야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검마는 과감하게 전인들을 내쳤다.
그런데 그 분노가 야욕을 일으킨 두 사람이 아닌 연홍수에게마저 미쳤다.
검마는 연홍수마저 파문시켜버렸다.
검종의 맥을 이어 받기 위해 오직 검을 단련하는 데만 갖은 애를 썼던 연홍수는 두 사람으로 인해서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우리 마연검종의 조사이신 연홍수 공은 그렇게 파문 당하셨으면서도 검마 공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검마가 끝내 제자를 육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식이 없었던 검종의 맥이 그대로 끊기고 만다.
마교를 구한 전설인 검마의 맥이 이렇게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연홍수는 그의 후인임을 자처하고 제 이의 검종을 세웠지만 그 인가가 날 리가 만무했다.
“검마 공에게 중도 파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연홍수 조사께서는 본교의 장로 회의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연무화가 분에 겨운 듯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작 연홍수를 인정하지 않은 장로 회의에서 경천이 세운 검마종과 무주랑이 세운 현마종을 검종의 후예로 인정한다고 한 것이었다.
“흠.”
천여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음이 흘러나왔다.
연무화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했다.
검마종과 현마종이 공식적으로 검종의 후예라는 칭호를 받아서 개파하는 것에 분노한 연홍수가 두 사람에게 인정할 수 없다며 항의했으나, 오히려 교주 일가가 된 그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십 년 동안 금옥에 갇혀야만 했다.
“분노한 조사께서는 바로 잡을 것을 다짐했다.”
십 년 만에 출옥 했을 때에는 이미 두 종파의 성세가 높아져서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연홍수는 이를 구천에 있는 검마가 한탄스러워 할 거라 생각하여 자신이 그 맥을 이어서 검종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로 우리 마연검종에서는 검마 공의 진신마검을 복원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내공의 기초는 검종의 것이었기에 진전이 끊긴 진신마검만 복원한다면 검마와 검종의 명예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데서 기인하였다.
그러나 검마를 통해서 몇 차례 눈으로만 보았던 검법을 떠올려서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대에서 검법을 복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연홍수는 제자를 받아서 그 유지를 받게 하였다.
그러기를 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연검종의 숙원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검종의 맥을 이어받아 그분의 짓밟힌 명예를 회복하는 것과 두 번째는 그 분의 검법인 진신마검을 완전히 복원시키는 것이다.”
‘복원한 검법은 아니야.’
연무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여운은 의아해했다.
만약 진신마검 뿐이라면 오백 년에 걸친 성과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십사마검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여섯 종파의 태생이 아닌 이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천여운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연무화가 입을 열었다.
“교주님과 본교에 대한 충의. 검마 공이 바라셨던 본교를 위해 쓰레기 같은 현마종과 검마종의 손아귀에서 예전의 본교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아…..”
충의(忠意).
그것이야말로 검마가 제자들에게 바랐던 단 하나였다.
마연검종은 그런 검마와 검종의 맥을 잇기 위해서 일인전승을 택했고, 그 숭고한 정신인 충의를 종파의 종념으로 삼아 본교의 안위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인 종파인 마연검종의 종주들이 감당하기에는 여섯 종파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상대하기 벅찬 수준까지 이르렀다.
‘정말 대단하다.’
천여운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도관의 지하보고에서 좌호법에게 들었던 검마의 전인들은 그저 야욕이 넘친다고만 여겼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검마의 진정한 뜻을 받들려고 하는 자와 그 후손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자그마치 오백 년이나 그랬다니. 그 충심이 놀랍습니다. 마연검종은 진정한 검종의 후예로군요.”
“아아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천여운의 이 말에 연무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사종 대대로 듣고 싶어 했던 말을 뜻밖에 소교주 후보자인 천여운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님이나 조사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면 얼마나 감격하셨을까.’
마음이 뭉클해져서 말이 없어진 그녀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뭔가 결심했는지 말했다.
“마연검종이야 말로 검종의 진전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군요.”
“당연한 말이지 않느냐. 그딴 후안무치한 놈들이 검종의 진전을 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으득!
두 종파만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런 연무화를 바라보며 천여운이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탁!
“본교의 십 장로이자 진정한 검종의 후예인 연무화 공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소교주로 등극할 수 있게 입회자가 되어주십시오.”
“입회자? 그럼 나를 찾아왔던 이유가?”
설마 입회자를 찾는 것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연무화였다.
놀라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입회자가 되어주신다면 약속드리겠습니다. 현마종, 검마종….그뿐만이 아니라 여섯 종파가 득세하여 본교를 휘두르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하! 그걸 네 녀석이 할 수 있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그녀에게서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백 년에 걸쳐서도 갖은 노력을 했던 마연검종조차도 어찌해보지 못한 현마종과 검마종을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뒷배경조차 없는 천여운이 어찌한단 말인가.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이미 옛적에…”
연무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를 지켜만 보고 있던 허봉이 끼어들었다.
“허언이 아닙니다! 이미 독마종은 멸문했고, 지금 교내에 남아있던 무 부인을 비롯한 현마종의 사람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뭣?”
“모르셨습니까?”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외부와 단절하고 지내는 그녀는 교주전에서 소식을 전달해왔을 때도 사람을 돌려보냈다.
허봉의 말은 그녀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백 년의 세월 동안 견고한 아성을 자랑하던 여섯 종파였다.
‘저, 정말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점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연무화에게 쇄기를 찍듯이 천여운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십 장로가 저를 따른다고 충성맹세를 한다면 검마 공의 유지를 정식으로 이어받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정식으로 검마 공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로서 그분의 무공을 전수해주겠다는 말입니다.”
천여운의 마지막 말에 연무화의 두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천여운이 검마의 검법들을 알고 있는 것이 의문스러웠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분의 진전을 이어받아? 네, 네 녀석이 무슨 수로 그 분의 진전을 이어받았단 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는 그녀에게 천여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급서로요.”